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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영화 에세이 (10) |
일상적 시간의 균열에 대한 깊은 응시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김 문 홍
여성의 삶에 대한 집요한 탐구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속의 여성의 삶은 잔인하다. 특히 결혼한 여성의 사고와 행동은 편견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머니가 되면 행동반경이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자아로서의 여성의 정체성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버린다. 동시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스러운 자신의 이름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저 누구누구의 엄마로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요즈음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집안의 경제권이 여성에게로 넘어가고 아이들 교육에 대한 책임이 전가되면서부터 얻은 보상이다. 그래도 뚜렷한 인간 존재로서의 자아의 정체성은 용인되기 어렵다. 사회적 행동반경 역시 가정이라는 굴레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자아 확립을 위한 불온한 생각이나 행동은 사회적 편견의 시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래도 지금은 몇 십 년 전에 비해서 여성의 삶과 인권은 많이 향상된 셈이다.
벨기에 출신으로 도발적인 내용과 형식적 파격의 영화미학으로 주목을 받은 샹탈 아커만(1950〜2015)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생했다. 열다섯 살 때 접한 장 뤽 고다르의〈미치광이 삐에로〉에 영향 받아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우리 동네 폭파하기〉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내용과 형식에 대한 영화적 혁신의 기미가 보였다.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든 뒤 1975년에 장편영화 데뷔작인 〈나, 너, 그, 그녀〉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이듬해인 1976년에 발표한 〈잔느 딜망〉을 통해 샹탈 아커만은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 영화는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파격적인 시도에 가깝다. 201분이라는 러닝타임, 길게 찍기의 쇼트 연결을 통한 연극적 화면 구성, 극적 서사의 생략과 대사의 절제, 여성의 일상에 대한 깊은 응시로서의 객관적 카메라 시점,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여성의 일상에 대한 집요한 탐색 등은 이 영화에 대한 관심과 주목에 불을 붙였다.
샹탈 아커만은 그녀의 어머니인 나탈리가 죽은 그 이듬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녀의 어머니는 샹탈 아커만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버팀목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곧 그녀 삶의 붕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영화계의 큰 손실이었다. 그녀는 스무 편 안쪽의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만들었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내용과 형식으로서의 혁신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페미니즘의 큰 자양분이 되었다.
샹탈 아커만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잔느 딜망〉은 원제는 〈잔느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브뤼셀 1080>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잔느 딜망이 사는 집 주소이다. 이 영화는 잔느 딜망의 3일간의 일상을 추적하고 있다. 첫 날은 잔느 딜망의 기계적인 일상의 모습을, 둘째 날은 관습화된 그녀의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날은 일상의 관습에서 탈피해 그녀의 자아를 맞닥뜨렸을 때 찾아오는 자기 혐오의 클라이막스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잔느 딜망의 잔인한 일상적 시간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그 잔인한 시간을 벗어나 자아를 발견했을 때의 허망함에 관한 무미건조한 기록이다.
첫째 날 : 일상의 지속적 순환
이 영화는 여자이자 어머니인 잔느 딜망(델핀 세리그 분)의 사흘간의 일상의 기록이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가 세 개의 큰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다. 총 러닝 타임이 201분인데 첫째 날은 45분, 둘째 날은 82분, 마지막 셋째 날은 72분으로 모두 199분이다. 나머지 2분가량은 오프닝 크레딧과 엔딩 크레딧에 소요되는 시간이다.
첫째 날은 잔느 딜망의 아침부터 밤까지 일상적 지속적 순환을 보여준다. 오프닝 시퀀스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일상적 사건의 한 부분이 소개된다. 잔느가 기계적인 동작으로 남자의 모자와 머플러, 그리고 코트를 받아든다. 침실로 통하는 긴 복도가 암전되지만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다. 복도에 불이 켜지고 잔느 딜망과 남자가 걸어 나온다. 남자는 그녀가 공손하게 건네주는 코트와 머플러, 그리고 모자를 받아든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그 속에서 두어 장의 지폐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다음 목요일에 또 보지.”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관객은 그때서야 잔느 딜망이 자신의 집에서 매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카메라는 그녀의 일상적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녀가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20초가량의 롱 테이크 화면으로 보여 진다. 그녀의 손놀림은 거의 기계적이다. 그릇을 씻고, 다시 물로 헹구어 보관하는 손놀림이 빈틈이 없다. 다시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는 모습이 극사실주의적 연기로 보여 진다. 관객, 그중에서도 가사를 일상화 하고 있는 주부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상의 한 부분을 왜 이토록 길게, 그것도 극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하고 한번 쯤 의심해 볼만도 하다.
그것은 감독의 의도임이 분명하다. 일상의 지속적 순환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잔느 딜망은 설거지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연,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는 있을까? 관객은 그러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정말, 생각이라도 하긴 할까? 우리는 잔느 딜망의 뒷모습에서 자아로서의 주체성이 사라진 건조하고 지루한 가사노동의 끔찍하고 지루한 관습적 행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가사노동은 주부로서의 여성만이 담당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힘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잔느 딜망의 기계적이고 빈틈없는 일상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고, 여성으로서의 개성과 인권이 배제되고 자아의 정체성이 사라진 오랫동안의 누적된 시간이 쌓아올린 반복된 행동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첫째 날은 잔느의 그러한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그리고 빈틈없고 반복적인 행위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정이 배제된 잔느의 무감각한 표정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러한 일상에는 주체적 자아로서의 여성은 온데간데없고, 억누르고 멸시하고 편견에 가득 찬 남성 중심의 권력만이 있을 뿐이다. 표정만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가사노동으로서의 즐거움 또한 발견할 수 없다. 잔느의 그러한 일상적 행동에서는 인간의 온기나 즐거움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저 가사노동에 길들여진 감정이 없는 로봇의 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감각한 관습적 행위의 되풀이만 있을 뿐이다.
가사노동에서 보여 지는 잔느의 행동은 한 치의 빈틈도 없다. 자고 일어나면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일, 아들의 침대를 정리하고 잠옷을 각 지어 정돈하는 일, 아들의 구두를 반짝반짝 윤나게 닦는 일, 아들에게 용돈을 주고 볼에 키스하며 배웅하는 일...이 모든 것은 결국 그녀의 몸을 지치게 하고, 정신과 영혼을 멍들게 한다. 즐거움이 사라진 일상의 반복은 끔찍하다. 첫째 날의 시퀀스는 이렇게 잔느의 일상적 순환의 지속을, 즐거움이 없는 노동의 기계적 반복을 보여주며 하루를 마감한다.
둘째 날과 셋째 날 : 일상의 균열, 그리고 폭발
둘째 날은 빈틈없이 기계적인 잔느 딜망의 일상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던 그녀의 일상적 행동에 틈이 생기며 엇박자를 연출한다. 그 첫 조짐은 매춘의 대가로 고객에게서 받은 돈의 처리에서 나타난다. 항아리에 돈을 넣고서 뚜껑 닫는 일을 놓치는 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가 창문 닫는 일을 깜빡 하는 일, 부엌에서 거실로, 그리고 침실로 드나들 떼에도 그녀의 행동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들어갈 때에는 불을 켜고 나올 때는 불을 끄는 일이 기계적인 일상적 행위였다. 그런데 나올 때 불을 끄는 일을 깜빡 하고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또는 그릇을 씻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릇을 씻고 물로 행구고 보관하는데, 그릇을 씻은 뒤 그만 행구는 과정을 깜빡 생략하기도 한다.
그것은 곧 잔느 딜망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음에 대한 설명이고, 셋째 날에 있을 감정의 폭발에 대한 하나의 복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둘째 날에는 그녀의 외출에 대한 장면들이 많아 보여 진다. 가게에 들려 식료품을 구입하는 일, 이웃집 젊은 여자가 외출할 때 잠시 아기를 맡아 주는 일, 구두 수선 가게를 들르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카페에 들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 등이 보여 진다. 카페에 들려 차를 마실 때의 그녀의 모습은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을 찾은 듯 표정에 감동이 감돌고,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시선이 여성 특유의 관습적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감정의 균열이 나타난다.
아들의 구두를 닦을 때의 모습이 그 단적인 예이다. 구두약을 바르고 솔질하고, 다시 헝겊으로 문지르는 그녀의 행동에 빈틈이 생기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일련의 과정을 행동하다가 솔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무런 감정이 내비쳐 보이지 않던 표정에 그녀의 불편한 속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계적 일상적 행동에 대한 짜증과 불만, 남편도 아닌 아들에게까지 자질구레한 노동을 행사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 표출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일상적 행동을 비집고 나오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고 각성일지도 모른다.
셋째 날에는 일상의 균열 뒤에 몰아치는 감정의 폭발이라는 반전을 보여준다. 그것은 남자와의 성관계 중에 찾아온다. 남자가 그녀를 덮쳐누르자 그녀는 잠시 성적 쾌락에 빠지다가 일순 찾아드는 모멸감에 몸서리친다. 그것은 어쩌면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일종의 각성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런 행위를 지속하면서까지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자기 모멸감일 수도 있다. 그녀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가위로 누워 있는 남자의 목을 찌르는 돌발적인 행위를 감행한다.
셋째 날의 엔딩 시퀀스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어두컴컴한 식탁에 멍하니 앉아 있는 살인 뒤의 잔느 딜망의 모습을 한동안 보여준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나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살인 뒤의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비로소 일상의 노예화에서 탈피하고 자아로서의 주체성을 찾은 여성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뒤 벽에 어른거리는 바깥의 불빛과 소음은, 그러한 그녀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위협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이 나온 지가 벌써 40년을 넘었다, 그런데도 오늘의 여성들의 주체적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집안의 경제권을 차지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들을 보는 남성중심의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행동이나 사고에 있어서 아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성들의 도발적인 사고나 도전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가 아직까지도 유효하고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들의 자아의 주체적 정체성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도 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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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첫댓글 셋째 날 드디어 감정이 폭발하네요.
영화 평이 세세하여 보고 있는 듯합니다.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 줘
가사노동의 지루함을 나타냈다고 하니
샹탈 아커만 감독에 대한 애정이 솟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예술 영화도 좋지만 스토리가 탄탄하고 극적인 사건이 있는 영화도 종종 소개해주세요!
이런 영화는 어디에서 봅니까?
너무 궁금합니다^^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서 할 겁니다
영화 상영하는 곳을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영화는 이번 8월 21일부터 9월 9일까지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샹탈 아커만 특별전>에서 봤습니다.
모두 16편의 영화가 소개되었는데 저는 13편을 봤습니다.
아! 오늘이 10일이군요.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