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성공적인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일까.물질의 풍요를 좇다가 재능을 낭비하고 가족의 행복까지도 날려버린 오닐의 아버지에 관해 읽으면서 하는 생각이다.
○피와 눈물로 쓴 슬픔의 극
노벨상 수상작가 유진 오닐은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그가 폐결핵 진단을 받은 1941년말 가족이 겪은 고통과 슬픔을 생생하게 그린다.작가로서 가족의 어두운 역사를 연극으로 꾸미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세번째 결혼에서 마침내 얻은 마음의 평화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기에 가능했다.그는 작품 맨 앞장에 결혼 12주년을 기념하며 부인 칼롯타에게 쓴 편지에서,이 작품이 그녀가 베푼 사랑 덕택에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모형제에게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를 구하려고 피와 눈물로 쓴 오랜 슬픔의 극이라고 말한다.
○돈 외엔 남은 건 허무함뿐
오닐 가문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사람들이다.제임스 오닐(유진 오닐의 아버지)은 어려서 가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이때 돈의 위력을 뼈저리게 터득한다.다행히 수려한 용모에 연기력을 타고난 그는 배우가 되었고,그가 출연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히트하면서 돈을 벌게 된다.엘라라는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도 이 작품을 공연하면서였다.한편,‘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성공이 모든 면에서 보탬이 된 것은 아니었다.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과 인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는다.
첫째,그에게는 좋은 배우가 될 소질이 있었는데 한 작품에서 나오는 고정 수입에 집착하다 보니 자기 계발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그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35년동안 3천5백여회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공연을 했다.일생을 한편의 3류 드라마와 맞바꾼 셈이다.자신이 깊은 수렁에 빠졌음을 깨닫고 새로이 변신하기를 원했을 때 그는 이미 너무 늙었고 그 작품 안에 완전히 갇힌 상태였다.
둘째,제임스 오닐은 가족 전체의 행복을 희생시킨다.부인 엘라는 한 곳에 정착해 자식을 기르고 싶어했지만 순회공연을 하는 남편 때문에 온 가족이 극단을 따라다니기 일쑤였다.인색한 남편은 가족을 위해 돈을 쓰기 싫어했고 뭐든지 싸구려로만 사려 했다.
공연이 없는 여름에만 지낸다는 이유로 허름한 건물을 사들여 가족에게 살게 하고,출산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돌팔이 의사에게 데려갔다.돌팔이는 당장 통증을 처리하기 위해 모르핀을 주었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약 중독자가 되어갔다.
자식들의 경우는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하나는 병으로 죽고,또 하나는 결핵 요양원에 들어가고,나머지 하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부초처럼 각지를 떠돌며 자란 그들이 실패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그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도,돌아갈 고향도 없었으며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극화된 제임스 오닐은
“우리는 꿈으로 만들어진 존재,우리의 삶은 잠으로 완성된다”라고 셰익스피어를 암송한다.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아직 남아있다.여기에 막내아들은 “우리는 인분으로 만들어진 존재,실컷 마시고 다 잊읍시다”라고 비꼬아 대꾸한다.
삶 자체에 대한 철저한 저주다.하나같이 상처 입은 식구들은 서로 바라보는 것조차 고통이었다.잊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들은 늘 술에 절어 산다.어머니는 매일 모르핀 주사를 맞고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오후가 되면서 약기운에 취해 현실을 벗어나고 자정쯤에는 남편과 처음 만났던 수십년 전으로 돌아간다.그리고 다락에서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가져와 남편에게 준다.할 수만 있다면,결혼전으로 돌아가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뜻이다.그녀의 어릴적 꿈은 수녀나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미국인만의 비극이 아니다.
1998년을 사는 한국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코리안 드림을 좇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1∼2년이 멀다 하고 이사하며 아파트 평수로 행복을 측정한다.
자녀들이 정원도,친구도 없는 콘크리트숲에서 자라 어떤 인간이 될지에는 관심이 없다.기우이기를 바라지만,그들도 언젠가 극중 오닐의 어머니처럼 “나는 내 영혼을 더이상 내것이라 부를 수 없어요.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그래서 다시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절규하게 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