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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새 옷
골로새서 3:12-17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이 송년주일이다. 올해도 내일 모레면 끝이다. 이 맘 때면 누군가 내게 손잡아주고,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용케 여기까지 왔다고 말해준다면 좋겠다.
누가 나를 위로해 줄까? 먼저 옆에 앉은 분과 손을 잡아보자. 또한 얼굴을 마주보라. 살면서 고민과 근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주름살도 늘고, 낯빛도 어두워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깨도 만져보라. 축 처진 어깨를 추켜세워 주라. ‘소망의 인내’를 계속 간직하도록 서로 힘을 나누자.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성령께서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시기를 바란다.
일 년 365일 산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모두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보라. 심장이 뛰고 있다.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오스카 라퐁텐)라는 유명한 말도 있다.
심장은 약 1분에 70회 뛴다고 한다. 이 박동으로 몸속에 있는 4-6리터의 피가 약 10만 킬로미터의 혈관을 타고 온 몸을 순환한다. 그래야 60조나 되는 세포마다 빠짐없이 산소와 영양물질이 공급되어 지금 살아있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없다. 나는 그 심장 박동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산다. 만약 의식하려고 들면 오히려 마비 증세를 느낄 것이다.
내가 1년을 살았다는 것은 내 심장이 단 30초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함께 달려와 주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 심장뿐인가? 숨은 또 어떤가? 누구나 숨을 2분 이상 참기 어렵다. 5분 이상 숨을 쉬지 않으면 뇌세포가 손상하기 시작하고, 10분 이상 숨을 쉬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
그러니 나를 격려하고, 위로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음식을 맛있게 먹고, 걸어 다닌 다는 것은 내 안에 생명이 살아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
본문인 골로새서 3장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 사람에 대해 말한다. 전반부(3-9)에는 벗어 버려야 할 악덕에 대해 말하고, 후반부(12-17)에서는 새로 입어야할 덕목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강하게 권면한다. 옛것은 벗어라, 이전의 삶을 돌아보지 마라, 그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골 3:9-10).
흥미롭게도 바울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옷을 벗는 것과 입는 것으로 비유한다.
맨 처음 인간은 옷을 입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는 옷을 벗은 상태라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나면서, 죄가 그들에게 틈입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수치를 감추려고 하룻밤이면 말라버릴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성경의 첫 번째 물음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는 바로 이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새 옷을 입혀주셨다. 가죽옷이다. 짐승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가죽옷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게 될 삶을 예시하는 것이다. 우리도 벗을 옷이 있고, 갈아입어야 할 새 옷이 있다.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은 날마다 허물의 옷을 벗는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자기를 벗어 버리는 솔직함에서 출발한다. 내 몸에 지긋지긋하게 붙어 있는 아담의 수치인 무화과나무 잎을 벗어 버리고, 든든한 가죽옷을 입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바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12).
특별히 한 해를 정리하면,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옷을 묵상하기 바란다. 긍휼의 옷, 자비의 옷, 겸손의 옷, 온유의 옷, 오래 참음의 옷 그리고 평화의 옷 등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
2)
어른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어도 시원스럽게 ‘내가 잘못했다’라는 말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놓기가 쉽지 않다. 낡은 아담의 무화과 잎을 덕지덕지 걸치고도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게 어리석어서, 어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새로운 삶은 내 자존심, 체면, 교만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내 평생 몸에 지긋지긋하게 붙어 있는 묵은 인습, 낡은 버릇, 쉰내 나는 옛 옷을 홀가분히 벗어 버릴 때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 예수님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직결된다.
사람에게 세 가지 욕망이 있다. 오래 살고, 부자 되고, 원수 갚는 일이다. 그런데 원수를 갚지 않고 용서하다니? 용서는 인간의 세 가지 욕망 중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권면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13).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스스로 옷을 찢기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내 삶의 새 출발을 위해서, 내 인생의 구원을 위해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받아주셨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이 되시고, 또한 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데서 출발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 용납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15).
그리스도교에서 화해는 하나님과 화해와 인간 상호 간의 화해로 나뉜다. 둘은 직접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 결과 사람들 사이에 화해를 이룬다.
화해라는 단어는 본래 ‘교환, 뒤바뀜’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에는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시고,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마틴 루터는 이를 ‘기쁨의 교환’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평화의 관계를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바울은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세상 속에서 화해자로 살도록 권면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을 주셨다.
화해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 화해의 삶, 평화의 길을 선택하였는가? 그것은 새로운 옷을 입는 일이다.
덕분에 올해를 마무리하며 걷기도를 잘 다녀왔다. 경북 영천에서 시작해 경주를 가로질러 울산으로 갔다. 물론 저녁 무렵에는 버스로 도시 간 이동을 했다.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목사님 걷기도.. 어떻게 하는 걸까 문득 궁금합니다. 뛰기도는 가능할까? 저는 화초물주기도 합니다..”
아하! 이렇게 기도가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하구나. 바로 내 삶에 ‘항상 기도’라는 시스템을 장착하는 일이다. 바로 주님이 주신 새 옷을 입는 일이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7).
그렇다. 무엇을 하든 예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이다. 말이든, 행동이든 기도가 된다.
마지막 날에는 울산 태화강 바람이 많이 불었다. 조금 차가웠지만, 바람 덕분에 걸으면서 많은 것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올해가 겨우 3일 남았다. 미련하게 나무 무거운 것을,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어려운 숙제를 새해로 일일이 다 옮길 생각을 하지 말고, 세월과 함께 날려 보내라.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더 많은 생기의 바람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3)
오래 전에 조선족 여성 한 분을 알았다. 염향옥이란 분이다. 그에게 중국식 인사를 배웠다. ‘씽꼴라’이다. 중국어로 ‘씽꼴라!’는 ‘매울 신’(辛), ‘쓸 고’(苦), ‘마칠 료’(了). 여기에서 고생을 마친다는 의미로‘료’자를 사용한다. 혹은 깨닫는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쉽게 ‘수고 많았다’는 뜻이다.
염 집사님은 조선족으로 중국 하얼빈에서 20년 전 시집을 왔다. 재혼한 남편은 참 가난하였다. 당시 세탁소를 했는데 3천만 원의 빚이 있었다고 하였다. 교회를 다니던 남편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도 영광’이라고 말하였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들었다.
자기도 남편을 따라 교회를 다녔다. 늘 기도하기를 ‘부자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졸랐다. 기도를 하고 또 열심히 일하였다. 얼마나 억척스럽게 일했는지, 하루에 네 가지 알바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산 끝에 집을 마련하고, 세탁소 가게를 구하고, 봉담에서 발마사지센터를 운영한다. 그가 사장이다. 자기 손을 보여주는데 손마디에 혹처럼 굳은살이 박였다.
그는 소원대로 부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훈춘에 사는 자기 친척들 중 9명이나 한국으로 불러들여,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중국 훈춘 지역이 갑자기 개발 붐이 불어 졸지에 땅값이 뛰었다. 거기에서 농사짓던 친척들은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자신은 훨씬 가난해 보인다고 한다.
비로소 깨달았단다. 부자는 상대적이더라. 그때 든 생각이 그러니 부자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잘못된 것 아닌가 싶었다.
자신은 지금 만족한다. 이미 소원을 이루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부요함을 누리고 있다.
지금 훈춘의 친척들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그 자식들은 취직할 마음이 없다. 눈에 보이는 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과연 새로운 삶을 선택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감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입을 새 옷은 용서, 화평과 함께 감사이다. 감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내 가족, 부모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항상 감사하고, 찬양할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18).
내 몸을 생각해 보자. 우리 몸은 날마다 하루 2천 칼로리 이상을 섭취해야 산다. 이를 위해 온갖 자연과 생명체로부터 약 1.5 킬로를 공급받는다. 남의 생명에서 영양을 취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기여한 바에 비해 너무 고마운 일이 아닌가?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덕목을 간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용서하라, 화평하라, 감사하라!’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아직 옷차림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두르는 띠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새 옷의 완성이다.
그 새 옷의 완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다. 우리가 해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읽는 ‘가족 톨레레게’에서 그 이름을 제공한 분은 성 어거스틴이다. 그의 <참회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거스틴이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된 순간 들은 말씀이 ‘톨레레게 톨레레게’였다.
그 음성에 따라 어거스틴이 ‘집어 들고’(톨레) ‘읽은’(레게) 성경 구절은 로마서 13장에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새해는 주님이 주신 새 옷이다. 우리가 갈아입어야 할 영원한 옷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벌써 한 해가 저문다. 명심하라. 내일이 창창한 사람도 머지않아 곧 오늘이 되고, 오늘 자신만만한 삶도 조만간 어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사랑하라!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는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걸어갈 인생 걷기도 위에 언제나 동행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