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대인관계는 폭이 넓거나 원만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사람을 가려 사귀었던 것 같다. 교우관계는 대체로 명당을 찾아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인데, 정읍의 김개남과 손화중, 금구의 김덕명, 태인의 최경선 등을 들 수 있다.
Ⅰ김개남 金開南(1853∼1894)
도강 김씨로 자는 기선琪先, 본명은 기범箕範. 태인군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神人이 '남쪽 지방을 연다' 는 뜻으로 개남開南이라는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 주어 스스로 호를 개남이라 했다."고 한다. 선대先代는 큰 벼슬은 하지 못했으나 정유재란 때 의병에 가담한 공으로 음사蔭仕를 한 이후 토반土班으로서 가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처가의 이웃 마을에서 서당의 훈장을 했으며 결혼과 더불어 분가하여 선산이 있는 태인의 지금실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지금재를 넘어 20리 거리가 되는 금구 원평의 생활권에서 살았다. 남원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처가가 임실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농민혁명 당시 전주 영장營將으로 농민군과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한 김시풍은 김개남의 집안 아저씨(族叔)로서 성장기의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개남은 생각이 깊고 의지가 굳은 면이 있어 자못 사람들에게 군림했다. 혁명이 일어났던 초기에 그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난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강 김씨 중에 접주가 24명이나 되었다. 집안은 부농은 아니었다. 그는 정감록을 믿어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지리산의 청학동에 들어가 처남과 함께 산 적이 있었다. 1890년 6월 초에 최시형이 지금실의 그의 집에서 열흘쯤 묵어 갈 정도로 그는 신심信心이 깊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전봉준의 장녀가 김개남의 이웃인 정읍의 지금실로 시집가는 바람에 서로 가끔씩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전봉준의 딸이 이곳으로 시집오게 된 것도 김개남의 중매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들은 난세에 대한 걱정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이 그들을 묶어주는 고리가 되어 대사大事를 함께 도모하게 되었다.
Ⅱ 손화중 孫化仲(1861∼1895)
정읍의 토반土班인 밀양 손씨 양반가의 후예로, 중류 이상의 유족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긴 손홍록의 후손으로, 정읍의 옛 이름이 초산楚山이었기에 호를 초산이라 했다.
손화중은 과거에 염두를 두지는 않았고, 내우외환이 겹치고 있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당시의 사회 풍조대로 십승지지를 찾아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일찍이 한문을 수업하고 시국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처남 유용수를 따라 20대에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갔다가 때마침 이곳에서 만난 동학도에 공명하여 입도했다. 그 후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눈을 피해 부안과 정읍으로 옮겨 다니다가 무장에서 포교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장부의 기상을 지녔던 그는 돈독한 신앙심으로 최시형의 신망이 두터워 호남의 유수한 접주로 꼽혔다.
전봉준이 손화중과 만난 것은 1888년 경인데, 손화중의 집안 조카인 손여옥과 친한 관계로 교우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담道談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거병 직전까지만 해도 손화중은 아직 동학 교인이 일어날 때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전봉준이 손화중을 필요로 했던 것은 그의 막강한 세력 때문이었다. 훗날 2차 기포 당시 손화중은 전라우도 지방의 백정, 재인, 역부, 대장장이, 승려 등, 천한 사람들을 모아 별도의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사납기가 비길 데 없었기 때문에 관군은 이들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혁명의 절정기에 전봉준의 노선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한계였다.
Ⅲ 김덕명 金德明(1845∼1894년)
금구 용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중인 언양 김씨는 금구의 4대 토반 중 하나였다. 본명은 준상, 자는 덕명이며, 호는 용계이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특히 담론이 유창하였다. 1880년대 말이나 1890년대 초에 동학에 입도한 이래 동학의 중견 지도자가 되어 교도를 지도하였고, 1892년의 삼례집회와 1893년의 금구집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동학에 깊어 최시형이 포교차 그 지방에 내려올 때는 그의 집에 묵을 정도였다.
전봉준은 유년 시절에 풍수지리설에 심취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금구의 원평에서 1km떨어진 정읍 계봉리 황새마을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2km 떨어진 김제 종정마을에서 서당을 다녔다. 이곳은 모악산 금산사의 인근으로서 행정구역상으로서는 정읍이지만 원평이 생활권이었다. 이들은 이웃 간에 살았다는 공간적인 인연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안목이 같았고, 특히 전봉준의 어머니가 언양 김씨로서 김덕명과는 외척간이어서 두 사람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다. 전봉준은 2차 기포를 하면서 금구집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를 주목했음이 틀림없다.
Ⅳ최경선 崔慶善(1859∼1895년)
전주 최씨로, 전주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병석이며 경선은 그의 자字이다. 학문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최경선은 전봉준과는 동향(태인) 사람으로서, 농민혁명 5∼6년 전에 만나 사귀어 온 사이여서 사발통문에 함께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전봉준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이 각 지역을 순회할 때 최경선 만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