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고(推敲)의 고사'를 알고 있습니다.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어느날 장안(長安)으로 향한 길을 가면서 생각은 시(詩)에 몰두하였습니다.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의 댓구(對句)를 승퇴월하문(僧堆月下門)으로 할 것인가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경조윤(京兆尹)의 행차를 방해하게 된 것이지요.
자초지종을 들은 경조윤이 밀 퇴(堆)보다는 두드릴 고(敲)가 낫겠다고 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의 경조윤이 바로 한 유(韓 愈)라는 사람입니다. 후대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문장가이자 정치가입니다. 오늘은 퇴지(退之) 한 유(韓 愈)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그는 많은 시와 문장을 남겼습니다. 그 안에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의 여러 장면들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던 한 선비의 일상과 감정이 녹아 있기에 역사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그중에는 작품 자체로서의 명문(名文)도 많습니다.
< 아아! 선비는 궁핍할 때 비로서 의리가 들어난다. 요즘 사람들은 마을거리에 거(居)하며 서로를 흠모하고, 먹고 마시며 어울려 노닐며, 오라하면 달려가고 살랑살랑 억지로 웃음짓고 말하며, 굽실거리고 낮추며 두 손을 부여잡고 간이라도 빼내어 보여줄 듯하면서, 해를 가리키고 눈물도 흘리면서 죽어도 변치말자 맹세하며, 진짜 그럴 것처럼 한다.
하지만 일단 자그마한 이해관계에 부딪히면, 터럭이나 머리털 같은 자잘한 이득에 안면을 바꿔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함정에 빠져도 손을 내밀어 구해주지 못할망정 도리어 밀어뜨리고 다시 돌을 던지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 이것은 금수(禽獸)와 오랑캐조차도 차마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계략이 통했다고 생각한다. > ( ‘자를테면 자르시오’, 고 광민, p 102 )
이 글은 친구이며 동료이자 역시 시인이었던 유 종원(柳 宗元)의 묘지명(墓誌銘)으로 써준 것의 일부입니다. 1200년전 사람들의 친구 사귐이 오늘날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그러하다’ 고 말한 것을 보면 직선적인 성격의 한 유가 그 시대를 살아가기가 수월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 장안(長安)의 어느 골목 창문에, 머릿속에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한탄(恨歎)을 가득히 담고서 조용히 앉아 붓을 놀려가는 한 지식인의 실루엣이 보이는 듯합니다.
한 유의 성장기는 불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었고, 그의 형들도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 그 가족들을 한 유가 부양하였습니다. 문장에 자신을 가진 그였으나 25세에 겨우 진사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당시의 과거 시험은 우선 진사과에 합격하고 다시 박학홍사과(博學鴻辭科)라는 소위 2차 시험을 통과해야 해야만 중앙의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기에는 뒤를 보아주는 고관대작의 추천이 필수적이어서, 누구나 고관대작들에게 자신을 추천하는 자기소개서를 들고 소위 배경 작업을 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빽(?)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관대작들에게 굽실거리는 아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소개서에는 자신을 천리마에 비유하며, 바로보는 눈이 있다면 나같은 사람을 뽑아 국가 사회에 큰 이바지를 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후회할 것이라고는 투로 서술하고 있으니, 연고도 없는 고관대작들이 그를 예쁘게 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방 현령으로 있을 때 상관인 절도사에게 보낸 항의 서한에는, 환관들에게 휘둘리어 불의를 감싸준다면 자기 직책을 내어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부분도 보입니다. 많은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소출(所出)이 나오는 물려받은 장원(莊園)도 없어서, 잘린다면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할 처지의 그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보다 400년 먼저 태어난 동진(東晋)의 도 연명(陶 淵明)은 쌀 닷 말 봉록 때문에 어린 사람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현령 자리를 내놓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습니다. 벼슬길 아니면 가족과의 생활을 도모할 수 없었던 한 유는 차마 그러지는 못하였습니다만, 타고난 성격을 어쩔 수 없어 끊임없이 아슬아슬한 순간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도 연명이 보여준 ‘오만한 허리뼈’를 그는 숨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한 그는, 심지어는 황제의 명으로 행하는 불교 숭상 행사를 중지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머나먼 남쪽 팔천리 조주(潮州)로 유배나 다름없는 좌천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하여 황제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 전전긍긍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유배길에서 사랑하는 어린 딸(韓 拏)을 잃어 차가운 땅에 묻고, 나중에 선영으로 옮기면서 쓴 ‘제녀나녀문(祭女拏女文)’은 행복한 아버지들이 읽어도 딸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저미게하는 명문입니다.
그가 때론 조심하느라 몸을 사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을 감출 수 없었던 그는 대체로 가는 곳마다 부정을 저지른 이들을 법대로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음해와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좌천과 승진을 꾸준히 반복하다가, 4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황궁에서 인사고과를 담당하거나 황제의 조칙을 다듬는 일도 하게 되었고, 법무부 차관 격인 형부시랑, 국방부 차관 격인 병부시랑을 그리고 인구 120만에 이르던 수도 장안의 시장(市長)격인 경조윤(京兆尹)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강직한 성격’과 ‘순탄한 벼슬길’은 코드가 맞지 않지요. 윗사람에게 굽실거리는 일을 싫어하고 언제나 직언을 일삼는 그가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면, 그동안 그의 마음 속에 일었던 울화와 갈등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57세의 그는 이부시랑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장안 남쪽에 별장에 은거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피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의 험한 파도를 거쳐온 그가 마지막으로 맞이한 평온이었습니다. 가난했던 성장기와 30여년의 벼슬길을 되돌아 보는 한 유... 그의 일생은 그가 부딪혀온 수많은 부조리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을 숭상하여 후대 성리학의 원조로 일컬어지기도 하며,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답게 훌륭한 글들을 남겨서 중당(中唐)의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우뚝 남아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시 <남계에 처음으로 배를 띄우고(南溪始泛)>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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饋我籠中瓜 바구니 속 오이 꺼내주며
勸我此淹留 날더러 이곳에 머물라 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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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去無得得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으시대지 않고
下來亦悠悠 물러나 한가히 살아도 마음 편안하네
但恐煩里閭 다만 걱정스러운 건 이웃 마을에 폐를 끼친다거나
時有緩急投 때론 급한 일로 신세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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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서도 민폐를 끼칠까 걱정하는 마음과 언제나 거만하지 않았기에 마음 편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은퇴한 후에 이렇게 당당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쓴 ‘잡설 2 (雜說二)’ 라는 글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 명의(名醫)는 사람의 마르고 살찜을 눈여겨 보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맥(脈)이 병들었는지만을 관찰한다. 천하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천하의 위태로움(危)과 평온함(安)을 눈여겨 보지 않고, 기강(紀綱)이 세워져 있는가 문란(紊亂)한가를 본다. 천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가 있고 안위(安危)는 마르고 살찜에 비유할 수 있으며, 기강은 맥(脈)에 비유할 수 있다.
맥이 병들지 않으면 비록 말랐다고 해도 아무런 해(害)가 없으며, 맥이 병들었으면 살쪘다고 해도 죽게 된다. 이러한 이치를 꿰뚫어 아는 사람은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도 알 것이다......... > ( ‘자를테면 자르시오’, 고광민 p169 )
국민소득이 낮아도 기강(紀綱)이 맑은 나라는 미래가 있는 반면, 풍요로워도 기강이 무너진 나라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한 유가 마치 오늘의 우리 나라를 미리 보고 확실한 처방을 내어 준 것이 아닐까 착각하게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사람 사는 이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거늘, 옛 사람들의 글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야 할 지혜를 얻어야겠습니다. 아무리 우주시대가 활짝 열렸다고 하더라도.........
* 참고 : <자를테면 자르시오>, 고광민 옮김, 태학사 2005
<한퇴지 평전> 노 장시 편역, 지식산업사 1994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瑞香님 감사합니다.
고운글이로군요
삼도헌님의 답글에 더 힘이 솟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