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丙子年 浦落
병자년 포락은 1936년 7월 말부터 9월에 걸쳐 강원도를 강타한 물난리를 가리킨다.
2002년 루사가 찾아오기 전까지 강원도 최고의 물난리로 기억되었다.
춘천, 인제, 회양, 금강, 화천, 김화, 창도, 철원, 평강, 이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통천, 고성, 간성, 속초, 양양, 동해, 삼척,
울진 등 수해가 당시 강원도 전역을 휩쓸었다.
일제강점기의 수해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을축년 대홍수고 강원도 역시 을축년 수해를 겪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병자년 포락을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강원도에서는 80년만의 대참사라고 말했지만 병자년 포락에서는 더욱 심한 피해를 입었다.
2. 경과
7월 24일 강원도 서북부, 현재의 춘천을 비롯해서 휴전선 이북과 이남에 이르는 강원도 지역에 처음 폭우가 쏟아졌다.
최대 강우량은 442mm였다고 한다.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원주를 비롯해 강원도 서남부에 폭우가 쏟아졌다.
원주에 가장 많은 비가 쏟아졌는데 인명피해는 물론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정도로 매우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8월 26일부터 29일까지는 강릉, 양양, 간성, 고성, 통천, 삼척을 비롯해 강원도 동해안을 폭우가 강타했다고 한다.
강릉은 준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릉제방이 터지고 강릉남대천의 강릉교가 무너질 정도로 읍내가 물에 휩쓸렸고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양양 역시 제방이 터져 양양남대천이 범람해 양양읍내가 싹 쓸려 천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한밤중의 일이었다.
고성 역시 남강이 범람해 읍내가 쓸려 백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삼척 역시 삼척오십천이 범람하며 읍내가 쓸렸다고 한다.
9월 26일 통천에서 울진에 이르기까지 강원도 동해안 전역에 다시 한 번 폭우가 휩쓸었다고 한다.
강릉은 다시 강릉남대천이 범람했고 옥계면의 옥계천도 범람했다고 한다.
울진도 수백채의 집이 물에 잠겼고 삼척도 삼척오십천이 다시 범람하면서 수십채의 집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인명피해도 인명피해지만 이처럼 물이 범람해 싹 쓸어버리는 통에 한해 농사를 망친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3. 여담
1936년에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3만원의 성금을 조선총독부를 통해 보냈다고
논밭이 강물에 무너져 떨어져 나가는 것, 즉 홍수로 인한 수해를 말한다.
포락지(수몰된 땅)라는 말을 얼핏 들어봤을 것이다.당시에는 울진군도 강원도 소속이었으며 1963년에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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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병자년
1920년생인 아버지가 17살이고
1927년생인 어머니가 10살인 해에
대단한 홍수가 이 땅에 일어 난가 보다.
아버지 생전에 병자년 홍수에 대해서 몇 번 들어 보았다.
아버지도 그 때는 17세 소년 이었으니
그 당시 1889년생인 할아버지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아버지에게 들려 준것 같다.
계속 비가 퍼 부우니 할아버지는 등넘어 들에 가셨다가 어두워서
돌아 오는 데 어두움이 대단 한가 보았다.
농촌에 고향을 둔 친구들은 잘알겠지만
웬만큼 어두워서는 깜깜해도 잘 다닐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고
얼마나 어두웠던지
번개한번치면 번개 불빛에 몇 발자욱 전진하고
또 번개한번치면 몇발자욱 전진하고
또 번개번쩍이면 번개 불빛에 몇 발자욱 전진하구
그렇게 집에 돌아 왔다구 아버지에게 말한 것을
나는 아버지로 부터 몇번 들었다.
그해 고향의 우깨들녁은 냇가 둑이 두 군데나 터져서 모래가
들판으로 깔려
그흔적이 1980년대 경지 정리 하기까지 들판 군데군데
모래무더기를 이루고 있었었다.
이번에 고향에 가서 어머니로 부터 또 병자년
홍수에 대해 들었다.
그당시 어머니는 10살 정도로 애이었다.
어느날 일어나니 동네 3면이
산사태가 나서 마을만 남기고 있었다고 했다.
외가집은 우리고향의 가장 높은 해발 460미터 백운산 중턱에 자리한
골짜기 마을 이었다.
일제시대로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고
논이라야
요즈음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는 크기가 20-100 평쯤 되는
계단식 논들 이었으니 산사태로
완전히 그 본채를 잃었을것이다.
그것 복구하느라고 여러날 동안 남정네들은 말할수 없는
고생이 있었던 것 같다.
장비라야 고작 삽이나 가래가 좋은 것 이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