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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3장 13-19절
"그 무렵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근사한 설렁탕집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점심을 한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뺑뺑 돌아다녀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더군요.
아이들은 보채고, 큰 마음먹고 한번 쏠려고 했었는데...
"이를 어쩌나? 집에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근사한 설렁탕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우리는 로또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이 크게 떠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눈치 없는 한녀석이 "신부님!" 하고 크게 소리치다 보니 사장님이 제 신분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불쌍하게 생긴 아이들 얼굴과 그에 못지 않은 제 얼굴을 연신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크게 선심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 앞에 놓여진 음식을 보고 저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 식탁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밥도 꾹꾹 눌러 담아주셨지만, 설렁탕 그릇 밑에 깔린 고기의 양이 벌써 달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큰 파전까지 하나 서비스로 주셨는가 하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10000원이나 디스카운트를 해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했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해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신 다음, 당신의 구원사업을 협조해줄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셨던 사람들 명단을 몇배수로 뽑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사업에 잘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식별하기 위해 밤새워가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가련한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은 덕중의 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덕 역시 측음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영육간의 고통들, 영육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좌절과 한계,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십니다.
하루 온 종일,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사업에 매진하십니다.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단 한명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대면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고 잘 해결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십니다.
당신 홀로 힘으로는 중과부적임을 절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똑같이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고 계심을 저는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의 두손이 되어드리고, 두 발이 되어드리는 하루이길 빕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드리고, 주님 기적의 능력이 되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진 바를 기꺼이 내어놓고 나누는 하루이길 빕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3,13-19
이것이 없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열둘을 지명하십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입장에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 같이 출발했는데 어떤 이들은 진전이 있고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를까요?
당연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기하다 넘어지는 사람처럼 목적 없이
달리다가는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끌어내리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유튜브 지식인사이드에 ‘40년째 운동하는 80세 할머니’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남들이 먹는 혈압약이나 당뇨약, 고지혈약, 골다공증약 등의 성인병 약은 입에도 안 대는 것은 물론 “감기, 몸살 한번 없었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 걷기 힘든 증상을 느꼈고 병원에 갔더니 협착증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근육이 감소해서 그러니까 근력운동을 좀 하세요.”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근력운동은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한 달을 하니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이 절실함이 보디빌딩 대회에서 시니어부 우승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헬스클럽 관장님이 대회에 나가라고 했을 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도 도전하는 거 좋아하니 일흔다섯에 시작해도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엔 비키니를 입는 것도 창피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려고 마음먹고는 개인 트레이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세 시간 식당 알바를 하며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만약 이 할머니 보디빌더를 그분의 부모님이 보고 계시면 마음이 어떨까요? 기쁠 것입니다.
당신들이 준 몸을 끝까지 잘 가꾸고 누구보다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혼다 자동차 주식회사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는 자동차와 엔지니어링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도전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인내와 혁신, 끊임없는 비전 추구를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회복력과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으로 역경에 맞서 혼다를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혼다는 “꿈을 가질 것, 끊임없이 도전할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 라고 충고합니다.
성공이 있기까지는 99%가 실패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다면 그건 근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해 보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명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소명이 나를 창조한 이가 있고 불러준 분이 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오르지 않고 타인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소명 의식이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특별히 나의 삶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입니다.
신학생 때 같은 반 학생에 저에게 “형, 다른 사람들은 쓰러지는데 형만 혼자 1등으로 도달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 ‘다른 친구들하고 왜 함께 오지 않았니?’라고 하지 않으실까?”
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올라야 나를 보고 다른 이들도 오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절벽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빠르게 오르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장 아랫부분에서 서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도 오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진보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영성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 사명입니다.
무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을 주신 분께 대한 사랑의 보답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 3, 14)
예수님께서 불러주셔서 고맙고 예수님께서 함께하여 주셔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더 멋진 삶을 살고픈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으십니다.
가장 맑은 만남은 다름아닌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만남입니다.
있어야 할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전혀 어색하거나 전혀 아깝지 않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기에 함께하는 행복도 몰랐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여정이 가장 좋은 복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와 함께 숨을 쉬고 함께 움직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부르심이 시작된 곳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사랑이란 우리가 더 많은 일들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내는가장 큰 행복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고 계신 곳에서 함께 지내는 가장 큰 사랑이 우리 부르심의 목적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것이 복음 선포이며 가장 건강한 복음의 권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 여정이 가장 큰 우리의 중심입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학창 시절에 부러운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과연 어떤 친구를 부러워했을까요?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그림 잘 그리는 친구, 노래 잘 부르는 친구, 춤 잘 추는 친구…. 사실 이런 친구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부러웠던 친구는 모발이 얇은 친구입니다.
저의 머리카락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완전한 직모입니다. 별명도 머리카락에 관계되는 것뿐입니다. 돼지털, 빗자루 등입니다. 완전히 뻣뻣한 직모인 머리카락을 넘겨 가르마를 만들 수 없었고, 조금만 길어지면 사정없이 뻗치는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스포츠머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싫어했기에, 모발이 가늘어서 자유자재로 머리 스타일을 만드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너의 머리카락이 너무 부럽다.”라며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가는 모발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대부분 머리카락이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리곤 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장원에 가도 “머리카락 숱도 많고, 모발이 이렇게 튼튼하니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제는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 모습도 언젠가는 만족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실망할 삶이 아닌 감사할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할 제자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어부였고, 세리도 있고, 열혈당원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유능함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바로 뿔뿔이 흩어진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포기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자기를 이끌어 줄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포기와 좌절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기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자유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장 폴 샤르트르).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3,14)
'참사도!'
오늘 복음(마르3,13-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열두 명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도(apostolos)'라 이름하십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다니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먼저 그들의 직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그리고 마태오처럼 '어부와 세리'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 마태오와 반로마세력이었던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의 정점(頂點)이 '십자가 죽음'이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배반도, 유다 이스카리옷 배반도 필요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태26,56)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으로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당연한 모습처럼 다가옵니다.
떠나갔던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후부터는 '참사도의 모습'으로 대변신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참사도'가 됩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20,23)
'성령이 답'이네요.
우리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받고 참사도들이 되어봅시다!
첫댓글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ㄱ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타리옷이다. (마르 3, 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