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비는 청나비가 아니다
정영숙
한때 난 아이 같은 당신을 사랑했네
당신 알몸에 내려앉아
푸른 옷에 푸른 깃을 달고
한 시절 보냈네
하늘도 청청
산도 청청청
강물도 청청청청
내 눈 속에는 온통 청색 뿐이었네
당신이 몸 바꾸는 줄 모르고 혼자서 푸른 노래만 불렀네
창공을 날아오르며 무지갯빛으로 빛나던 당신
사람들의 환호성에 내가 입은 청색은
우울의 블루가 되었네
내가 잠시 앉았던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었네
당신의 알몸을 빌어 잠시 내가 청색을 입었을 뿐
당신은 원래 무색의 알몸을 지닌 아이
한때 난 아이 같은 당신을 몹시도 사랑했었네
--- 시터 동인 제9집(근간)에서
정영숙 시인의 [청나비는 청나비가 아니다]라는 시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고 어떤 깨우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요컨대 청나비가 청나비의 탈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성에 내가 입은 청색은/ 우울의 블루가 되었네”라고 탄식을 하고 있듯이, 왜, 그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우울의 블루’에 빠져 들었다는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와 ‘당신’의 관계가 역전되고, 그 결과, ‘청나비’라는 주체가 ‘당신’이라는 타자의 주체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때 나는 아이같은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 알몸에 내려앉아/ 푸른 옷에 푸른 깃을 달고/ 한 시절 보냈”다. “하늘도 청청”했고, “산도 청청”했다. “강물도 청청”했고, “내 눈 속에는 온통 청색 뿐이었”던 것이다. 내가 환상과 현실,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청나비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당신이 몸 바꾸는 줄 모르고” “혼자서 푸른 노래”를 부르는 동안, 당신은 “창공을 날아오르며 무지갯빛으로 빛나”게 되었고, 그 결과, 나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우울의 블루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어제의 주인이 오늘의 노예가 되고, 어제의 노예가 오늘의 주인이 된 이 ‘대 반전의 증상’이 ‘우울의 블루’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제와 스승들은 모든 인간들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미성년의 상태로 묶어두려고 하지만, 그러나 모든 천재들은 그 사제와 스승들의 낡디낡은 편견과 오류를 깨뜨리고 대반전의 역사를 쓰게 된다.
청나비에게 있어서 청색은 믿음이고 신앙이었지만, 그러나 당신이 무색의 알몸에서 무지갯빛으로 몸을 바꾸는 순간, 청나비의 신앙과 믿음은 하나의 광신이며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은 환상과 현실,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밥을 주고 옷을 입힐 수 있는 무색의 알몸을 지닌 어린아이였지만, 그러나 그 아이가 창공을 날아오르며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순간, 나는 이 구세주를 추종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라는 사람은 타자의 주체성을 짓밟고 그를 지배하려고 하고, ‘세계가 있고 내가 있다’라는 사람은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그와 동일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모든 인간 관계를 규정하려고 한다. 정영숙 시인의 [청나비는 청나비가 아니다]라는 시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그에 대한 죗값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손오공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더욱더 크나큰 재앙, 즉, ‘우울의 블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은 색이고, 색은 공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도 공이고, 이 텅 빈 공이 잠시잠깐 하나의 환영처럼 돈과 명예와 권력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일 뿐이다.
금과 은과 옥도 먼지이고 때이고, 청나비도, 어린아이도, 전제군주도 모두가 다같이 먼지이고 때(티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