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설치가 / 석미화
힘들겠지만 가장 아팠던 상처를 편안하게 흥얼거려 보시겠어요 그녀는 수십 개 선을 내 몸에 설치해 놓고 늑골에 묻힌 소리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여음 여치나 찌르레기처럼 나에게도 숲이 생긴 것을 알았다 반대로 말해볼게요 행복한 시간에도 남아있는 아픔을 한번 끌어내 보세요 신은 우리가 힘들면 노래하도록 만들어 놓았을 거예요 숲에서 이슬이 만들어지는 시간 같은 거예요 신이 신나게 거짓말을 하는 듯 바닥과 천장이 단단하게 허공을 짓는 듯 그녀와 내가 앉은 자리에 사이프러스 잎 소리가 들렸다 추운 곳에서 견뎌낸 나무들은 악기의 음색이 어둡고 깊지요 내 몸에 부착된 선들이 가지를 뻗으며 마른 잎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숲을 걷어낼 거예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세요 먼 곳에서 그녀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소리 매듭은 프라이부르크로 돌아가서 천천히 풀 거예요 화음들이 고요히 내려와 물들다가 다시 사라지겠지요 테이블 위 기계에서 나의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검은 그래프는 빛 웅덩이 속인 듯 잦아들고 있었다
―《문학수첩》 2024 상반기호 ---------------------
* 석미화 시인 1969년 경북 성주 출생.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등단.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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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팠던 상처를 ‘편안하게’ 흥얼거리는 일이 가능한가? 소리설치가의 역설적 요구는 이러저러한 내적 치유, 심리 상담, 정신 분석 등에 대한 신뢰감에 균열을 가져온다. 아마도 화자는 소리의 음색으로 마음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에 참석 중인 걸로 보인다. “가장 아팠던 상처”를 달리 표현한다면 “행복한 시간에도 남아있는 아픔”이어서, 화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즉 “늑골에 묻힌 소리”로 비유되는 트라우마나 상흔일 터이다. 그러므로 “여치나 찌르레기처럼” 가느다란 음색으로 우는 화자와 이 “여음”을 분석하는 “소리설치가” 사이에 생긴 “숲”은, 어둡고 축축한 기억들로 구성된 화자 내면의 추상적 혼돈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가시적 한 양태다.
독일에서 온 소리설치가는 화자의 늑골에 묻힌 소리를 ‘노래’로 해석한다. “신은 우리가 힘들면 노래하도록 만들어 놓았을 거”라는 게 소리설치가의 논리다. 그는 또 말한다. 힘겨운 시간은 “숲에서 이슬이 만들어지는 시간 같은” 것. “추운 곳에서 견뎌낸 나무들”일수록 악기의 음색이 어둡고 깊”듯이, 화자의 아픈 과거는 어둡고 깊은 음색을 만들어내는 공명통으로 기능한다는 소리설치가의 말은, 나름 화자를 위로하기 위한 최선의 논리이기도 하리라. 화자는 소리설치가의 위로를 “신이 신나게 거짓말을 하는 듯” 받아들인다.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상투적 위로는 ‘단단한 허공’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거나 모순투성이다. 단단한 허공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 때로 침묵만이 최선의 위로다. 소리설치가는 프라이부르크로 돌아가 천천히 소리의 매듭을 풀겠다고 한다. 소리가 화음이 되어 고요히 잦아들 듯, 그렇게 마음의 매듭도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신상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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