곧게 뻗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둥치 아래로 나지막하고 여린
관목들이 수평으로 깃들어 조화로운 숲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부산 성지곡수원지를 지나 하늘을 가리고 쭉쭉 뻗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에 드니 장대비 퍼붓는 여름날 생각이 난다. 한낮인데도
하늘까지 자란 나무가 햇빛을 가려 어둑하다. 하지만 음습한 느낌은 없다. 장대비처럼 수직으로 도열한 삼나무와 편백나무 둥치가
뿜어내는 항균물질, 피톤치드 향이 공기를 정화해놓은 덕분이다.
100년 전 수원지 토사 유입 막으려
심어
한낮에도 어둑하지만 음습한 느낌 없어
피톤치드 향 효과로 머리 되레 맑아져
백
양산 기슭의 성지곡은 신라때 '성지'라는 이름의 지관이 팔도명산을 답사하다가 이 곳이 명당이라 감탄하며 철장을 꽂았다 하여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땅의 기운이 좋다는 성지곡에 수원지가 생긴 것은 1909년, 일제 강점 한해
전이다. 부산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대한국정부와 일본의 거류민 단체가 공동으로 개발한 근대문화유적이다. 수원지가 완공된
당시 헐벗은 산비탈에 비가 내리면 토사가 쏟아져 수원지로 들어오자 그것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심은 나무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삼나무, 편백나무들이다. 특히 시험적으로 심은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잘
자라서 이후에 계속 더 심게 되었다. 지금 성지곡수원지는 100년이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어 부산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삼림욕장이다.
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사생대회나 소풍으로 이 곳에 자주 왔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곳이고
시내와 가깝다 보니 일상적인 공간처럼 여겨져 새롭지 못하는 느낌이 먼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고정된
생각은 깨어진다. 갖가지 고유한 모습으로 말을 거는 나무들, 해마다 새로 난 잎이나 꽃들이 내뿜는 은은한 향기, 그리고 수원지
잔물결까지, 지금 살아있는 '산의 말씀'에 빠져든다. 저도 모르게 숨이 편안해 진다.
산의 말씀은/ 작년에도
올해도/ 꼭 같은 말씀// 솔바람 소리도 산의 말씀// 바위 밑에 꼴꼴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산의 말씀(반돈목 시 <산의
말씀>중에서)
물소리를 따라 오르니 '시가 있는 숲'이 나온다. 굴참나무, 상수리나무들 사이 시를 새겨 업고
바위돌이 서있다. 읽고 있으면 솔바람소리처럼 개울물소리처럼 마음을 씻어주는 시들이다. 부산에서는 해마다 오월 말이면 자연과
문화예술이 신명나게 어우러지는 생태 문화예술제 '금정산 생명 축전'이 열린다. 그 마지막 행사로 내가 좋아하는 '달빛 걷기'가
있다. 나는 가끔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참여해보았다. 달빛과 전등불빛 고리를 따라 걷는 부드러운 밤 산길도 좋았지만 어린이부터
할머니까지 부산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이어지던 정다운 사람들의 행렬이 더 마음에 남는다. 밤길에는
말소리가 바위 밑을 꼴꼴 흐르는 물소리같이 살갑다.
올해는 30일 오후 5시, 금정산 동문에서 시작하여 어린이
대공원까지 달빛 속 산행을 하여 이곳, '시가 있는 숲'에 닿는다. 그리하여 굴참나무, 상수리나무를 친구로 하고 다람쥐처럼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산상 음악회를 듣게 된다. 얼마나 멋진가. 가수 한영애의 콘서트가 있다고 하니 더 기다려진다.
시
가 있는 숲에서 본격적인 삼나무 편백나무 숲이 시작된다. 거기서 더 올라 쇠미산쪽으로 가다보면 샛도랑같은 오솔길이 나있는데
언제라도 호젓하다. 장골 같은 나무둥치가 하늘로 뻗어있는 이 숲길에서는 세상사 욕망에 찌든 허망한 생각들까지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향에 살균되어 머리가 맑아진다. 아토피나 알레르기에 특히 좋다는 삼림욕의 효과는 요즘 많이 알려졌다. 삼나무, 편백나무는
침엽수 중에서도 피톤치드 발생량이 많은 나무들이다. 원래 일본 수종이지만 우리 땅과 기후조건에 적합하게 생장하고 우리 사람들과
정들어 우리 나무가 되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수직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적갈색 나무둥치만 보면 구분하기 어렵게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편백나무 잎은 부채처럼 펼쳐져 끝이 맨도롬하고 삼나무 잎은 침처럼 찌르고 뭉쳐 나있어 구별할 수 있다.
박
하와 같이 시원한 피톤치드 향은 아침햇살이 숲으로 찾아들 때 가장 짙게 난다. 늠름한 장정들 같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둥치 아래로
작은 관목들이 아기 손바닥같이 여린 잎들을 펼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수직의 힘과 수평의 따스함이 어우러진다. 아침 햇살이
들어도 숲은 어둑하지만 가끔씩 "쨍"하고 맑은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는 듯, 어룽거리며 나무 둥치 여기저기에 둥근 무늬를 그린다.
그 때 숲은 가장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