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63]50년대 임실의 ‘찬샘(냉천冷泉) 마을’
엊그제 80여년간 모아놓은 여러 문건들을 정리하다, 이색적인 표창장을 발견했다<사진>. ‘냉천부락 대표인 조문석-하일포’가 아버지께 수여한 표창장. 내용인즉슨, 편모偏母를 섬기는데 있어 ‘양지養志 양체養體(몸과 마음을 살피고 돌보는 일)’에 선능善能(참 착하게 잘함)하고, 동생과 우애롭게 지내는 것을 칭찬하며 표창을 한다는 것이다. 관인처럼 냉천부락 도장(둔남면 냉천리. 둔남면은 1992년 오수면으로 개칭됐다)까지 찍혀 있다. 연도를 보니 4290년 7월 28일. 서기로 1957년이니, 내가 태어난 해이고, 7월 28일은 아마도 말복이나 되어 동네가리(총회) 때일 듯싶다. 아버지는 당시 30세. 아버지는 표창장도, 마을대표인이 동네이장이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다하신다.
한 동네에서 이제 막 서른인 젊은이에게 이런 표창장을 수여했다는 게 희한했다. 할머니는 49세 과부이고, 6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다. 4대 독자인 할아버지는 30세에, 60세 상할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곡기를 끊고 5개월 후 아들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두 분의 나이를 합치고도 7년을 더 살고 계시는 임실군 장수長壽노인으로, 어머니(2019년 별세)와 72년 동안 해로하셨다. 참 대단한 기록들이다. 1948년 결혼하여 아들만 내리 네 명을 거느린 가장家長이었다. 외가마을 집성촌(진양하씨, 옥천조씨)인 냉천마을에서 자수성가하려 애쓸 때였다. 보지 않았어도 예의가 바랐을 것이다.
그때 동네 규모는 얼마나 됐을까? 60년말부터 20여년간 동네일(이장)을 본 아버지 기억으로는 60가구, 인구가 4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30가구, 모두 합해야 100명도 되지 않은 쇠락한 시골마을이지만, 당시는 동네를 대표해 주민에게 표창장을 줄 정도였으니, 틀이 제법 잡힌 마을이었으리라. 잘 살든 못살든 모두 인정이 살아 넘쳤던 전형적인 농촌마을. 구전口傳이지만, 어사 박문수가 지나다 동네우물에서 마신 물이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 ‘동네 이름을 냉천冷泉이라 해라’에서 유래된 우리 동네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보신 분들은 하나같이 인정하고 부러워한다) 지형인데, 임란직후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의 졸문 명칭은 ‘찰 냉冷’ ‘샘 천泉’을 우리말로 풀어써 '찬샘'이다. 마을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샘(우물)은 동네 뒤 축사 때문에 오염돼 매몰을 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유일한 흠이다. 한 동네출신 축사 주인은 마을에 씻을 수 없는 ‘죄罪’를 지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시골동네에는 이런 골통들이 꼭 한두 명 있게 마련이다.
아무튼, 드론으로 찍은 현재의 마을 모습을 보면 나는 늘 가슴이 짜안하다. 고향故鄕은 세상을 보는 나의 기준이었다. 서울에서의 대학시절, 나의 거리 개념은 모두 고향이 기준이었다. 우리집에서 임실까지의 거리, 남원까지의 거리로 계산했다. 종로다방에서 이화여대생과 첫 미팅. 임실을 모르기에 전주와 남원 사이라고 했더니, 남원이 전남이냐고 물어 기분이 몹시 상해 그만 나와버린 기억도 있다. 빈집도 있고, 헐어버린 집터를 보면 속이 상한다. 그때 고샅마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맨 길냥(길고양이)들이 내지른 똥들만 눈에 띈다. 한때는 사나운 개들을 키워대 고샅을 돌아다니기가 거북했었다. 어쨌든, 나의 표현으로는 ‘구석기 시대’라 보면 된다. 하루종일 대문앞을 지나는 주민이 다섯 손가락을 꼽기 힘들다. 적막강산寂寞江山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한 달에 한번꼴로 한양漢陽 나들이를 하면 수많은 인파에 놀라곤 한다. ‘지옥철’을 타면 ‘콩나물시루’같던 버스도 생각난다. 그 버스 속에서 담배도 피우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 동네는 맨 홀로 된 할머니들뿐이다. 할머니들은 나를 보고 ‘청년’이라고 부른다. 고향에 돌아오면 늘 쓸쓸하고 씁쓸하다. 시청공무원으로 정년퇴직 후 귀향한 2년 선배가 이장里長을 맡아 ‘빛나는 마을’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으로 많은 것이 빠르게 변했다. 6학년 7반인 나조차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세상은 AI시대가 되어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가 좋은데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는 고향이 좋다. 내가 태어난 이 집이 좋고, 이 집에서 자연사自然死를 희망한다. 자기가 태어난 바로 그 장소(현재의 편백나무 침대)에서 고종명考終命을 한다면, 행운아 중의 행운아일 것이다. 제발 그리 되기를. 흐흐.
또 하나, 재밌는 자료는 당시 29세인 아버지는 낡은 노트(작기장)에 23세 동생(부계父系 유일한 친척인 숙부) 결혼식 때 들어온 축하물품들을 기록해 놓았다. 1956년 11월 26일, 당시엔 돈이 귀해 모두 물품으로 한 모양이다. 저고리, 능금, 두부, 밤, 명태, 계란, 치마, 심부름꾼 제공 등인데 1000, 600, 800. 200, 300원(환) 등 시가時價까지 적어놓으며, 쌀 한 말이 1450원(환)이었다고까지 기록해놓았다. 하하, 세상에나, 만상에나, 이런 기록까지. 우리집으로서야 대단히 귀중한 자료가 아닌가. 사촌동생들에게 곧바로 사진을 찍어 보냈다. 저네들도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이 기록으로 처음 알게 됐을 것이고, 축하금이 모두 소소한 현물인 것이 못내 신기한 모양이다.
여러 졸문에서 누누이 말했지만, 나의 생활졸문도 훗날 나와 우리 가족사를 복원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이런 기록습성은 아버지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이 틀림없을 터.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혹시 넷째 아들 이름에 ‘기록 록錄’자를 명토박은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헤엄칠 영泳’자이니 ‘기록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죽을 때까지 학생’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기록맨’을 자처할 생각이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