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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강. 지견불생분 ②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지혜가 또 따로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까? 아니죠?
그 경계를 인연법으로 봄으로서, 보는 그 자체로 인해서 경계에 속아 화내고 성내고 미혹된 번뇌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지혜로 바뀐 거거든요.
그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지혜의 속성은 어떤 것이냐?
이것을 금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금강경에서는 항상 반야바라밀이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그럼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반야의 그 내용이 뭐냐는 것이죠.
그 내용은 우리가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자비성품,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렇죠?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럼 그 불성의 내용이 뭐냐 하면 첫째 무소득이라는 말이에요.
반야심경에서 많이 외우잖아요.
무소득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지혜가 본래 나에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밖으로 구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본래 불성을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불성을 드러낼 수가 있지, 없는데 어떻게 드러낼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그 불성 속에는 또 뭐가 있다 그랬죠?
모든 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는 밖으로부터 들어 올, 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무득과 동시에 또 우리 마음속에는 무엇도 거기다가 세울 수가 없다는 거에요. 집착할 것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걸 뭐라 그랬죠? 무소유라 그랬잖아요.
왜 무소유냐?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허공에다 무엇을 어떻게 세워 놓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허공에 무얼 세워 놓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21세기 뭐가 과학이 발달해도 허공에는 무얼 세워 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허공에는 세울 수가 없다는 말은 우리 본래 청청한 마음자리에는 번뇌라든지, 시비, 질투, 탐진치 이런 욕심, 에고이즘, 에고심 이런 것들을 세워 놓을래야 세워 놓을 수가 없고, 붙들래야 붙들어 놓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괜히 자기가 착각해서 그런 욕심을 붙들고 있는 것이고 괴로움을 붙들고 있는 것이지.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왜? 마음은 항상 물과 같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또 우리에게는 부처님과 같은 불성이 있고 부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여러분들이 그걸 믿지를 않아요. 왜 믿지 않느냐 하면 나는 중생이라 그러는 거에요.
왜 중생이냐고 물어보니까 나는 때가 많이 묻었다는 것이죠. 나는 많이 오염이 됐다는 거에요.
그럼 왜 때가 많고 오염이 됐습니까? 물어보면 그건 잘 모른다는 거에요. 어쨌든 지금 나를 보면 오염이 많이 됐고, 때가 많이 묻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착각이라는 거에요. 왜? 허공에다가 어떻게 오염을 시킬 수가 있어요? 허공에다 오염을 시킬 수 있어요? 허공에다 여러분들이 기름을 갖다 퍼 부은들 허공이 더럽혀 지느냐고요.
마음이라는 이치를 여러분들이 조금만 공부하면 마음은 항상 허공과 같이 비어있고, 항상 물과 같이 흘러가는 순간들이기 때문에 마음에다가 이 마음이다 하고서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가 없다는 거에요.
흐르는 물에다가 발을 담궈 가지고 발을 씻었을 때 여러분들이 이 물이 내 발을 씻었다고 할 수 있을 물을 들어낼 수가 있냐 이 말이에요. 이미 그 물은 흘러 가버리고 없는 거에요. 마음이라는 속성이 그렇다는 거에요.
금강경은 지금 계속 여러분들에게 마음이라는 놈한테 속지 말라고 하고 있는 거에요.
이런 법문들은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물질적인 보배를 얻었다 하더라도 물질적인 보배는 금생에 살아 있을 때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그 순간뿐이지 이러한 마음 공부를 하는 것은 세세생생토록 영원한 보배가 되는 거에요. 왜 영원한 보배가 되느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업을 여러분들이 멸할 수가 있고, 그 업이 멸하므로서 여러분들이 세세생생토록 지옥고를 안 받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태산 같은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육신이 있는 이 금생뿐이지 부처님의 말씀인 이 금강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고 나면 세세생생토록 여러분들이 행복한 거에요. 왜?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가늠이 지어지느냐 하면 마음이라는 놈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마음을 알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하게되고, 마음이 안락하고 행복해지면 물질하고 상관없이 마음은 편안해 지는 거에요.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물질이 없어도 항상 마음 평수가 넉넉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그건 마음을 잘 컨트롤 하고 다스릴 수 있는 지혜가 있어서 그렇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는 중생이라고 이야기를 해 본들, 내가 때가 많고 오염이 많이 됐다고 이야기 해본들 사실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미혹하고 지혜가 없어서, 부처님 불법을 몰라서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지 부처님 불법을 알고, 듣고 이해를 하게 되면 여러분 마음은 오염 시킬래야 오염 시킬 수가 없고,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도 없는 부처님 마음과 똑 같은 청정 자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금강경에서는 계속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래도 나는 중생인 거를 뭐 어떻게 하겠어 하면서 경계가 오면 그 경계에 속아서 죽이니 살리니 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냥 괴로워하고 그러거든요. 그럼 자기만 괴로운 거에요. 자기만 고통스러운 거에요.
그건 왜 그러냐? 어리석어서 그런 거에요. 그러니 부처님의 금강경 법문을 한 번이라도 와서 들었으면 그 괴로움을 당할 때, 아~ 내가 어리석어서 나를 괴롭히고 있구나.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고 허공과 같아서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도 없고, 붙들래야 붙들 수도 없고, 이미 경계를 당해서 일어났던 모든 감정들은 다 물과 같이 흘러 가버리고 없는데, 지금 이 마음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인데 왜 이미 흘러간 마음을 미련을 가지고 계속 붙들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느냐고 돌이킬 수 있어야하는 거에요.
하지만 그러질 못하고서는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이를 갈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 잘났다 그러죠. 흘러간 마음을 어디다가 붙들 데가 있다고, 괴롭힐 데가 있다고.
이미 그것은 벌써 낙동강 700리를 흘러 바다까지 가 버렸는데 혼자 밤에 잠 안자고 붙들고서 분하게 생각하고 앉아 있는 거에요.
부처님 금강경을 한번이라도 들었으면 그런 일이 없다는 거에요. 아시겠어요?
그걸 부처님이 줄기차게 계속 이야기 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거는 이거에요.
우리 육신은 나고 죽는 것이 있죠? 인연이 다하면 헌 옷 버리고 새 옷 갈아 입듯이 갈아 입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죽을래야 줄을 수도 없고, 없앨래야 없앨 수도 없고, 안 볼래야 안볼 수도 없고, 영원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뭐에요? 그게 우리 부처님의 진여불성이라 이 말이에요.
이 진여불성을 금강경에서는 뭐라 그랬냐 하면 무생이라 그랬거든요. 無生무생. (없을 無무, 날 生생) 남이 없다 그랬어요.
본래 우리 자성, 청정한 불성자리는 경계를 당해서 그 경계에 동요되어 그렇게 나고 죽고 하는 생멸의 괴로움을 당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거에요.
비유를 하자면 여기에 24금 순금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순금을 목걸이로 만들었다면 순금이 죽어서 목걸이가 된 거에요? 팔찌를 만들었으면 목걸이가 죽어서 팔지가 된 거에요? 또 반지를 만들었으면 팔찌가 죽어서 반지가 되었느냐고요.
다만 그 인연에 따라서 모양만 바뀌어 진 것뿐이지 순금 자체는 나고 죽는게 없다 이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의 본래 청정한 자성자리는 어떤 경계, 인연이 오면 그 인연에 따라서 그때 그때 상황이 조금 달라지고 마음 쓰는 모양새가 조금 달라지고 신경 쓰는 것이 달라졌다 뿐이지 마음이라는 본성 자체는 순금과 같아서 그것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부처님의 금강경 법을 한번도 안 들어본 중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나고 죽음이 있는 줄 아는 거에요. 경계가 오면 그 경계가 자기 모습인줄 알고, 그냥 허덕이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그 경계 지나가고 다른 경계가 오면 그것 놔 두고 이 경계 붙들고선 또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고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경계만 달라졌다 뿐이지 그걸 대하고 있는 본성은 조금도 나고 죽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것을 무생이라 그러는 거라. 무생. 이 금강경에서는 그런 무생의 이야기를 많이 한거에요.
그리고 또 금강경에서는 무슨 말을 많이 했느냐 하면 무상(없을 無무, 모양 相상)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이런 단어들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하면 아~ 금강경에서 말하는 지혜라는 것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게 되는 거에요.
무상이라는 말은 뭐를 말하느냐 하면 본래 마음은 허공과 같이, 청정한 허공과 같이 그런 동요도 없고 상이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허공에 구름이 끼면 뭐가 있습니까? 구름이 있으면 토끼 모양도 생기고, 사슴 모양도 생기고 그렇잖아요.
우리 본 바탕 마음자리는 모습이 없는 것인데 경계에 속으면 마음이 토끼 모습으로도 변하고, 사슴 모습으로도 변하고, 내가 있고 너가 있고 나누어지기도 하고,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고통도 있고 이런 것들이 구름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마음 모습이 달라진다 이 말이에요. 그렇죠? 경계에 속으면 그렇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 일어나면 그것이 자기인줄 알고, 괴로운 마음이 괴로워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뭐라고 했냐 하면 금강경에서는 모양 상자를 써서 그걸 상이라 그러는데 그 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헛된 것이다. 너가 지금 어리석어서 그 마음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에요.
그걸 무상이라 그런 거라. 무상. 그래서 금강경에는 무상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거에요.
또 무주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마음이 머뭄이 없다 그랬거든요.
마음이 머뭄이 없다 그러면 무주심은 뭘 무주심이라 그럽니까? 뭘 가지고 무주심이라 그래요?
마음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했듯이 항상 흐르는 강물과 같이 흘러가고 있는 거에요. 마음은. 조금도 머뭄이 없는 거에요. 항상 흘러가는 그 마음을 뭐라 그랬냐 하면 무주라 그랬거든요.
그 흘러가는 마음을 다른 말로 말하면 인연에 의해 생겨서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붙들래야 붙들 수도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걸 공이라 그런 거에요. 그걸 공심이라 공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무주를 왜 금강경에서 이야기를 했냐 하면 마음이 그리 흘러가는 속성인줄 잘 알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에게 나눔을 가지고, 보시를 하고, 선근을 짓고, 선행을 하고 그렇게 공덕을 많이 지으라는데 그 공덕을 어떻게 짓느냐 하면 마음이 흘러가는 거와 같이 무엇을 하더라도 조건을 붙이지 말고, 대가를 바라지 말고, 뭘 이유를 붙이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아주 깨끗하게,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보시공덕을 해 주라는 거에요.
왜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느냐?
이유를 붙이고, 조건을 붙이고, 거기에 뭔가를 기대하는 바램이 있으면 좋은 일 해놓고도 어떻게 됩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거에요. 왜 괴로움이 생기느냐?
상대가 내 원하는 틀에 맞춰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알겠어요? 금강경에서 배우는 무주상 보시라는 것도 마음이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정리를 하자면은 그래요.
금강경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중요한 뜻이 뭐냐 하면 마음을 억지로 일으켜서 그 마음이라는 놈한테 속지를 말라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또 억지로 마음을 안 일으키려고 그러면 그것도 괴로운 거에요.
이건 지혜가 열리면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에요. 금강경 공부를 잘 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금강경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금강경이라는 것이 구절구절 전부 다 수행하는 방법을 이야기 해 놓은 거라는 걸 알게돼요.
금강강경을 잘못 보면 금강경은 수행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금강경은 구절구절이 전부 다 수행하는 방법을 이야기 해 놓은 거에요.
그래서 이걸 잘 보면 선적이고 선의 요지가 여기에 다 있기 때문에 금강경을 선경이라고도 그러는 거에요.
이런 법문을 듣고 금강경을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쭉 읽어 보면 금강경 구절구절들이 전부 다 마음 닦는 한 수행방법을 이렇게 이야기 해 놨구나.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해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쭉 말씀 드린 것은 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 정견을 갖추게끔 하기위해서 이런 법문을 해 드렸거든요.
그러면 이런 법문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정견을 갖게 되면 마음 다스림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제가 가르켜 준 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걸 안다고 해서 마음을 잘 다스려 지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종교적인 체험을 해야 된다는 거에요. 종교적인 체험.
종교적인 체험이 뭡니까?
그 마음이 고요한 걸, 그 마음이 깨끗한 걸, 그 마음이 평화롭고 안락한 거를 여러분들이 체험을 해야 돼요.
그 체험의 내용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참으로 부처님 앞에 지극히 참회 할 줄 알아야 되고. 부처님을 지극히 찬탄하고, 부처님을 찬양할 줄 알아야 되고. 부처님에게 참 예경드릴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열심히 염불 하셔야 되고 여러분들이 주력도 열심히 하시고 경도 여러분둘이 열심히 독경하시고 화두도 열심히 든다든지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체험을 통해서 경험을 해야 된다는 거에요. 왜?
여러분들이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고요히 앉아봐야 내 마음이 고요한 줄을 알 거 아니겠어요?
여러분들이 지극히 참회해 봐야 내 마음이 본래 편안한 줄을 알게 되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염불을 지극히 해봐야 내가 본래 그런 복덕성을 갖추어져 있다는 것도 체험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할 일은 실제로 염불하고 참선하고 참회하고 남에게 봉사하면서 이런 것들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체험하는 일만 여러분 몫으로 남아있다 이 말입니다. 예. 성불합시다.
첫댓글 참회, 찬탄,예경. 상수불학 등등 ..결국 설우스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보.현.행.원 인가 봅니다..아마도 설우스님께선 저희에게로 오셔서 행으로 하는 염불을 가르치려고 하시건만 스님 당신께서 보현을 이해만 하시지 살아서 움직이는 화엄의 보현을 아직은 모르시는듯 합니다..감히 어른 스님의 공부를 범부가 입을 댈 입장도 아니고 해서도 안되지만 카페에서 배운것을 견주어 한번 생각해 보면 그런듯 합니다..모두 다 제 수준이지요..펄펄 살아 움직이는 화엄- 보현- 반야의 모습은 역시 행으로 그 베일을 벗는게 아닌가 합니다..긴 시간 법문에서 보현을 말씀 하시지만 마음이 열려 가는 느낌이 들지 않은것을 보며 답답한 맘이지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普賢行願 波羅蜜 實踐行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미안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