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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 실패할 여유>
아이들을 동네 슈퍼에 데리고 간다. 풀어놓고 '너 사고 싶은 거 다 사라'고 하면 아이는 정말 눈에 띄는 걸 다 집는다. 먹어본 과자, 안 먹어본 사탕, 포장만 예쁜 젤리, 내용물보다 장난감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초콜릿, 전부터 사 보고 싶었지만 차마 집지 못했던 비싼 쿠키... 끝까지 먹는 것도 있겠고 한 입 먹어보고 다시는 안 살 것들도 있겠으나, 어쨌든 제가 궁금했던 것들은 다 사고 다 뜯어 보고 먹어 본다.
하지만 슈퍼 앞에서 아이에게 '너 사고 싶은 것 딱 하나만 사준다'고 하면, 일단 고르는 시간이 한 세 배쯤 늘어난다. 들여다보고, 집었다 놓고, 흔들어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다 대부분의 경우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고른다. 많이 먹어봤고, 맛을 잘 알고, 그래서 절대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선택. 대신 지난번에 못 산 과자는 이번에도 못 산다.
최근 한 10여년 간, 늘 '딱 하나만'을 강요당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살았다. 해 보고 싶은 것도 써 보고 싶은 것도 가 보고 싶은 곳도 많았는데, 항상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거나 둘 다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교재비며 교통비에 쓰고 나면 딱 가장 저렴한 학식이나 편의점 김밥을 사 먹을 정도만 남았다. 졸업 후 구한 계약직 일자리 월급 130만원도 별다르지 않았다. 집에 생활비 조금 주고, 학자금 대출 갚고, 이런저런 요금 내고 눈꼽만한 적금 넣고 나면 딱 한 달에 친구들 한두 번 볼 정도의 돈만 남았다(심지어 점심은 도시락을 싸 다녔다). 굶어죽지는 않았지만 딱 굶어죽지만 않을 만큼이었다.
그러니 내 모든 소비의 최대 목표는 '실패하지 않기'가 됐다. 약속이 생기면 늘 저렴하고 양 많은, '2인분같은 1인분' 맛집을 검색했다. 편의점에서는 참치마요 삼각김밥과 전주비빔 삼각김밥을 들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옷을 살 때면 눈에 띄는 색이나 디자인의 상품을 찾기보다 지금 가진 옷과 최대한 비슷한, 돌려입기 용이한 옷을 찾았다.
물론 만족스럽진 않았다. 저렴하고 양 많은 맛집은 대개 왜 저렴하고 왜 양이 많은지를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맛이었고, 편의점 음식은 때마다의 허기를 때우기 좋았을 뿐 딱히 돌아선 뒤 생각나는 음식은 아니었으며, 싸고 평범한 옷은 편안하고 막 입기 좋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런 옷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쓰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을 사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돈 한푼 잃어버리면 사흘 밤낮 가슴이 두근대는 마당에,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내 소비 패턴은 늘 비슷했다. 화장품, 옷, 생필품, 외식...주기적으로, 늘 가던 곳에서, 똑같거나 비슷한 상품을 샀다. 그게 안전했으니까. 영화를 봐도 제일 재미있(다고들 하)는 걸 골라 그것만 봤고, 뭔가 하나 사려면 인터넷 페이지를 수십 개씩 뒤지고 모든 쿠폰을 총동원했다. 알뜰한 걸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지르고 나서, 나중에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었다는 걸 알면 그만큼의 돈을 잃어버린 것처럼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힘들었다. 진지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큰 일이 터진 건 아니었지만, 만약 내 인생의 남은 몫이 이렇게 동전 몇 푼을 세며 벌벌 떠는 무미건조함 뿐이라면 굳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TV는 월세 단칸방에서 시작해 행복하게 사는 중년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내보냈고, '젊을 땐 그렇게 아끼는 것도 재미다', '나중에는 다 추억이야'같은 말을 못이 배기게 들었으니까. 그래서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지만 발랄한 척 했고, 더 적은 돈으로 남들 하는 것 다 흉내(만) 내는 걸 자랑으로 알았다. 그러면 어른들은 건전하고 성실하다며 날 칭찬했다. 그걸 다시 일종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 사이 내 취향은 질식당했고 시야는 납작해졌다.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직장을 몇 번 옮기고, 월급이 좀 올라 아주 조금 숨통이 트이면서부터였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여유 자금'이라는 게 생기고, 취향에 맞는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뭔가를 사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기껏해야 오래 쓸 수 있는 것과 내 마음에 더 드는 것 사이에서 후자를 고를 수 있는 정도의, 화장품을 고를 때 '한 번 써 보고 안 맞으면 맞는 친구 찾아서 주지 뭐' 정도의 생각을 하며 안 써 본 것들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얻었을 뿐인데. 소비의 선택지에 '실패'라는 항목이 추가되면서, 비로소 내 일상에는 하나둘씩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세상이 내 시야만큼 납작해져 있었다. '가성비'라는 말은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물건의 앞에 접두어처럼 따라붙었고 편의점 음식을 '고급 요리'처럼 만들어내는 TV 프로그램이 나와 있었다. 두메산골 첩첩산중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은 '이미 아는 맛'이 나오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식당을 찾았고, 찾으면 또 어디에나 그게 있었다. 서점에서는 수상작이나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만 팔려나갔고 관광지도 명소도 사람이 몰리는 곳만 몰렸다. 유명한 것과 이미 검증된 것만 소비하는 건 지독한 냄새처럼 빈틈없이 퍼져 있었다. 실패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품은 외면당헸고, 그 외면은 다시 우리의 선택지를 좁히고 주머니를 얇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악순환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회의 취향이 질식당하는 걸 바라보는 건 내 일상이 메마르는 것보다 더 서글펐다. 그게 사람을 서서히 죽인다는 걸 아니까. 천천히, 고통스럽게, 무기력하게 만들다 어느 순간 사람을 잡아먹고 만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말하는 거지만, 지금 필요한 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아니라 소비에 실패할 수 있는 여유다. 하나만 고르라고 다그치는 사람보다 천천히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걸 더 골라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고 취향을 사치의 영역으로 넘겨버리기보다, 가격과 성능과 취향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굶어죽지 않는 것만을 목표로 살 수는 없다. 우리가 간신히 먹고살 수만 있는 돈을 받아 온 50년 동안, 그 나머지 돈을 가진 몇몇이 이 나라를 얼마나 '취향껏' 바꿔놨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한참 여유가 없을 때, 어쩌다 몇 천원 정도의 가욋돈이 생기면 나는 늘 2천원짜리 매니큐어를 샀다. 매니큐어는 활용도나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오롯이 내 취향만을 기준삼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펄이 잔뜩 박힌 흰색이든 상관없었다. 늘 이제껏 안 사본 색, 그날 유독 눈에 끌리는 색을 사곤 했는데, 그건 당시 무채색에 가까웠던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어떤 색깔이었다. 내가 그 때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작은 색깔들 때문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선택과 취향이란 그런 거다. '가성비', '저렴이'에 대한 강박이 사회를 완전히 질식시키기 전에, 사람들에게 여유를 조금 더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런 이유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228154027272675&id=100002342688042
제가 참 좋아하는 글입니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생각이나 다시 찾아보곤 합니다.
사회의 취향이 질식당하는 걸 바라보는 건
내 일상이 메마르는 것보다 더 서글펐다.
그게 사람을 서서히 죽인다는걸 아니까.
천천히, 고통스럽게, 무기력하게 만들다
어느 순간 사람을 잡아먹고 만다는 걸 아니까.
가난의 실체는 사실, 벌레 나오는 좁고 오래된 집이나 낡은 옷, 반지하 월세방 같은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잠을 깨우는 카드값 독촉 전화 문자로부터 시작해서 이가 아플 때 치과에 못 가는 것, 뭐 하나 하려 해도 몇 천원을 따지고 계산하게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한테 못 해주는 죄책감, 지인에게 이번 한 번만 ‘구걸’해야 하는 비루함과, 자존감의 상실 그리고 두려움이다.
혹은 옳지 않고 쓸데 없는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바보 같음, 그리고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자유가 없을 때, 선택권이 없을 때 우린 정말 가난하다고 느낀다.
과연 얼마만큼 벌어야 그 비루함을 끝낼 수 있을까? 가난의 실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없어서’ 생기는 현상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낮은 자존감과,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과 부자유 그 자체다.
이가 아플 때 치과에 갈 수 있는 돈은 따질 수 있을지언정 두려움에 지불해야 하는 값은 온전히 사람 자신에 달렸다. 심리적 노예 상태라면 돈의 많고 적음은 가난과 풍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돈을 버는 대신 스스로의 도덕을 포기해야 하는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다.
중소기업 다니는 젊은 친구도 월세 내면 생활비가 빠듯하다. 빚을 끼고 산 아파트와 자동차를 갖고 있는, 그러나 아이 보육비에 수백만원이 들어가는 중산층 친구도, 월급 줄 돈을 걱정하고 있는 '사장님'도 모두 '가난'하다고 여긴다.
지금 가난하지 않은 자 누군가? 누구나 돈이 모자란다.
지금 시대 돈이 없는 건 죄가 아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잠 안자고 일해도 겨우겨우 빚도 메꿀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을 할 것이고 아무리 높은 스펙을 쌓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도 적절한 직장에 취직할 수 없는 신기한 경험도 할 것이고 많이 버는 것은 같은데 그저 인간 노릇 좀 하고 꼭 필요한 생활비만 쓰는데 귀신처럼 돈이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할 것이다.
턱없이 높은 집 대출금과 월세를 내기 어려운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린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쉽게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죄인이 되곤 한다. 하지만 돈이 없는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다. 돈이 없고 빚이 많은데, 나만 그러면 내 문제다. 근데 내 주변도 다들 그렇다면 이건 사회의 문제다. 그럼 전전긍긍하거나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 싸워야 할 문제다.
<선한 분노> 6.벌거벗은 임금님 - 돈이 없는 건 죄가 아니다.
포기를 긍정하는 삶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포기하지 말자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포기하지마, 1%의 가능성만 있다면>, <꿈꾸는 자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마! 넌 최고가 될 거야>, <포기하는자 머슴으로 살고 도전하는자 주인으로 산다>, <포기하지마라 포기하지마라 절대로 포기하지마라>.
포기하지 말라고 권하는 책 제목들이다. 어디 책뿐인가. 영화와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는 물론 언론도 포기하지 말라며 사실상 포기를 비판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중문화와 언론의 주요 양식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성공의 주인공들이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모두 다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그건 바로 '생존 편향'이다. 생존 편향은 생존에 실패한 사람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시성 결여로 인해 비교적 가시성이 두드러지는 생존자들의 사례에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편향을 말한다. 실패 사례는 기록이 없거나 빈약한 반면, 성공 사례는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본의 아니게 성공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언론이 '성공 미담' 위주의 기사를 양산해내는 데엔 기사의 흥미성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실패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 탓도 있다. 실패를 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자신이 나서서 "왜 나는 실패를 했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기사들도 나오긴 하지만, 그건 예외적인 것일 뿐 성공보다 훨씬 많은 실패 사례들은 언론의 취재와 보도에서 사장되기 마련이다.
물론 포기를 비판한다고 해서 모두 다 같은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포기를 비판하는 메시지엔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는 방어적 메시지와 꿈과 야망을 위해 싸우라는 공세적 메시지라는 두 종류가 있다. 예컨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방어적 메시지이지만, 야망의 실현을 위해 포기하지 말하고 말하는 건 공세적 메시지다. 꿈과 야망의 실현을 위해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포기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포기해선 안 될 것이 있는가 하면 포기가 바람직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선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로 "포기는 무조건 어리석거나 나쁘다"는 식의 포기 부정론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하면 된다"는 슬로건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 왔으며, 고성장이 그런 슬로건의 타당성을 꽤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성장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시절에 형성된 포기 부정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고성장 시대의 종언은 우리에게 꿈의 높이를 낮추거나 욕망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삶의 지혜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런 포기 긍정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 긍정론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공론장에선 포기 긍정론이 잘 유통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포기를 긍정하면 '루저'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런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이 포기 긍정론을 역설하면 욕먹기에 십상이어서 감히 입을 열기 어렵기 때문이다.
포기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그건 어차피 시장 논리에 따라 결정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는 전형적인 타인지향적 사회에선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성공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함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전투적 삶으로 스스로 자신을 못살게 굴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지속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모든 걸 획일적 잣대로 서열화하는 비극을 지속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체제하에서 포기란 가능하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서열사회가 지속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젠 포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포기를 긍정하는 삶이 뿌리를 내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언론부터 포기 부정론 일변도의 기사 생산 방식을 의심해보는 게 좋겠다.
http://www.huffingtonpost.kr/joonmann-kang/story_b_19004198.html?utm_hp_ref=korea
지금 그렇게 쓴다고 큰일나지않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것도 솔직히 거의 불가능한 얘기라 생각함
다만 조심해야되는것은..
"한 번 높아진 눈은 다시 낮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데는 직장 동료들의 조언도 한몫했다.
그녀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식의 고집과 풍습을 공유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가방은 비싼 걸 메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화장품은 좋은 걸 써야 한다,
항상 입는 코트는 유명 브랜드로 걸쳐야 한다,
여자는 머릿결이 생명이다, 피부가 명함이다 등.
'무엇 무엇만은'의 목록은 점점 늘어갔다.
모든 게 중요하고 많은 게 필수였다."
김애란 작가 소설집 <비행운>의 <큐티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