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파껍질의 원리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현장에서 성인노예들의 체력유지를 위해 양파를 먹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양파는 성인의 만성피로 및 각종 성인병에 효능이 좋다고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이 양파를 ‘산총’이라고 하면서 오장의 기에 모두 이롭다고 씌여있기도 하다.
양파의 효능을 보면 혈액속의 불필요한 콜레스테롤을 녹여 동맥경화와 고지혈증을 예방하고 치료해 준다.
혈액을 묽게 하는 작용으로 혈액의 점도를 낮춰 끈적거리지 않고 흐르기 쉬우며
맑고 깨끗한 혈액으로 만들어 혈액순환이 좋아 산소와 영양의 신체공급이 잘 이루어지게 한다.
혈당을 저하시키는 작용도 뛰어나 당뇨병을 예방하고 인슐린의 분비를 촉진시켜 당뇨를 치료한다.
간장의 해독기능을 강화하기 때문에 임신중독, 약물중독, 알레르기에도 좋다.
체내의 중금속을 해독, 분해시켜 체외로 배출시킨다.
이러한 양파는 어느 부분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일까? 그 중심부분은 무엇일까?
세밀하게 속을 들여다보자. 한 껍질을 벗기면 속이 보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깊은 곳에 있지 않을까?
껍질을 자꾸 벗겨보면 어떨까? 양파를 처음 대하는 아이들에게는 이 질문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껍질을 다 벗기고 나면 어느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다 잃어버리고 만다.
한 껍질 한 껍질 벗기는 그것이 양약이 되고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양파껍질과 같다.
어린 때는 젊은 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젊은 때는 늙은 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는 그 때로서의 가치와 보람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이 어린 때를 잃어버리고 산다.
양파 속을 찾아보려고 껍질을 다 버리고 있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젊음의 때를 누리지 못하고 장년 때의 용어인
성공과 성취를 위해 젊음을 다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다.
한 어린아이가 얼음과자를 먹다가 친구들이 오고 있었다.
얼른 얼음과자를 뒤로 숨겨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지나간 다음에 손을 보니 얼음은 다 녹아 없어져버리고 막대기만 남았을 뿐이다.
인간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에 귀한 것을 놓쳐버리고 있다. 만나는 시간과 만나는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인간은 재미있다고 한곳에 빠져 헤매는 동안에 가장 귀한 것을 잡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
재미있다고 한곳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다 녹아 없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이란 살아가는 과정에 사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위의 세계를 의식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일이다.
위인전기를 읽어보라. 그 사람들은 다 이러한 기준을 설정하고 살아갔다.
인생이란 삶이라는 과정에 양심을 지켜야 한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블랙박스이다.
많은 경우를 보면 악인들도 사형 틀 앞에서는 양심의 소리를 내뱉는다.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다. 1311년 프랑스 필립왕은 프랑스 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포고령을 내렸다.
2일 안에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사형이다.
유대인들은 2일 안에 자기 집이나 가구나 논밭을 팔수가 없었다.
프랑스 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사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급히 떠나기에 바빴다.
만일 귀금속이나 돈이 있어도 가지고 가다 들키면 빼앗기는 것은 물론 사형이었다.
맨 몸으로 도망치듯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그 때 파리에 보석상을 하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파리를 떠나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는 이기에 좋은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그에게 내 모든 보석을 맡기자.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 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에게 돌려 줄 것이다. 그는 양심적이고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는 자기 보석가게에 있는 보석들을 모두 그 기독교인에게 맡겼다.
그는 말했다. <다시 돌아오면 반드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세월이 흘렀다. 필립 왕이 세상을 떠났다.
유대인들에게 대한 박해도 완화되었다.
그 때 떠났던 유대인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보석상인도 돌아오는 대열에 끼어 있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었다. 그는 제일 먼저 보물을 맡겼던 이를 찾았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이미 다 늙은이가 되어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수소문하여 보았다.
그 노인은 최근 전 재산을 다 날렸다.
사업이 안 되어 집도 팔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다. 절망이었다.
자기가 맡긴 보물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추적하여 보았다. 드디어 그 집을 찾았다.
가서 보고는 더 절망스러웠다.
가난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굶주림과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몰골이 해골이었다. 다 죽어 가고 있었다.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하여져서 죽음 직전이었다. 살아 있는 송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상자 위에 앉아 있었다.
유대인이 들어서자 그는 알아보고 놀라고 반가워하면서 말했다.
여기 당신의 보물이 있소.
소중히 간직하여 왔지요 예상하지 못하였던 일에 유대인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내 보물을 보관하였습니까?
당신 재산은 다 잃어버리면서 내 보물을 어떻게 이 상자에 그대로 가지고 계십니까?
기독교인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것이 아닌 데 어떻게 손을 댈 수 있겠소?
여러 번 삶에 절망하여 회의를 느끼며 자살하고 싶었었지요.
죽고 싶어도 당신에게 이 보물을 돌려 드려야 하기에 죽지 못하였소.
내가 이 보물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느라고 죽지 않았소. 자! 받으시오
그는 깔고 앉아 있던 보물 상자를 내밀었다. 유대인은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할아버지! 이제 과거를 잊으십시오. 이제 축복만 남았습니다.
이 보물의 반은 할아버지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내 식구입니다.
이 보물을 같이 쓰면서 같이 살 식구입니다.
아팠던 과거를 잊으십시오.
지금부터 나와 행복한 미래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식구로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인생이란 삶의 과정에 윤리와 도덕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필수적인 도리이다. 이것은 어떤 특수한 사람의 임무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사명이다.
윤리와 도덕은 인간이 살아가는 길의 중앙선이다.
중앙분리대를 뛰어넘는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선을 지키는 생각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인생에도 윤리와 도덕의 선을 넘는 일을 행하여 인생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대개 교통사고도 차의 고장보다 운전자의 실수와 음주운전으로 슬픈 결과를 낳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길을 지나가면서 담배를 피우며 다른 사람의 피해를 의식하지 않는 것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의한 행동이다.
윤리도덕은 사회를 밝게 하고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노력의 절벽 받침대이다.
인생은 평소에 상식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그야말로 상식이 크게 부족하다.
온갖 몰상식과 무지가 생활전반을 덮고 있다.
항상 낮은 수준이지만 가장 흔하게 보는 상식선은 그 나라의 도덕수준과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제발 상식을 가지고 살라. 상식선을 넘지 말라. 그만큼만 되어도 숨을 좀 쉴 것 같다.
믿음은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한번뿐인 인생을 후회에서 멀어지게 한다.
믿음 안에 꿈과 희망과 미래가 잠재해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사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生命)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살라는 명령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늘에서 준 생명이라는 뜻이다.
하늘에서 준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열심히 사는 길뿐이다.
자꾸만 인생의 일을 뒤로 미루어 ‘이 어려운 시간이 지나면…….’ 하고
허송세월하면 양파껍질 같이 귀한 시간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시간이 가장 귀하고 값있게 사용해야 할 인생의 재료이다.
양파의 양분은 껍질에 있듯이 인생의 본질도 평시에 있다.
2. 인생에는 살 몫이 있다.
인간에게는 다 살 몫이 있다.
그것을 목숨이라고 한다.
병원 응급실에 가보라. 이 말이 얼마나 절실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몇 년 동안 백혈병으로 고생하던 한 소녀가 세상을 떠났다.
병실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그 소녀가 기록한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다.
‘오늘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엄마,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햇살이 환했어요. 감사합니다.
간호사 언니가 활짝 웃었네요. 뭔가 좋은 일이 있나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놀랄만한 일이에요.’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은 살 몫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증거이다.
할 일이 없으면 벌써 하나님이 데려 갔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큰 일 날뻔 했다’라고 말할 때는 목숨과 연관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인이다.
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젊은데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느냐?
우리는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인생이 자기에게만 속한 줄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자기의 삶의 순간순간에 가까이 있는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자기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는 자기가 속한 단체의 사업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자기 인생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기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라고 몫을 남겨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자기의 곤경 속에 주님의 계획이 들어 있었음을 늦게 서야 깨달았다.
하나님은 바울을 쓰시기 위해서 당시에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로마법정에까지 가도록 준비하셨다.
이 일은 바울이 주님께로부터 계시 받은 그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어디에 가서도 주를 위해 살겠다는 그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다.
미국 뉴욕 9.11 비행기 테러 사건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추라는 홍콩 출신의 40대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15년간 거주하며 맨해튼 5번가에서 법률회사를 운영해 왔다.
그러던 중 지난 9.11 테러 당시 비행기 충돌로 무너져 내린 세계무역센터의 한 건물 20층에서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동행하기로 한 부인이 친구에게 때마침 전화를 받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졌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난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운 좋게 참사를 피한 추는 정신적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귀향했다.
이후 교육 사업에 뛰어든 추는 지난 해 3월 15일 사업차 베이징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행기에 사스환자가 탑승했다. 72세의 사스환자가 탑승한 이 비행기에서
추를 포함한 18명의 승객이 사스에 감염된 것이다.
그로부터 4일후 사스가 발병한 추는 한 달 후 지난 4월16일 홍콩의 한 병원에서 죽고 말았다.
인간이 죽음을 피하는 것이냐? 죽음이 인간을 피하는 것이냐?
인생의 일이 다 되었다고 하면 터지고, 이제는 어려움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이 세상사요, 인간사이다.
인간이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
때로 자살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얼마나 견디지 못해서 자살했겠느냐는 동정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고 더욱이 귀신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세상에 던져진 몫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손댈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는 것이다.
결코 자기 것이 아니다. 왜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느냐?
그것은 그러한 연관관계로 엮어진 인생을 살라고 주어진 살 몫이다.
자녀가 자기 삶이 어렵다고 부모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묻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인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식물인간이라도 함부로 생명을 끊을 수 없다고 야단이냐?
목숨은 인간이 끊을 수 없는 성스러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사건이 빈번히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것이 병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우울증은 병이기는 하지만 자기를 죽이려는 능력이 있는 것은
우울증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뜻이다.
우울증을 이기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산다는 것이 하나의 몫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자살은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자살은 그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항의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씻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살 의욕을 잃었다고 느껴지면 차라리 신체의 일부를 응급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에게 떼어주라.
그러면 새로운 생명이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나의 몫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연극이 펼쳐질지 모른다. 인생에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내용은 자기만 갖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부모와 형제와 친지와 주위 사람들이
공유할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그 자체가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그 관계란 살아있을 때의 일이다.
죽은 다음에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결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권한이 아니다.
인간이 출생할 때 엄마의 탯줄같이 영원히 보이지 않는 탯줄로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살 몫이다.
3. 인생에는 해야 할 몫이 있다.
우리가 살 몫이 있다는 것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사명이라고 말한다. 사명은 깨달을 때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것도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을 얼마만큼 해야 할까?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다.
할 수 있을 만큼 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과정이라는 것이다.
얼마라는 양도 모르고 어디까지라는 끝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과정에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과정 중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를 계산해 보라.
그러면 인생이 짧다고 느껴질 것이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성공하는 사람들과 실패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실패하는 사람들은 대게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T. V 보는 시간이 너무 길다.
전화하는 시간도 너무 길다. 한 시간 반 동안 전화하고 난 다음에 끊으면서 ‘얘, 안되겠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라고 한다.
또 컴퓨터 게임에 너무 매달린다. 쓸데없는 참견에 너무 시간을 보낸다.
해결점 없는 고민과 걱정에 사로잡힌다.
이런 사람들이 인생을 실패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반면 성공하는 사람들은 긴급한 일이 아니라 가치 있고
중요한 일들에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었다.
건강이나 사건이나 예방에 관심을 갖는다. 지도력을 개발한다.
주변의 사람들, 윗사람, 아랫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새로운 기회를 발굴한다. 자신의 인격과 신앙향상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만약 하루에 15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을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1년에 책 한권을 쓸 수 있다.
1년에 악기 하나를 배울 수 있다.
1년에 중급정도의 외국어 회화 실력을 가질 수 있다.
40년간 하루에 15분을 낸다면 100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대학을 5번 다녔을 것이다.
하물며 하루 1시간 중요한 일들을 위해 시간을 낸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시간이 돈이라고 하지만 시간은 생명이다.
시간은 피와 같은 것이다.
일 년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암 선고를 받고 일 년 후 죽을 여인에게 물어보라.
한 달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한 달 먼저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에게 물어보라.
일주일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주간지 편집자에게 물어보라.
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막노동 자에게 물어보라.
1분의 소중함을 알려면 1분 차이로 집에 가는 막차를 놓친 사람에게 물어보라.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1초 때문에 교통사고를 면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물어보라.
0.0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0.01초 차이로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단거리 육상선수에게 물어보라.
이러한 특별한 제안에 한번 쯤 귀를 기울여 봄이 좋지 않을까?
J. 라 브뤼예르라의 지금 하십시오 라는 시가 있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지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지금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할 일에 대해서 자꾸 계산을 하려고 한다.
계산하며 하는 일은 결코 마음을 넉넉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의 일은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일 외에 선한 일을 하도록 몫이 남겨져 있다.
선한 일은 밭과 같아서 그 일을 하고나면 반드시 열매가 주어진다.
농부의 기쁨은 열매를 거둘 때이다.
그와 같이 선한 일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이 주어진다.
이것은 인생의 원리요 과정에서 주어지는 열매이다.
하나님은 해야 할 몫을 잘 하는 자에게 받을 몫을 챙겨주신다.
여기에는 순서와 차례가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은 먼저라는 순서를 의미한다.
잘 믿는다는 차이는 바로 이 첫 순서를 알고 바로 행하는데 있다.
그것이 물질이든, 정성이든, 마음이든 첫째 것을 누구를 위해 구별하느냐가
바로 그 중심에 품고 있던 것이 드러난다.
왜 좋은 자동차인데도 가만 놔두면 안 되는가?
기름칠을 하고 엔진을 가동해야만 녹슬지 않아 그 능력을 잘 유지시킬 수 있다.
왜 운동선수가 매일 연습해야 되는가?
모든 일에 생각과 관념에 머물러 있으면 그 다음의 차례는 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여호와이레’의 복을 자기 것으로 갖지 못하는 이유도
아브라함이 하였듯이 그 다음에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시간을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바쳐서 사용한다는 것은 가장 보람되고 기쁜 일이다.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물질뿐이 아니다.
시간, 지식, 마음, 노력, 협동 등 여러 가지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올바로 써진다면 그 가치는 매우 큰 것이다.
무덤덤한 생활, 감동이 없는 생활, 즐거움이 없는 생활을 계속하면
그러는 가운데 무엇이 나에게서 떠내려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명이란 몫이다. 자기만의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이 몫은 에덴동산의 생명과와 같다.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쁨과 복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거역하면 곧 선악과의 길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속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요,
이러한 세상 속에 살도록 하신 것은 이런 세상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울타리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평생에 선한 일을 하도록 몫이 주어졌다.
그것을 잘 알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서 사는 자는 그만큼 행복을 누리며 살고
그렇지 못한 자는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공기를 공짜로 주시느냐?
햇빛을 비추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하시느냐?
다른 사람도 똑같이 그렇게 혜택을 입고 있으니 나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병원 응급실에 가보라. 그러면 실상을 알게 될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면 비용이 엄청나다.
햇볕을 쬐지 못하고 병실에만 오래 있으면 얼굴이 누렇게 변질된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햇빛을 보도록 처방한다. 그것은 공짜이다.
지구 반대쪽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나에게 먹을 것이 주어지는 것은 할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만을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도 일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일하는 몫이다.
4. 인생에는 누릴 몫이 있다.
옛 사람들의 말이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주시는 기본적인 복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다.
그에게 재능과 능력과 환경과 여건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데 그 깊은 뜻이 있다.
사람들은 환경이 좋게 되는 것을 복을 받아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복 받기를 희구하며 종교라는 명목을 내세워 복 받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인간이 받을 복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고 사람이 행함으로 복이 되는 것이 있다.
인간은 복을 받으려고 애쓰는 일보다 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몫이 예비 되어있다.
나를 위해 준비된 ‘여호와이레’를 알아야 한다.
할일을 바로 했을 때 받는 하늘의 것이 있다.
그 산에 가야 그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받을 수 있은 것은 모리아 산에 가야만 받을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받지 못했다면 그 믿음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헌신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산에 오르지 않으면 그 광경을 볼 수 없다’
이것은 등산가의 철칙이다. 신앙의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그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적을 맛볼 수 없다.
자동차 한 대에 2만 여 개의 부품이 있다.
모두가 그 자리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 부품은 반드시 영향을 끼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한 부품으로 우리를 살려주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다.
그 약속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구약, 신약, 기독교 역사 속에서 모델로
사용하셔서 그 실 예를 보여주신 것이다.
인생을 사는 데에 유행에 따라 흘러가서는 안 된다.
우리 주위에는 지금 헷갈리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유혹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놀랄만한 자극들이 줄을 이어 나타나고 있다.
주위의 흐름에만 따라가서는 안 된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빨리 원리를 찾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다 해보고 난 뒤, 안 되면
그때 새롭게 해보아야지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인생의 가운데 토막은 다 잃어버린 뒤가 된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 몫을 바로 알고 최선을 다해 산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그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몫이라는 개념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때로 겉모양으로 사는 모습을 보고 행복했나 불행했나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 불행의 기준은 자기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일제탄압 시 중국으로 망명가서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자녀가 커가는 모습도 보지 못하는 애국자의 외부의 모습만 보고
그는 불행했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보고 자신의 희생에 대해서 행복했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행복관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할 일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마음에 누릴 행복감도 주셨다.
가슴에 감동을 느끼는 보람과 뿌듯한 응답도 체험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설교하신 산상보훈의 내용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복을 거론하셨다.
겉으로 오는 복의 종류는 변하거나 사라지지만 마음에 오는 복은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복이다.
그것이 마음에 기쁨이 되고 삶의 활력소가 된다.
흔히 사람들은 운이 따르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한다.
인위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인간능력 외의 힘이 간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에게 일이 되게 하고 환경을 열어주고
조건을 맞게 만들어 주시는 일을 하게도 하신다. 그것을 인간은 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복의 개념은 받으려고 하는 자세에서 주려고 하는 자세로 살면 모든 것이 복이 된다.
그래서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복에 대한 개념이다.
그래서 감사의 생활이 이어진다. 감사하는 마음은 복 받은 자의 마음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개념에 따라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모든 사람을 좋게 해주라고 하나님 자리의 권한을 맡겨준다면
하루도 그 자리에서 불평을 막지 못하고 내려올 것이다.
요즘 기후변동으로 곳곳에서 재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들은 하늘이 왜 이렇게 인간을 못살게 하느냐고 원망한다.
사실은 편하게 살려고 자연의 원리를 거슬러 일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공장과
기름을 사용하는 차를 마구 생산해 냄으로 자연환경을 헤치고 있다.
그 결과로 일어나는 기후변동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하늘을 향해 원망한다.
깊이 분석하면 천재가 아니라 인재인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지금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복을 주시고 있다.
복은 로또 복권 같은 것이 아니다.
복은 저절로 되어지는 행운아의 몫이 아니다.
복 받을 사람으로 사는 자를 하나님은 유심히 살피시고 복 받을 환경을 열어주신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복 받을 대상자로 선정되었음을 깨닫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의 일은 복 받을 일을 행하며 사는 일이다.
그런 후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복과 연관된 일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받을 몫을 깨닫는 진리이다.
5. 인간이 요리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인간은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을 잘하고 산다.
역사라는 긴 안목에서 볼 때 과거사는 역사의 주인공이다.
거기에 현재라는 시간은 끊임없이 과거라는 페이지로 자꾸 덧붙여 넘어간다.
그런데 인간이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는 항상 내 앞에서 그렇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더 불어나고 나의 미래는 줄어진다.
사실 미래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계산할 수 없다.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이 요리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마치 흘러가는 냇물에 발을 담그는 그 물은 현재의 그것뿐이다.
그 물은 어디론가 과거로 묻혀버리고 미래라는 새 물은 내 앞에서 도도히 흘러간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현재의 그 물을 최대한으로 시원하게 잘 이용하면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다.
그러면 현재라는 이 시간을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먼저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기본을 의식해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훌륭해도 변동될 수 없으며 현재는 아무리 열악해도 변동될 수 있으며
미래는 아무리 인정안해 주어도 성공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속담에는 이런 경우를 일컬어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다’고 하고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었다’고도 표현한다.
현재라는 시간은 요리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은 책임의식을 필요로 한다.
내 앞에 흐르는 시간은 내가 요리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생에 대해서 진지한 자세를 갖지 않은 사람은 책임의식이 없다.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은 시간을 요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을 자기의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시간은 영영 갖지 못할 잃어버리는 시간임을 늦게야 깨닫게 된다.
시간을 잘 사용하려는 자는 성공이라는 목적지를 설정해 놓고 열심히 달려간다. 그
런데 무조건 달려간다고 성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성공 자는 버리는 훈련을 잘해야 한다.
성공하기 위한 훈련은 곧 버리는 훈련이다.
사람들은 소유에 집착하여 버리지를 못한다.
어느 시인이 쓰기를 ‘열 살에는 캔디에, 스무 살에는 연인에, 서른 살에는 쾌락에,
마흔 살에는 야심에, 쉰 살에는 탐욕에 넘어가지 않을 자 누가 있으리오.’라고 했다.
그러나 인생은 본질적으로 소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본질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
어떤 부면에 성공한 사람도 한 부분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성공은 버리는 그것을 계단으로 해서 한단계식 올라간다.
성공하려면 미련을 버리는 훈련을 잘해야 한다.
인간은 미련을 버리려면 속에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어,
버릴 것과 다시 쓸 것과 남에게 줄 것을 분류하여 처리하는 일이다.
인간은 근본에 있어 소유하는 것(To have)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To be)이라고 했다.
자기가 소유했다고 좋아하지만 사실은 존재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부자도 그 소유가 얼마나 후대로 지속되느냐를 보라.
흘러가는 냇물처럼 어느 지점에 가서는 큰 지류에 합류하고 만다.
미련을 버리라. 그래야만 새로운 페이지가 빨리 시작된다.
머릿속에서부터 빨리 정리하라. 의도적으로 도전하라.
정신세계는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훈련이 안 된다.
왜 인간이 수양하고 수련하고 자숙하고 명상하느냐?
그것은 정신적인 세계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다.
이러한 정신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성공은 얻었다고 말하기 무섭게
곧 허무와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성공한 그때부터는 유지하기 위해 붙드는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자기 성격을 고치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보다 잘 사는 사람을 시기 질투하지 말라.
자기가 사는 모습은 그 사람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타고난 성격을 어찌 고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성격형성은 타고난 기질에 습관이 덧붙여져 고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성격을 고치려고 노력하면 그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
그 방향을 정할 때 특별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
특별한 삶은 선한 삶이다. 조그마한 노력의 반복은 눈이 쌓이듯
어느새 다른 상처 난 부분을 다 덮어버리고 만다.
성공하려면 실패한 생각을 빨리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운동선수는 이 훈련이 성공의 필수조건이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이지 끝이 아니다.
지나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에게 오는 기회는 자기가 하기에 따라 변해지는 경우도 있고,
자기가 아무리 해도 변경시킬 수 없는 것도 있다.
인간의 죽음을 자기가 변경시킬 수 있느냐?
만약 부모가 자기의 주인이라면 죽음도 부모가 변경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못한다. 의사가 죽음을 변경시키느냐?
그러면 못 고칠 질병이 없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생명의 주인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 주인을 조물주라고 하기도 하고, 창조주라고 하기도 하고,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다 같은 분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하지 못한다.
세상에 경험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모른다고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지구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냇물이 흐르듯 진리는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서 누락될 뿐이지!
사람들은 대개 성공한 결과만을 강조하나 실패 속에서 든든히 선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의
실패의 경력을 보라. 1831년 사업의 실패, 1832년 주의원 선거에 낙선, 1834년 다시 사업 실패,
1841년 신경쇠약증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 1843년 국회의원 공천에 실패,
1855년 상원 의원 선거에 낙선, 1858년 상원 의원 선거에 다시 낙선.
이만한 실패의 경력 소지자는 대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는 든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화위복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의 생각은 실패란 헤엄을 칠 때에 마시는 물과 같다고 했다.
자꾸 반복하면 바뀌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에 반드시 할 일을 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믿고 있었다.
1860년에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200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인생에 있어서 내가 죽지 않는 한 실패가 끝이 아니다.
끝이라고 낙심하는 그 사람의 기회가 끝이 되어 갈 뿐이다.
성공 자는 자기 주위에만 비교해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넓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냐?
자기 주위에만 비교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방식이다.
자기의 울타리가 얼마나 넓다고 그것만을 생각하느냐?
열등의식과 비교의식에 헤매지 말라.
그것은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유혹의 손짓이다.
인생은 과정이므로 되어가고 있고, 나아가고 있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라.
그것이 인생의 시간을 요리하는 것이다.
6. 마음을 비우라. 그러면 큰 것이 더 채워진다.
성공하려면 마음을 비우는 훈련을 잘해야 한다.
육신 안에는 잠복돼 있는 수많은 죄성, 악성, 독성, 부패성, 그리고 상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다.
이런 것들을 떨쳐버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성경에 거장이라고 말하는 바울은 이 훈련을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죽도록 노력을 다하면 사는 영광을 맛본다.
마음을 비우는 훈련은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정놀이를 하고 산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보라.
대부분이 감정싸움이다. 감정놀음에 인생을 맡기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분수가 있다. 분수가 무엇이냐?
자기의 신분과 정도에 맞게 살고 행동하는 것이다.
분수의 분은 몫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고 자기의 형편과 처지가 있다.
자기의 실력과 정도가 있다.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은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어느 소년이 모차르트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모차르트는 이 소년을 보고 ‘아직 이른 것 같으니 교향곡보다는 민요부터 작곡해 보게’라고 말했다.
‘선생님도 10대에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았습니까?’
소년이 항의조로 묻자 모차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교향곡 작곡법을 묻지 않았다네!’
오늘날 참 위험한 풍조는 T. V의 영향이다.
드라마나 연예인을 자기와 동일시하며 빠른 속도로 유행을 타는 것이다.
T. V가 인생의 스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참고서로 족하다.
마음을 비우는 훈련은 환경을 이용해서 사는 훈련이다.
우리에게는 지하수처럼 안에서 솟아나는 육의 속성과 환경을 통해서 스며들어오는 육의 속성이 있다.
환경은 자기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인생의 나침반이다.
환경 속에 자기 인생의 방향이 들어 있다.
어려운 환경이 닥쳐오면 다시 한 번 가던 길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알아야 한다.
장자는 도를 완성한 사람의 삶을 이런 이야기로 설명했다.
‘칼을 잘 쓰지 못하는 푸줏간 주인은 고기를 조금만 썰어도 칼을 숫돌에 갈아야 합니다.
날카로운 칼날도 쉽게 상하여 자주 갈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푸줏간 주인은 19년 동안 한 번도 칼을 갈지 않고
고기를 썰었지만 칼날이 무뎌지지 않고 날카로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였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하도 신기하여 그에게 물어보았답니다.
어떻게 19년 동안 칼을 한 번도 갈지 않았는데 그렇게 계속 날카롭게 쓸 수 있느냐고요.
그는 간단하지만 감동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그냥 썰지만, 자기는 고기 사이에 있는 틈새를 따라서 칼질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댓글 예전에 알지못했던 양파의 심오한 원리가 숨어 있었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