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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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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근심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셨다. 출애굽하기 위해 10가지 재앙을 보이시고 홍해를 가르시며 그곳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모두 죽이셨다. 또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며 하늘에서 고기가 떨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옷이 헤지지 않게 하셨다. 또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시내산에서 직접 강림하셔서 율법을 주시고 모세를 통해 가르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이 미혹되어 40년 동안이나 여호와의 길을 보았어도 그분의 길(법도)을 깨닫지 못했다. 광야에서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은 가나안이 아니라 여호와의 길을 통해 안식의 나라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깨닫고 걷는데 실패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로 인해 근심하셨다(시95:10,11). '근심하여'는 히브리어로 '쿠트'인데 본래 의미는 '베어내다, 혐오하다, 슬퍼하다, 몹시 싫어하다' 등의 뜻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40년 동안이나 성실하게 토라를 가르쳤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미혹된 백성을, 베어내야 했고 혐오하고 몹시 싫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치 할례를 할 때 부정한 부분을 베어내어야 하듯이, 여호와의 길을 알지 못하는 완악한 백성은 할례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노하여'는 히브리어 '아프'로 뜻은 '백성의 죄악을 오래 참으시고 고통스러운 호흡을 할 정도로 분노하셨다'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삶속에서 여호와의 법도를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 여호와를 고통스럽고 슬프게 할 것이고 우리의 결국도 이들과 같을 것이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95:10,11)
2. 40년 동안 여호와의 길을 보았다
회중은 40년 동안이나 여호와의 일하심을 보았다. 즉 여호와의 길을 보았다. 그들의 여정이 원래는 이렇게 길지 않았는데 40년이 된 이유는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의 보고를 듣고 여호와의 선하심과 약속을 의심하고 대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그들의 여정은 험난해졌고 40년으로 길어졌다. 그러면 왜 40일을 정탐하게 하시고 거역한 1일을 1년으로 쳐서 40년이 되었을까? 40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잠시 살펴보면, 40일 동안 홍수 심판이 있었고 모세가 40세에 광야로 도망가서 40년동안 광야에서 훈련받고 다시 부르심을 받았고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돌판을 받았고 다시 돌판을 받기 위해 40일간 금식했으며 엘리야는 40일동안 호렙산까지 걸어갔고 니누웨 성도 40일 후 무너질 거라는 경고를 받았다. 예슈아께서 40일간 금식하셨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시다가 승천하셨다. 그외에 40과 관련된 많은 말씀들이 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40의 의미는 심판의 기간, 훈련의 기간, 시험받는 기간, 인내의 기간, 은혜의 기간등의 온전한 여호와의 시간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40년의 기간을 한세대(20-60세 또는 30-70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거룩함을 위해 완전한 하나님의 시간동안 한평생(한세대) 훈련을 받은 것이다(히3:9). 우리는 생애를 통해 얼마나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그 길을 걷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3:9,10)
3 여호와의 길은 무엇인가?
광야에서 회중은 40년 동안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보았지만, 그들은 마음이 미혹되어 그분의 길을 깨닫지 못했다. 먼저 '길'의 히브리어는 '데레크'로 '삶의 여정, 행동양식, 대화, 태도, 습관' 등의 뜻이다. 즉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치관이며 문화이다. 또한, 헬라어로는 '호도스'로 '길, 행위, 수단' 등의 뜻이다. 따라서 '길'은 행동 양식으로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방법,수단, 행위등을 말한다. 즉 삶속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는 방법, 거룩함에 이르는 방법, 거룩한 나라를 세우는 방법, 그분의 백성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율법(토라)으로서 여호와의 행동양식을 말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동시에 죄가 아닌 선도 가르친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직접 주시고 40년 동안 행하시고 가르치신 율법을 회중은 듣고 보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다. 그들은 마음이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미혹되다'의 헬라어 어원은 '플라나오'로 '진리에서 부터 벗어나 방황하다, 헤메다, 길을 벗어나다'등의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타아'로 어원은 '길을 잃다, 방황하다' 등의 뜻이다. 즉 이들의 마음이 이미 여호와의 행동양식인 율법(토라)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길을 깨닫고 걸어가기위해 필요한 것은 미혹되지 않은 곧고 정직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 때를 살면서 토라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저주받은 세대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4 예슈아의 길은 협착하다
예슈아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고난을 통과하는 좁은 문이며 협착한 길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큰 문이 아니며 넓은 길도 아니다. 그래서 좁고 협착한 예슈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들이 거의 없다. ('적음이라'는 헬라어 '올리고스'로 '거의 없는, 아주 작은 수'를 의미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살아 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하며 순종하신 것이 예슈아의 삶의 여정(길)이었다. 그것이 예슈아가 구원의 창시자이신 이유이다(히2:10). 그분도 거룩함을 위한 고난으로 온전해주셨다. 그러면 우린 어떠하겠는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예슈아가 걸으신 길과 같다. 그 길을 예슈아처럼 걸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 생명으로 인도하는 협착한 길이고 좁은 구원의 문이다(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2:10)
5 광야에서 샤밧과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이유는, 준행하면 삶을 얻을 당신의 율례와 규례를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여호와시라는 것을 보이시려고 안식일(샤밧)을 주셔서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법도는 우리로 살게하는 것이며 샤밧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미혹된 자들은 여호와의 율례를 준행하지 않았고 주의 규례를 멸시했으며 심지어 안식일(샤밧)을 크게 더럽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크게 분노하시고 이들을 멸하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지옥에 보내 멸하실 수 있는 여호와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마10:18).
여호와께서 '사람이 준행하면 삶을 얻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준행'의 히브리어는 '아싸'이고 뜻은 '행하다, 만들다' 이다. '삶'은 히브리어로 '하야'이고 뜻은 '살다, 다시 살리다, 생명을 건지다' 등이다. 즉 사람이 말씀을 행하면 또는 이 땅 가운데 말씀을 세우면 그는 살고, 다시 살 것이며 자신의 생명을 건지게 될 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어 '아싸'는 여호와께서 궁창을 만드실(아싸) 때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셨다.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여호와의 창조(아싸)라면, 우리가 그 말씀을 준행하는 것도 이 땅에 말씀을 창조(아싸)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의 말씀을 이 땅 가운데서 행함으로 이룰때, 그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하고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처럼 순종이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한다면 예슈아께서 왜 오셨을까? 그건 예슈아께서 우리의 죄성을 죽이고 죄의 종이 아니라 예슈아처럼 진정으로 준행하는 순종의 종이 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살게 되는 것이고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이 땅에 아싸(창조)하면 그분께서 우리안에 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 내가 그분안에 그분이 내 안에 사는 것도 결국 아싸(창조)를 통해서 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아싸하면 생명을 얻을 율례와 규례를 주셨지만 이들은 준행하지 않고 멸시하고 더럽혔다. 여기서 '준행하다'는 앞에서 '준행하다'와 다른 단어이다. 한글 번역으로는 동일하지만 히브리어로는 '아싸'와 '할라크'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다. '할라크'의 뜻은 '걷다, 행동하다, 연습하다' 등이다. 즉 말씀을 이 땅에 창조(아싸)하면 생명을 얻을텐데 그들은 그대로 걷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걷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고 연습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걷기 위해서는 길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길을 행하지(할라크)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와 샤밧을 알지 못했고 그대로 행하지도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여호와의 길은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와 샤밧과 같은 모든 명령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겔20:10-13)
6 안식에 대해 이미 맹세하셨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안식에 어떤 자들이 들어가고 어떤 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지 이미 광야에서 오래 참음 가운데 그리고 고통가운데 노하여 맹세하셨다(히3:11). 이 구원의 교리를 우린 결코 다시 쓸 수 없다. 여호와께서 구약 전체를 통해 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슈아께서 오셔서 '이제부터는 순종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간다'라고 선언하셨을까? 아니면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양심까지 씻어 순종의 백성이 되어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을까? 이것이 복음이 아니겠는가? 순종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이 복음인가? 우린 결코 '불법의 사람(멸망의 아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히3:11)
7 죄를 짓는 자는 아버지와 분리된다
우리가 만약 준행하면 생명을 얻을 그분의 명령을 신뢰하지(믿지) 않아서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린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과 분리될 것이다. 말씀을 준행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듯이, 말씀을 준행하지 않으면 우린 그분에게서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린 죄에게 유혹되지 않도록 서로 권면해야 한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은 불순종에 대한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히3:12,13).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3:12,13)
8 처음부터 들은 계명에 거하라
창조주이신 여호와와 떨어지지 않고 죄에 유혹으로 마음이 단단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시작할 때부터 확신한 것을 끝까지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히3:14). 여기서 '시작'은 헬라어 '아르케'로 뜻은 '질서, 시간, 장소, 계급 등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태초'와 같은 단어이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증언했다(요1:1). 즉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바로 우리가 확신가운데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진리인 것이다. 또한 예슈아께서 주신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태초) 우리가 가진 계명과 동일하다. 새로운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태초부터 받은 그 계명을 따라 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새 계명같이 여겨지는 것은 예슈아가 오시기 이전에는 하나님(말씀)을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하나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말씀을 먹이시는 것과 같이 예언되었던 메시아가 오셔서 토라를 가르치시고 실제로 토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드리심으로 말씀을 이루셨을 때 더이상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태초부터 시작된 계명은 세말까지 변함이 없다. 이는 여호와께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변할 수도 없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3:14)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2서1:5,6)
9 순종하지 않으면 안식에 못 들어간다
광야에서 40년 동안(한세대, 한평생) 여호와께서 노하시고 슬퍼한 대상은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죄를 짓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않아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고 믿지 않아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히3:15-19). 앞서 말한 것처럼 구원의 교리는 태초부터 세말까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린 구원의 교리, 심판의 교리를 다시 써서는 안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순종해야 하고 믿어야 한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여호와의 안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믿음과 순종은 같은 의미이다. 믿는 자는 순종하는 자이고 순종하는 자는 믿는 자이다. 물론 특정 행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믿는 자가 아니며 순종하는 자가 아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책망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할례(율법의 행위중 하나)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한 할례파를 보면 알 수 있다. 할례파를 책망한 것은 특정 행위만 있고 순종도 믿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순종은 믿음이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여기서 '순종하지 아니하다'는 헬라어 '아페이데오'로 뜻은 '불신하다, 불순종하다' 이다. 즉 불신과 불순종은 한 단어가 동시에 가지고 있는 뜻이다. 즉 같은 의미라고 것이다. 불신하는 것이 불순종이고, 믿는 것이 순종이다.
오늘날 샤밧을 지키는 성도가 많지 않다. '샤밧'(안식일)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를 알게하는 표징이며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샤밧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여호와의 표로서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이렇게 여호와의 표로서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없다. 여호와의 날들 중에서 그 어떤 날도 이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없다. 그러나 광야에서 회중은 여호와의 샤밧을 크게 더럽혔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게 되었다. 샤밧은 안식의 나라의 그림자이다. 이 땅에서 장차 올 세상 즉 하늘의 나라의 그림자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이 기회이고 선물이다.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선물같은 기회가 바로 오늘 present 인 것이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3:15-19)
10 샤밧은 여호와를 알게 한다
여호와께서 광야에 있는 회중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조상들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지 말고 우상 숭배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여기서 규례는 '미쉬파트'로 '거룩한 율법, 판단의 법도'를 의미한다. 즉 그들의 판단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약 조상의 율례와 규례를 따른다면 그것이 우상 숭배이며 더럽혀지게 되는 것이다(겔20:18,19). 그에 반해 영원한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가 있다. 즉 조상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가까이 가는 방법이 여호와의 말씀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린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자유한 것 같지만 사실을 불순종의 법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악과에서 우리를 태초부터 미혹했던 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딤전4:1).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을 벗어난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의 법도를 따를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4:1)
또한,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왜 꼭 안식일을 지켜야 할까?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우리 맘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주인이라면 더욱 소중히 여기고 지키겠지만 불법에 미혹된 수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샤밧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것이(겔20:20). 그렇다면 샤밧을 구별하여 지키지 않는 자들은 여호와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로서 마음이 완악하여 여호와의 샤밧을 더럽히고 스스로를 더럽히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구별할 때 그분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찾아와주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거룩한 여호와께 교훈을 받고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샤밧을 알고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엄청난 특권임이다. 아무나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공유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겔20:18-20)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제작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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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할렐루야~~~~!
신명기 28장
[12]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너희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라. 당신은 많은 나라에 빌려주고 빌리지 않을 것입니다.
[13] 여호와께서 너를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듣고 준수하고 순종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