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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요동 요서 위치에 대한 소고
高句麗의 遼東 遼西 位置에 대한 小考
글쓴이 : 폴김 날짜 : 2020-06-09 (화) 21:13:58
논문을 내면서
저자의 본 논문은 2018년 10월 20일(금) 한국의 학회 등재지의 하나인 단군학회로부터 게재 불가의 판정을
받은 아픈 시련을 겪은 논문으로 약간의 수정(그림 6 첨가)을 거쳐 사비로 출판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한반도에 단군조선, 진한, 마한, 변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고구려, 백제, 신라, 갈석산, 패수, 압록수
등이 있었다고 믿고 있는 한국의 기존 역사학계의 통설이 완전히 뒤집히게 될 획기적인 역사적 진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와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제도권사학계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총체적 고정관념
그리고 식민반도사학이란 불치의 ‘식민암종양’ 때문에 본 논문 게재를 거절당하였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단군학회에서 이 논문을 발표하던 그날 한 인사는 학자로서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논문은 재탕하는 거예요”, “재탕하지 않으면 안돼요”라고 서슴없이 말하여
저자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래도 이 인사는 매우 양심적이라 생각한다.
저자에게 제도권의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불굴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연원을 따져보자면 한반도에 지리지명이 옮겨지게 된 최초의 원인은 조선 후기 청나라를 견문한 ‘실학자들’ 이었다. 당시 이들 실학자들은 역사를 논할 때 필수적인 1차사료나 문헌자료와는 전혀 근거없는 자신 개개인의 의견이나 헛소문에 입각하여 동이배달한민족 상고사에 기술된 모든 지리지명들을 한반도나 요녕성 요하쪽에 추정하는 중대한 잘못을 범하였다. 이들 실학자들의 망국된 역사인식으로 인하여 우리의 역사가 길게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약 4,350년 짧게는 고구려의 패망으로부터 1,352년 동안 일사분란하게 왜곡, 날조, 축소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900년간 아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를 비롯하여 자랑스런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진실을 누군가가 반드시 밝혀야한다는 사명감에서 제1집으로 이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본고에서 저자가 제시한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공평한 논문심사를 해주시기 바라며
왜곡으로 점철된 민족사를 정립하는데 함께 동참해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순차적으로 저자의
논문인 「高句麗의 鴨綠水 位置 硏究」, 「浿水의 位置 硏究」. 「碣石山의 位置 硏究」, 「奉天通志의 冀州와 1次史料와의 比較 考察」, 「高句麗의 遼東 位置 硏究」, 「孤竹國 位置 硏究」, 「高句麗의 建國年代 比定 硏究」, 「幽州와 營州 位置 硏究」, 「實學者 朴趾源의 熱河日記에 기록된 歷史內容의 問題點 考察」, 「實學者 丁若鏞의 歷史認識 批判」 등을 출판할 예정이다.
2019년 9월 30일
역사학자 김태영
高句麗의 遼東 遼西 位置에 대한 小考
金泰瑛(江原大)
< 목차 >
I. 머리말
II. 遼西는 河東지방
1. 河東은 山西省
2. 산서성에 있는 伯夷叔弟墓
3. 백이숙제묘가 있는 곳이 孤竹國
4. 고죽국은 高句麗의 영토
III. 고구려의 遼水
1. 遼水가 遼東과 遼西를 나눔
2. 遼水의 發源地 遼山은 山西省
3. 요서에 쌓은 12성
4. 요서는 山西省 남서부
IV. 遼西郡이 속하는 幽州와 鴨綠水에 대한 견해차
1. 요서군이 속하는 유주의 차이
2. 압록수(요수, 마자수)의 차이
V. 맺음말
[국문초록]
경도 110도를 따라 위치한 황하강을 기준하여 동쪽인 산서성을 하동(河東)이라 하고 서쪽인 섬서성 일대를
하서(河西: 서하)라고 불렀던 것처럼, 하동인 산서성에 있던 요수(遼水: 압록수)로 인하여 고구려의 요서와 요동이 나누어진 것을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따라서 고구려 시기(232BC-668AD)歐陽修等,新唐書 卷 199, 「高[句]麗」:“侍御史 賈言忠計事還 帝問軍中云何 對曰必克 昔先帝問罪所以不得志者 虜末有邅也 諺曰 軍無媒 中道廻 今男生兄弟鬩很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三國史記 卷 22 [高句麗本紀] 第10:“侍御史 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末有釁也 諺曰 軍無媒 中道廻 今男生兄弟鬩狠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에 기록되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사료들을 조사, 검토, 비교, 분석하였다.
이들 사료들은 수경주, 중국고대지명대사전, 한서 「지리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명대사전, 대청광여도, 각종 지도책, 그리고 25사의 「지리지」등을 포함한다.
이들 사료들에서 백이숙제의 나라였던 고죽국과 백이숙제의 묘가 하동이자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에 있으며, 고죽국이 고구려 영토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성이 있었던 지금의 영제시를 포함한 산서성 남서부, 하남성 서북부, 섬서성 동북부를 모두 아울러 요서라 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요서는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 하남성 서북부, 그리고 섬서성 동북부이며
요서 지역을 제외한 산서성 일대를 요동이라 하였음을 밝힌다.
주제어: 황하, 하동, 하서, 요수(압록수), 백이·숙제, 고죽국, 노룡, 영제시, 요서, 요동, 수양산, 유수
I. 머리말
이름은 있으나 그 실체가 없는 것이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위치이다. 한반도 압록강의 서쪽이 요서가 되기도 하고, 산동성과 그 남쪽 해안을 따라 요서가 되기도 하며, 거란족이 세운 요(遼: 916-1125)나라로 인하여 만들어진 요(遼) 臧勵龢等,『中國古今地名大辭典』(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 2단, p.1245, “[遼]: 朝代名, 姓耶律氏, 初名契丹, 後改爲遼, 後梁時 阿保機稱帝, 都臨潢, 在今熱河巴林東北一百四十里.”라는 지명 때문에
요나라 태종 회동원년(會同元年: 938)에 최초로 언급된 요하(遼河) 脫脫, 遼史卷4 「本紀」第4 太宗下,
“...會同元年... 戊戌幸遼河東.”의 동쪽이 요동이 되고 요하의 서쪽이 요서가 되는 등, 요서와 요동의 위치비정은 그 동안 역사학계의 가장 큰 쟁점의 하나가 되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설득력이 결여된 지리지명 비정으로 보인다. 사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왕조의 흥망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강산과 고대지명들이 많이 옮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나라 때 요동군의 요동과 명나라 때 요동의 위치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남의현, 「중국의 중조변계사를 통해 본 한중 국경문제」 - 중조변계사에 대한 비판과 14세기 이전 ‘鴨綠水[鴨淥江]’ 위치 재고, 인문과학연구 57, 강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8, p.32. 고 남의현은 그의 논문에서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옛부터 황하(黃河)를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여 하동(河東)과 하서(河西) 臧勵龢等,『中國古今地名大辭典』(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2단, p.514, “[河西]: 泛指黃河西之地. 如今陝西.甘肅.及蒙古之鄂爾多斯.阿拉善.額濟納皆是. [爾雅釋地]「河西曰雝州.」是也. 亦曰河右.”로 나눈 것처럼 전국시대(403-221BC) 역시 경도 110도로
나뉘는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을 경계로 하여, 산서성에 있는 요수(遼水: 압록수)라는 하천 때문에
요동과 요서로 지역이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명(明)나라 때에는 요동과 요서가 경도 120도로 옮겨져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이 경계가 되어 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明이전의 요서인 지금의 산서성 남서부에 있던 노룡, 난하, 갈석산, 창려, 수양산 등 여러 지명들이 하북성으로 지명이동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경도 120도 山海關을 기점으로 좌측인 河北省에 盧龍, 灤河, 碣石山, 昌黎, 首陽山 등이 옮겨져 있음을 대륙지도에서 볼 수 있으며 후대에 편찬된 여러 사료에서 옛 지명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있음을 찾아 볼 수 있음.
특히 명나라 3대 주체(朱棣: 재위, 1402-1424)의 시작으로 약 170년 동안 長城(변장) 축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명말⸱청초의 사학자인 장대(張岱:1597-1684)는 “명(明)일대에 국사(國史)는 진실성을 잃었고 가사(家史)는 객관성을 잃었고 야사(野史)는 억측한바가 많으니, 280년 동안 이 모두가 하나의 속임의 세계였다.” 張岱, 瑯環文集卷1, 石匱室自序.; 閔斗基, 중국의 역사인식 하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7), p. 483.
라고 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명대(明代)의 역사가 얼마나 진실성이 없었는가를 잘 반영해 준다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문명은 江을 중심으로 발생했으며 그 강의 수원(水源)은 대체로 산(山)에서 비롯되었다. 산이 있으면 물의 근원이 되고 물이 있는 곳은 반드시 산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천과 산은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요서와 요동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산(맥)과 하천에 중점을 두고 조사하려고 한다. 고구려에는 요산(遼山)이 있어 소요수(小遼水)의 발원지였고, 대요수(大遼水)가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발원한다 하였다. 姚思廉, 梁書 卷54, 「高句麗」 “句驢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其王都於丸都山下. 多大山深谷 無原澤百姓依之人居, 食澗水.”;南史 卷79 「列傳」제69,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其先所出事詳北史. 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漢.魏世南與朝鮮獩貊 東與沃沮北與夫餘接. 其王都於丸都山下 地多大山深谷 無原澤百姓依之人居, 食澗水.”;新唐書 卷220,「高[句]麗」“水有大遼.少遼: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少遼出遼山西, 亦南流, 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 曆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南至安市, 入於海. 而平壤在鴨綠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
하동(河東)인 산서성에 있던 이 요수(遼水)로 인하여 요동과 요서가 나누어지게 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시기(232BC-668AD)상서(尙書)卷11,“武王旣伐東夷肅愼來賀.”;상서정의(尙書正義)卷28.「주관(周官)」에“성왕(1055-1021BC)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축하하였다란 기사에 대해 서한의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주석하기를 “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해동의 여러 이족인 구려(駒麗), 부여, 한(馯), 맥(貊) 등과 같은 족속인데, 주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구려는 고구려를 뜻함으로 BC1000년경에 고구려란 이름이 보이고 있다.;일주서(逸周書) 「왕회해」에 고이(高夷)가 나오는데 진(晉)나라 학자 공조(孔晁)가 “고이는 동북의 이(夷)로서 고구려다.”라고 주석하였다.
서주초기인 BC1000년경에 고구려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서주는 섬서성 호경(서안)에 도읍하고 있을 때로 동북은 황하북부 산서성을 일컫는 말이다.;漢書卷1(上) 고조4년(203BC) 8월, “北貊燕人來致梟騎助漢, 師古曰貊在東北方三韓之屬(북맥과 연나라 사람이 와서 날랜 기병을 보내어 한나라를 도왔는데 안사고는 이 맥은 동방의 삼한(진한, 마한, 변한)의 무리들이다)”라고 적고 있다. 서한 역시 섬서성 서안에 도읍하고 있어 동북은 황하북부 산서성을 가리키고 북맥은 고구려를 뜻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232-202BC)와 싸울 때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장량이 고구려를 찾아가 고구려의 날랜 군사와 기병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기원전 203년의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당서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역대명신주의, 흠정성경통지, 당회요, 옥해, 책부원귀 등 모든 사료에 “고구려는 900년이 되기 전에 80세의 대장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다. ...지금 900년이 되었으며 이적의 나이 80이다”고 한 기록에 주목해야한다. 이적의 나이 80이라는 것은 고구려가 망한 668년을 뜻한다. 따라서 900년에서 668년을 빼면 232년이 도출된다.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훨씬 이전에 건국하였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다름 아닌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기록이다.
“大朱留王紹承基業,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號爲永樂(대주류왕은 시조께서 창업하신 국가 기반을 계승하고 제17대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고하여 시조로 부터 17세가 광개토호태왕이라 기록되어 있다.
1세를 30년으로 보아 17세면 대략 510년이 된다. 정리하면 신당서, 삼국사기, 상서, 상서정의, 일주서, 한서,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사료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건국이 BC23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에 기록되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문헌 및 자료들에 근거하여 요서와 요동의 위치를 찾아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등한시되어온 水經注(수경주),中國古代地名大詞典(중국고대지명대사전), 中國古今地名大辭典(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歷史地名大辭典(중국역사지명대사전),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 大淸廣輿圖(대청광여도), 각종 地圖冊(지도책), 그리고 25사중 특히 각 사서의 「地理志(지리지)」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위치를 조사, 검토,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우리 사서에 ‘요서’란 단어가 맨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제6대 태조 궁 무열제 때이다. “태조대왕 3년 봄 2월에 요서에 열 개의 성(城)을 쌓아서 한나라 군사를 방비하였다.” 金富軾, 三國史記 제15권, 高句麗本紀 제3, “太祖大王: 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蝗害穀.”란 기록이다.
지금까지 요서에 관해 언급되어 있는 학위논문 이병헌, 윤병모, 정현승, 박진호, 김현숙, 배현준, 허강, 복기대.(자세한 내용은 참고자료 참조)
8편과 국내학술 논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성한, 임기환, 김정열, 문안식, 공석구, 송호정, 오강원, 이형구, 박세이, 정병준, 박경철, 복기대, 薛志强, 김병준, 이정빈, 신용하, 오대양, 정경희, 정현승, 송호정, 윤병모, 조진선, 이경식, 노은주, 조원진, 조빈복, 유원재, 이후석, 안국승, 박선희, 이용범, 정원철.(자세한 내용은 참고자료 참조)
28편 참고자료 참조.
이 있어 검토해 본 바로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요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거나
둘째, 현재의 요녕성 요하(遼河)의 서쪽으로 비정하거나 셋째, 난하유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복기대는 요서를 중국의 요녕성 서부지역과 내몽고 동남부 지역으로 파악하였다.
복기대, 「기원전 7-4세기 遼西地域의 정치적 변화에 관하여 - 秦開 동정을 중심으로 -」, 문화학사 - 21, 한국문화사학회, 2004.
배현준은 요서지역을 일반적으로 요하이서의 서요하 수계구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배현준, 「중국 遼西지역 점토대토기 연구: 이중구연토기 및 遼東지역 점토대토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국내석사), 한양대학교, 2011.
박진호 역시 요서지역은 중국 요녕성 내의 요하 서쪽지역을 일컫는 것이라 하였다.
박진호, 「요서지역 초기 신석기 문화연구: 소하서 흥륭와 문화를 중심으로」(국내석사), 인하대학교, 2014.
이병헌은 그의 논문에서 단순히 요서라고 언급하였으며 요서의 구체적인 위치를 밝히지 않았다.
이병헌, 「백제 枕流王의 요서진출과 그 의의」(국내석사), 동국대학교, 2015.
정병준 역시 「唐代 遼西 平盧軍의 南下와 田神功의 活動」이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정병준, 「唐代 遼西 平盧軍의 南下와 田神功의 活動」, 인문학연구, 충남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2013.
신용하는 고조선 요서지역이 난하(灤河)의 양안과 난하를 건너 지금의 북경부근까지로 설정하였다.
신용하, 「조선 국가의 요동.요서 지역으로의 발전」, 고조선 단군학 -25, 단군학회, 2002.
정현승은 그의 논문 「中國 冀北·遼西 地域의 中原式 銅戈 硏究」에서 요서지역을 요녕성에 흐르는 요하를 기준으로 요하의 이서(以西)지역으로 정하였다.
정현승, 「中國 冀北.遼西 地域의 中原式 銅戈 硏究」(국내석사), 영남대학교, 2015.
송호정은 요서지역을 “요녕지역, 즉 남만주”라고 정리하였다.
송호정, 「요서지역 고고학 . 고대사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상고사학회 - 10, 한국상고사학회, 2016.
허강은 요서를 요하 이서(以西) 지역으로, 요동을 요하 이동(以東) 지역이라고 지칭하였다.
허강, 「唐 전기의 營州都督府와 遼西 經略」(국내석사), 서강대학교, 1996.
윤병모는 高句麗의 戰爭과 遼西進出 硏究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를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둘러싸인 연해지역으로 이해하였으며, 전한과 후한이 존재하던 220년대까지 고대의 요서와 요동 경계는 현재의 요하(遼河)가 아니라 대릉하와 의무려산으로 인식하였다.
윤병모, 高句麗의 戰爭과 遼西 進出 硏究(국내박사), 성신여자 대학교, 2009.
중국에서 발표된 논문 역시 ‘고구려의 요동 요서’란 제목의 논문은 단 한편도 찾아볼 수 없으며 요서(遼西)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요서를 언급한 논문들이 대부분이다. 주로 고고학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요녕성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들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물들이 발굴된 내몽고와 요녕성 일대를 요서지역(遼西地域)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관윤화(關潤華)는 「1-3世紀初遼西民族分布格局硏究」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는 지리적인 개념으로 원래 요하의 서쪽이다.” 關潤華, 「1-3世紀初遼西民族分布格局硏究」(碩士), 吉林大學, 2004.라고 하였다.
또한 위염염(魏琰琰)은 明遼東鎭軍事聚落分布及防御變遷硏究란 그의 논문에서 요동(遼東)을 명대(明代)에 축조된 장성(長城)이 있는 요동으로 설정하고 있다. 魏琰琰, 分統擧要, 網維秩序-明遼東鎭軍事聚落分布防御變遷硏究(博士). 天津大學, 2016.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윤병모를 제외한 이들 논문들은 특정한 고구려시기를 반영한 ‘고구려의 요동 요서의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선행연구 분석과 비판에는 한계가 있다. 필자가 조사 비교 분석한 요서는 앞의 세 부류와는 완전히 다른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서부, 하남성(河南省) 서북부, 섬서성(陝西省) 동북부이다. 따라서 본고는 꼼꼼히 살핀 사료에 근거한 요서와 요동의 위치가 기존 통설과 다르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계속>
고구려의 요동 요서 위치에 대한 소고(2)
II. 遼西는 河東지방
글쓴이 : 폴 김 날짜 : 2020-06-25 (목) 22:32:51
산서성에 요산(遼山)이 있어 소요수(小遼水)가 발원하고, 북쪽 말갈의 산에서 발원한 대요수(大遼水)와 합류하여 요수(압록수)라는 하천을 이룬다. 이 요수(遼水)로 인하여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구분되었다. 따라서 산서성은 황하의 동쪽인 하동(河東)에 위치한 지역이므로 요서와 요동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동의 위치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1. 河東은 山西省
황하(黃河)는 마치 ‘几(궤)’ 모양으로,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감숙성과 내몽고를 지나 동으로 흐르다 경도 110도에서 섬서성과 산서성을 경계로 하여 남하하다가 섬서, 산서, 하남성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황하가 굴곡(河曲)하여 산서성과 하남성을 경계로 동쪽으로 흘러 산동성 북부를 가로 질러 발해만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이다.
산서성(山西省)이 황하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진(秦)나라 때부터 산서성을 하동(河東)이라 하였다.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1-2단, p.95, “[山西省]: 秦置太原.上黨.河東.雲中.雁門.代郡.”
또한 옛날에는 산서성 경내, 황하 동쪽을 통칭해서 하동이라 불렀다. 라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 中國古代地名大詞典 中, “[河東]戰國時, 梁有河東地, 「盟子梁惠王一」 ‘河內凶[區], 則移其民于河東, 移其粟于河內, 河東凶[區]亦然,’ 秦漢時置郡, 黃河流經山西西境. 成南北線, 故山西境內, 在黃河以東者, 統稱河東.”에서도 말해주고 있다.
하남성과 산서성을 가로로 나누는 황하를 기준하여 황하 이남을 하남도(河南道), 황하 이북을 하북도(河北道)라 하였다. 唐나라의 지리지인 元和郡縣圖志(원화군현도지)에 의하면, 河東道, 河南道, 關內道, 山南道, 淮南道, 江南道, 劍南道, 嶺南道, 隴右道로 전국을 9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李吉甫撰, 元和郡縣圖志 [唐], 「中國古代地理總志叢刊」(北京: 中華書局, 2005), pp.1-31.
하남도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을 뜻하고, 하동도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황하를 사이에 둔 섬서성에서 볼 때는 산서성을 하동이라 하고, 하남성에서 볼 때는 산서성 서남부를 하북(河北)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3-4단, p.513, “[河北縣]: 一名魏城, 卽周初魏國, 詩有魏風, 漢置河北縣, 後魏縣廢, 故城在今山西芮城縣東北. (水經注)縣在河之北, 故曰河北. 漢大陽縣, 北周改爲河北, 唐改平陸, 故城在今山西平陸縣東北十五里”이라고도 하였다.
요약하면 산서성(山西省)을 하동(河東)이라 했으며 동시에 하북(河北)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한반도, 요녕성, 지금의 하북성은 하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서성처럼 황하와 인접해 있지 않을뿐더러 한반도, 하북성, 요녕성은 동쪽이 아닌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며, 한반도나 하북성이나 요녕성을 하동이라 했었다는 사서(史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2. 산서성에 있는 伯夷叔弟墓
사마천의 史記(사기)는 제왕을 다룬 「本紀(본기)」, 제후들을 기록한 「世家(세가), 인물을 다룬 「史記列傳(사기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전」은 백이숙제편을 시작으로 한다.
“백이숙제 두 사람은 고죽국 군주의 아들들이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인 숙제에게 왕위를 이어주려고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숙제는 맏형인 백이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백이는 ‘네가 대통을 잇는
것이 상왕의 유지이다. 내가 이어 받을 까닭이 없다.‘ 라고 하며 떠나버렸다. 숙제도 끝까지 즉위할 것을 거절하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왕위는 차남에게 돌아갔다. 세월이 흘러 늙게 된 그들은 주나라의 서백창이 노인을 후하게 대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주나라에 가보니 서백은 이미 죽었고 뒤를 이어받은 무왕은 서백을 문왕이라 칭하며, 그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 紂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정벌을 막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무왕의 마차에 달려가서 말고삐를 잡고 무왕에게 간언하였다. ‘선왕의 장례도 마치지 않고 전쟁에 떠난다고 하니 그것을 어찌 효라고 하겠으며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죽이려 하다니 그것을 인이라 하겠습니까?‘ 이 말을 듣던 무왕을 따르는 자들이 두 형제의 목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태공망(강태공)이 소리쳤다. ‘의인이니 살려주어라.’ 백이숙제는 화를 면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게 되었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로 천하는 모두 周왕실을 주인으로 섬겼으니 백이숙제 형제만은 무왕의 처사를 용서치 않았다. ‘주나라를 섬긴다니 수치로다. 의(義)를 지키는 자로서 주나라의 좁쌀을 먹을 수는 없다.‘ 이렇게 결심한 형제는 수양산에 숨어 살면서 오직 고사리만을 캐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기아에 시달리게 되어 죽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었다. ‘저 西山(수양산)에 올라 우리는 고사리로 연명했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대하는 것을 무왕은 모른다. 신농. 순. 우. 성왕의 길을 잃은 이제 우린 어디로 갈 것인가. 아, 우리는 죽어갈 뿐 우리의 명은 이제 끝났노라.‘ 이리하여 두 사람은 수양산 속에서 굶어 죽었다. 司馬遷,『史記』61 「列傳」 卷 1, 「老子伯夷傳」: “其傳曰伯夷叔弟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弟及父卒叔弟讓伯夷伯夷曰父命也遂逃去叔弟亦不肯立而逃之國人立其中子於是.伯夷叔弟聞西伯昌善養老盍往歸焉.及至西伯卒武王載木主號爲文王東伐紂伯夷叔弟叩馬而諫曰父死不葬爰及干戈可謂孝乎以臣弑君可謂仁乎左右欲兵之太公曰此義人也扶而去之武王巳平殷亂天下宗周而.伯夷叔弟恥之義不食周粟隱於首陽山.采薇而食之. 及餓且死作歌其辭曰. ‘登彼西山,兮采其微矣,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我安適歸矣.’ 于嗟徂兮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由此觀之怨耶非耶.”
『漢書(한서)「地理志(지리지)」에 “요서군(遼西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한 것으로 유주(幽州)에 속하며 영지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 班固,『漢書』「地理志」卷28下, 地理志第8下, “遼西郡 秦置. 有小水四 十八, 竝行三千四十六理. 屬幽州. 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 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 縣十四: 且慮, 有高廟 . 莽曰鉏慮 . 海陽, 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 緩虛水皆南入海. 有鹽官.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柳城, 馬首山在西南. 參柳水北入海. 西部都尉治. 令支, 有孤竹城. 莽曰令氏亭. 肥如, 玄水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又有盧水, 南入玄. 莽曰肥而. 賓從, 莽曰勉武. 交黎, 濡水首受塞外, 南入海. 東部都尉治. 莽曰禽虜. 陽樂, 孤蘇, 唐就水至從河入海. 從河, 莽曰河福. 文成, 莽曰言虜. 臨渝, 渝水首受白狼, 東入塞外. 又有侯水, 北入渝. 莽曰馮德. 絫.下官水南入海. 又有揭石水,賓水,皆南入官.莽曰選武.”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後漢書(후한서)도 “요서군 영지현-영지에 고죽성이 있으며 백이숙제의 나라다.” 范曄,『後漢書』「地理志」23 郡國 5, “遼西郡令支縣-令支有孤竹城 伯夷叔弟本國”라고 되어있다.
설문해자는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 許愼,『說文解字』“首陽山在遼西.”라고 적고 있다. 다음
은『사기집해』의 기록이다.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河東) 지방의 포판(蒲坂)에 있는 화산(華山)의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 司馬遷,『史記 61 「列傳」 卷 1, 「老子伯夷傳」: “集解馬融曰: 首陽山 在河東 蒲坂華山之北 河曲之中”; 陳士元, 論語類考 卷三 (欽定四庫全書, 上海人民出版社). “首陽: 馬融氏曰首陽山在河東蒲坂華山之北河曲之中元按漢時河東蒲坂縣卽今山西平陽府蒲州首陽山在州東南三十里卽禹貢雷首山也山上有夷齊墓幷祠馬融顔師古賈逵之設皆同然山名首陽者頗多而河南之首陽有五其河南府偃師縣西北二十五里首陽山世傳夷齊隱處上有夷齊墓高誘杜預阮籍之徒咸以爲然夫偃師舊亳地也武王伐紂還息偃師徒因有是名恐夷齊所隱不宜在此又許愼謂首陽在遼西夫遼西卽今永平府古孤竹國之遺墟在焉其上亦有墓祠豈後人因首陽之名而爲之與抑因夷齊之故國而名其山爲首陽與東蒙.”
여기서의 華山 높이 2,154m, 경도 110.0도 위도 34.5도에 위치하는 섬서성에 있는 산으로 황하굴곡 지점을 마주하고 있다.
은 산서성(山西省) 황하 굴곡지점 남서쪽으로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산이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모든 대륙지도뿐만 아니라 대청광여도에도 이 華山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도 “포판현은 옛날 순임금의 도읍지이다. 전국시대 때 위나라 포반읍이다. 한나라 때 포반현을 설치했다. 후한 때 포판이라고 했다. 수나라 때는 생략했고 고성(故城)은 오늘날 산서성 영제현 북쪽 30리에 있다...”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1단, p.1125, “[蒲坂縣] 古帝舜所都, 戰國魏蒲反邑, 漢置蒲反縣, 後漢曰蒲坂, 隋省, 故城在今山西永濟縣北三十里, 今曰
虞都鎭.”라고 적고 있다.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성이 있는 영지는 “요서군으로 秦(221-206BC)나라 때 설치한 것이며 유주(幽州)에 속한다.”는 중요한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산서성 남서부가 유주라는 것이며 ‘유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그림 6 참조]
따라서 요서군(遼西郡), 유주, 영지, 고죽성, 고죽국(백이숙제의 나라), 수양산, 포판, 하동지방 모두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서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들 지명들은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에 한 개의 지명이라도 누락이 될 경우 ‘수양산이 있는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산서성’밖에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고죽국의 정확한 위치는 고구려의 영토를 찾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요서와 요동을 밝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죽국, 고구려, 요수, 요동, 요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성립한다는 말이다.
2회 백이숙제 묘.jpg
<그림1> 섬서성의 화산과 산서성의 수양산, 백이숙제묘,
고죽성(蒲州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4단, p. 1124. “[蒲州] 見蒲州府條. 見蒲縣條.”, “[蒲州府] 北周治蒲州. 隋爲河東郡. 唐復爲蒲州. 改河中府. 明復曰蒲州. 淸升爲蒲州府. 屬山西省. 民國發. 治所爲今永濟縣.”, “[蒲縣] ... 在今山西蒲縣東南. ... 改爲蒲縣. 唐移於今治. 金升爲蒲州. 元仍曰蒲縣. 淸屬山西隰州. 民國初屬山西河東道.”
는 당시의 영지(현)로 고죽성의 위치였고 지금의 영제시임)
출처: 대청광여도, http://dl.ndl.go.jp/info:ndljp/pid/254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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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括地志(괄지지)의 기록이다. “고죽의 옛성은 노룡현 남쪽 20리에 있고 지금의 영평지방 18리에 있는 보(堡:행정단위)다. 즉 옛 노룡새이다. 영평부는 한나라의 우북평이다.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당이 영평부에 있다." (李泰, 括地志, “孤竹古城在盧龍縣南十二里 今永平地方十八里堡 卽古盧龍塞也 永平府卽 漢之右北平 夷齊廟在永平府” https://baike.baidu.com/itm.) 라하여 한(漢)나라 때 우북평이라 부른 노룡현인 영평지방에 백이숙제의 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이 있고 백이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 연(燕)에 속했다. 진(秦)나라의 우북평과 요서 두 개의 군(郡)이다. 진(晉)나라 때는 요서군이다. 후위(後魏) 역시 요서군이라 했다. 수(隋)나라 초에 평주라 했다. 수양제가 주를 폐지하고 다시 평주라 하였다.” (杜佑, 通典 卷178, 주군8 平州: “平州今理盧龍縣, 殷時孤竹國, 春秋山戎肥子二國地也. 今盧龍縣, 有古孤竹城, 伯夷叔弟之國也. 戰國時屬燕, 秦爲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 二漢因之, 晉屬遼西郡. 後魏亦曰遼西郡. 隋初置平州, 煬帝初州廢, 復置北平郡. 大唐因之領縣二.”)고 통전이 말해주고 있다.
노룡현(영평부)에 대한 百度百科(백도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나라에서는 영평로라고 불렀고 중서성에 직속시켰다. 명나라 홍무 2년(1369)에 평란부로 고치고 하남분성에 속하였다. 홍무 4년 영평부로 고치고, 이후 북직이(北直隶)로 바꿔 속하였다.... 은나라 상나라 때는 고죽국의 땅이다. 춘추(春秋) 때는 북연에 속했다. 후에 비자국에 속하였다. 진한(秦漢)부터 진(晉)에 이르기까지 유주 요서군에 속하였으며 수나라 개황 18년(598)부터 노룡현을 설치하고 북평군에 속하였다. 당(唐)부터 요·금에 이르기까지 평주에 속하였고, 요·금 때, 이곳을 평주로 고쳤으며 원나라 때 이곳은 영평로의 치소이다.... 명나라 때부터 이곳을 영평부로 고쳐 불렀다.” 百度百科 https://baike.baidu.com/item/永平府/4692407?fr=aladdin#1
(“元朝称为永平路,直属于中书省. 明朝洪武二年,改为平滦府,属河南分省.洪武四年改永平府.此后改属北直隶....殷商时期为孤竹国地,春秋属北燕,后为肥子国.秦汉至晋均属幽州辽西郡.隋开皇十八年(公元598年)始设卢龙县,属北平郡.唐至辽、金时期属平州,辽、金时,将这里改称平州。元朝时,这里是永平路的治所....从明朝起这里又改称为永平府”) 라고 설명하고 있다.
노룡(영평지방)은 은나라 상나라 때에 고죽국의 땅인데 춘추시기(770-403BC)에는 북연에 속했으며 후에 비자국에 속했다. 진(秦)나라 때부터 유주 요서군에 속했고, 수나라 때인 598년에 노룡현을 설치했다. 명나라 때인 1369년에 노룡현을 평란부로 고치고 하남분성(河南分省)에 속하게 했다. 하남분성에 속했다는 것은 산서성과 하남성이 황하로 경계를 이룬 가까운 인접 지역이였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문에서 언급한 비자국은 산서성(山西省)에 있었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잘 입증하고 있다.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4단, p. 1230. “盧龍縣: 商孤竹國, 春秋爲肥子國.”; 魏嵩山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廣州: 廣東敎育出版社, 1995), p.684. “肥國: 春秋時方國之一. 在今山西昔陽縣東后爲晉所滅.”; 臧勵龢等, 앞의책, 제2-3단, p.529. “肥: 春秋時夷國, 子爵, 今山西昔陽縣東五十里有昔陽故城, 卽其國都, 后爲晉所滅.”; 魏嵩山 主編, 앞의책, p.631. “昔陽縣: 1914年以樂平縣改名, 治所卽今山西昔陽縣.”) 오늘날의 하북성에 있다는 노룡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곳의 지명이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은 이들 지명들은 모두 산서성 남서부에 있는 지역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조의 흥망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같은 지명이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노룡(盧龍)’이라는 지명은 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서성 남서부의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에 있던 지명이 아닌 것이다.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유수(濡水)’라는 하천과 수양산인 ‘중조산(中條山)’이다. 유수는 백이숙제(伯夷叔弟)의 나라인 고죽성(孤竹城)의 서쪽으로 흐르는 오늘날의 산서성 서남부에 있는 하천이라는 사실이다.
(水經注 (中)(三民書局印行, 2011), pp.594-597, “[濡水]: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 濡水又東南逕盧龍故城東... 濡水又東南流逕令支縣故城東... 分燕置遼西令支隷焉. 魏土地記」.. 肥如城四十里 有濡水, 南流逕孤竹城西, 右合玄水, 世謂之小濡水, 非也.”)
水經注(수경주)는 유수(濡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유수(濡水)는 북쪽 변경 밖에서 동남쪽으로 흘러오다가 요서(遼西) 영지현(令支縣) 북쪽을 지나간다. ... 유수는 다시 동남으로 흘러 노룡새(盧龍塞)를 지난다. ...유수는 다시 동남으로 흘러 노룡(盧龍)의 고성(故城) 동쪽을 지나간다. 이 고성은 한(漢)나라 건안(建安) 12년에 조조(曹操)가 답돈을 정벌할 때 쌓은 성이다. ...유수는 다시 동남으로 흘러 영지현(令支縣) 고성(故城) 동쪽을 지나는데 이곳이 왕망의 영씨정(令氏亭)이다.
진시황 22년에 연(燕)나라를 갈라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한 뒤 영지현을 예속시켰다. 魏土地記(위토지기)에서 말하길 비여성(肥如城) 서쪽으로 10리에 유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고죽성(孤竹城) 서쪽을 지나간다. ... 地理志(지리지)에서 말하길 ‘노수(盧水)는 남쪽에서 현수(玄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현수는 다시 서남으로 흐르다가 고죽성(孤竹城) 북쪽을 지나 서(西)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그래서 地理志(지리지)는 ‘현수가 유수의 동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地理志(지리지)에서 말하길 ‘영지(令支)에는 고죽성(孤竹城)이 있는데, 고죽성은 옛 고죽국(孤竹國)이다’라고 하였다.
史記(사기)에서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다’라고 했는데, 이곳에서 나라를 사양하였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다.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 요서태수 염번(廉翻)이 꿈속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伯夷)의 아우이다. 요해(遼海: 요수와 황하의 만나는 곳의 물) 에 나의 관(棺)이 떠돌고 있는데, 그대가 착하고 어질다하니 잘 묻어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가보니 과연 물 위에 떠있는 관이 있었다. 아전들 중에서 그 관을 보고 웃는 자들은 모두 까닭없이 죽었다. 이에 다시 잘 묻어 주었다.
晉書(진서) 「地道志(지도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요서(遼西) 사람들이 요수(遼水)에 떠 있는 관을 깨려고 했으나 관 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죽군(孤竹君)이다. 너희들이 나를 깨면 어쩐단 말이냐?’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사당을 세워 주었다.’라는 글이 있다. 사당은 산 위에 있고, 성(城)은 산 옆에 있다. 비여현 남쪽 12리에는 흐르는 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
유수(濡水)는 다시 동남 류현(絫縣) 갈석산(碣石山)에 도달한다. 문영(文穎)이 말하길 ‘갈석산(碣石山)은 요서(遼西) 류현에 있다’라고 했다. ... 地理志(지리지)에서 말하길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 려성현 서남쪽에 있는데 왕망이 이를 게석(揭石)으로 바꿨다’라고 하였다.
옛날 한무제(漢武帝)도 대갈석산에 올라 망망대해(황하)를 바라보고 이곳 돌에 공적을 새겨 놓았다. 지금도 황하에는 우뚝 솟아오른 돌들이 수십 리나 늘어서 있다. 산위에는 큰 돌이 기둥 같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곳에 서 있으면 종종 큰 황하의 바닥을 볼 수 있다. 조수가 많이 몰려 올 때는 물에 묻혔다가 조수가 물러가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얼마나 깊고 얕은지 알 수 없기에 세상 사람들은 천교주(天橋柱)라 이름 붙였다. 마치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같지만 저절로 생긴 돌이다. 위소(韋昭)도 그 돌을 가리키면서 ‘이게 갈석(碣石)이다’라고 하였다. ...
(水經注卷14, [濡水]: “濡水從塞外, 來東南過遼西, 令支縣北. ... 濡水又東南逕盧龍塞 塞道自無終縣東出渡濡水 向林蘭脛 東至淸脛 盧龍之險 峻坂縈折 故有九䋫之名矣.... 濡水又東南逕盧龍故城東 漢建安十二年 魏武征蹋頓所築也. 濡水又南 黃洛水注之 水北出盧龍山 南流入于濡. 濡水于東南 洛水合焉 水出盧龍塞西 南流注濡水. 濡水又屈而流 左得去潤水 又合敖水 二水竝自盧龍西注濡水. 濡水又東南流逕令支縣故城東 王莽之令氏亭也 秦始皇二十二年 分燕置遼西郡 令支隷焉. 魏土地記曰 肥如城西十里有濡水 南流逕孤竹城西. ...地理志曰 盧水南入玄. 濡水又西南逕孤竹城北 西入濡水. 故 地理志曰 玄水東入濡. 盖自東而注也. 地理志曰 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史記曰 孤竹君之二子伯夷叔齊 讓國于此 而餓死于首陽. 漢靈帝時 遼西太守廉翻夢人謂已曰余孤竹君之子 伯夷之弟 遼海漂吾棺槨 聞君仁善 願見藏覆 明日視之 水上有浮棺 吏嗤笑者皆無疾而死 于是改葬之. 晉書 「地道志」曰 遼西人見遼水有浮棺 欲破之語曰 我孤竹君也. 汝破我何爲 因爲立祠焉 祠在山上 城在山側 肥如縣南十二里 水之會也.... 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 文穎曰 碣石在遼西絫縣. ... 地理志曰 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揭石也. 漢武帝亦嘗登之以望巨海 而勒其石于此. 今枕海有石如甬道數十里 當山頂有大石如柱形 往往而見 立于巨海之中 潮水大至則隱 及潮波退 不動不沒 不知深淺 世名之天橋柱也. 狀若人造 要亦非人力所就 韋昭亦指此以爲碣石也.”)
사마천의 사기에는 「지리지」가 없다.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 때까지 서한(西漢) 200여 년 동안의 일을 기록한 반고의 한서에 비로소 「지리지」가 나온다.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지리지」이다. 강의 위치를 확인해야 땅의 위치를 알 수 있었기에 반고는 ‘산과 하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9주의 하나인 형주(荊州)를 설명한 한서 「지리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荊及衡陽 惟荊州 江漢 朝宗 于海 九江” 본문에서의 강한(江漢)이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漢)은 한수로 오늘날의 섬서성 영강현(寧羌縣)에서 발원하여 지금의 무한(武漢)에 이르러 장강과 합류한다. 마치 요수(遼水)가 해(海)라는 별칭의 황하와 합류한 물을 요해(遼海)라고 한 것과 같다. 내륙의 하천이 황하로 들어갈 때 황하를 해(海)라고 표현한 것을 「지리지」나 「지명대사전」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유수(濡水)를 기록한 본문은 산서, 섬서, 황하가 굴곡하는 지역을 설명하고 있음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따라서 요해(遼海)는 산서성 북쪽에서 발원한 요수(遼水)가 남쪽으로 흐르다가 곡옥에서 물이 남서쪽으로 굽어 해(황하)로 들어가 두 물이 합류한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지금의 하북성에는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었다는 수양산(首陽山)인 중조산(中條山)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首陽山 (李吉甫撰, 元和郡縣圖志 [唐], 「中國古代地理總志叢刊」(北京: 中華書局, 2005, p.349, “雷首山一名中條山今按..括地志云..‘蒲州河東縣雷首山, 一名中條山, 亦名歷山, 亦名首陽山, 亦名襄山, 亦名甘棗山, 亦名猪山, 亦名獨頭山, 亦名蒲山, 亦名吳山. 此山西起雷首, 東至吳坂, 凡十一名. 蒲山卽襄山, 括地志擧十一名, 實只九名. 通典有八名, 不數雷首山, 太平寰宇記與通典同, 惟加陑山爲九. 此志只擧中條, 疑有脫文.”
孫星衍,括地志,正覺樓叢書,[淸],“陶城在蒲州河束懸北一十里即舜所都也南去仙山不選或陶所在則可何必定陶防隔附舜陶之陶也斯或一疏(史記五帝沐紀匠義)蒲州河東縣雷首山一各中條山亦名歷山亦名首陽山亦名蒲山亦名襄山亦名甘棗山亦名豬山亦名獨頭山亦各薄山亦名吳山此山西起雷首山東至吳叛凡十一名隨州縣分之(史記五帝)”,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871051) 은 현재의 中條山으로 山西省 남부에 있는 산이다. 하북성에 있다는 수양산을 중조산이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유주(幽州)에 속하는 영지(令支)에 있는 고죽성(孤竹城)은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는 고죽국으로 산서성(山西省) 남서쪽 황하(黃河) 근처에 있는 현재의 영제시(永濟市)이며, 영평(永平), 평주(平州), 노룡(盧龍),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유주(幽州), 갈석(碣石) 모두 산서성에 있던 지명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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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裵矩: 547-627) 隋(581-618) 나라 煬帝 밑에서 황문시랑(黃門侍郞)이란 벼슬을 한 사람.는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사람으로 수양제에게 고구려의 정벌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였다. 하동 문희현이 출신지라 산서성에 대한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동인 산서성(山西省)에 있던 高句麗의 영토가 원래는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孤竹國)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인다. 隋書(수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배구가 앞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周나라가 여기에 기자(箕子)를 봉(封)하였고 한(漢)에 이르러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대에 요동(遼東)을 통솔하였다.” 魏徵等, 隋書 卷67, 「列傳 제32」 [裵矩]: “矩因奏狀曰: 高[句]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漢世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
라고 양제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토가 전에는 고죽국이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사실을 舊唐書(구당서) 劉呴等, 舊唐書 卷63, 「列傳 제13」 [裵矩]: “矩因奏曰: 高[句]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箕子, 漢時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
와 新唐書(신당서) 歐陽修等, 新唐書 卷100, 「列傳 제25」 [裵矩]: “矩因秦言: 高[句]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 漢分三郡, 今乃不臣, 先帝疾之, 欲討久矣.”에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영토가 된 고죽국에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를 봉하였다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明史(명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朝鮮)은 기자(箕子)에게 봉(封)하여 준 나라이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일찍이 연(燕)나라 사람 위만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사군을 설치하였다. 한(漢)나라 말에 부여(扶餘)사람 고씨(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쳤다. 혹은 고구려(高句麗)라고도 한다. 평양(平壤)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곧 낙랑(樂浪)의 땅이였다. 그 뒤,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고씨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옮겨 동경(東京)이라 불렀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북으로 거란(契丹)과 인접하였고, 서쪽에는 여직(女直), 남쪽에는 일본이 있었다. 원(元)의 지원(至元) 연간(1335-1340)에 서경(西京)(平壤)이 내속(內屬)되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를 설치하고 자령(慈嶺) 끝으로 경계를 삼았다.” 張延玉等, 明史 卷320, [朝鮮]: “朝鮮, 箕子所封國也. 漢以前曰朝鮮. 始爲燕人衛滿所據, 漢武帝平之, 置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漢末,有扶餘人高氏據其地, 改國號曰高麗, 又高句麗, 居平壤, 卽樂浪也. 已, 爲唐所破, 東徙. 後唐時, 王建代高氏, 兼倂新羅.百濟地, 徙居松岳, 曰東京, 而以平壤爲西京. 其國北鄰契丹, 西則女直, 南曰日本. 元至元中, 西京內屬, 置東寧路總管府, 盡慈嶺爲界.”
라고 하여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산서성(山西省)에 주나라가 기자(箕子)를 봉하였고 고구려가 그 땅을 영토로 하였으며,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이 그 땅을 다시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이 고씨(高氏)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옮겨 동경(東京)이라 불렀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는 것은 고구려가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망할 때까지 고구려는 이곳 산서성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 고려의 서경(西京)이였다는 중요한 기록인 것이다. 한 가지 차이점으로, 隋書(수서)는 삼군(三郡)을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明史(명사)는 사군(四郡)을 설치했다는 부분이다. 본고에서는 이점은 다루지 않으려한다.
II. 고구려의 遼水
1. 遼水가 요동과 요서를 나눔
황하(黃河)라는 하천을 기준하여 황하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산서성을 하동(河東)이라 불렸던 것처럼,
요수(遼水)라는 하천으로 인하여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란 고유명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동(東)은 동쪽이고 서(西)는 서쪽이니 요동(遼東)이란 ‘요(遼)가 있는 동쪽’ 혹은 ‘요(遼)의 동쪽’이란 뜻이고,
요서(遼西)란 ‘요(遼)가 있는 서쪽’ 혹은 ‘요(遼)의 서쪽’이 되겠다. 그렇다면 遼라는 글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면 요동과 요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설문해자에서 허신은 遼 許愼, 說文解字, “遼遠也.小雅.山川悠遠.維其勞矣.箋云.其道里長遠.邦域又勞勞廣闊.勞者、遼之叚借也.从辵.尞聲.洛蕭切.二部.”
를 ‘멀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각 글자마다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遼’는 ‘큰 샘들이 있는 땅’이란 의미를 갖는 글자다. 김태영, 한자는 동이배달한민족의 글자다(경기도: 세계출판사, 2016), p.142. “遼(요,료): = 辶(착: 달리다) + 大(대: 크다) + 丶(대자 밑 양쪽에 붙은 두 획) + 泉(천: 샘, 샘물이 솟는 수원) = 遼 (큰 샘 즉 水源들을 찾아 달려간 곳으로 큰 샘들이 있는 땅.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가르는 경도 110도의 황하 동쪽을 뜻함) <옥편상의 정의>: 辶(辵)+x(音). ‘x료’는 횃불을 본 뜬 것. 옛날에, 횃불을 켜서 아득히 먼 하늘에 제사지냈음. 파생하여, ‘아득하다, 멀다’의 뜻을 나타냄.
우선 적절한 획을 정확하게 표시하지 못한 점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클대(大)자의 양쪽에 표시한 두 획은 복수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하나의 큰 샘이 아닌 여러 개의 큰 샘들을 의미한다. 遼자는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韓民族史)에서 반드시 정확하게 알아야 할 글자이다. 우주천문사상으로 본 그 뜻은 ‘큰 샘들 즉 물이 나오는 수원들을 찾아 달려간 곳으로 땅 이름’이란 의미이다. 다시 쉽게 풀어 설명하면, ‘큰 샘들이 있는 땅’이란 의미다. 샘이란 물 즉 수원(水源)이 땅에서 솟아나야 한다. 저수지처럼 빗물을 저장한 것을 샘이라 하지 않는다.
샘이란 땅에서 솟아나는 물이다. 말하자면 한곳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물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유주(幽州)에 있는 7개의 군(郡) 가운데 상곡군(上谷郡)을 제외한 6郡 속에서, 요서군(遼西郡)에만 48개의 작은 물이 있어 함께 3,046리 班固,『漢書』「地理志」卷28下, 地理志 第8 下, “遼西郡 秦置. 有小水四 十八, 竝行三千四十六理.”를 흐르고,
요동군(遼東郡)에는 대요수(大遼水)가 1,250리 班固, 앞의책,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를 흐르며, 현토군(玄菟郡)에는 마자수(馬訾水)가 2,100리 班固, 앞의책,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흘러가고,
낙랑군(樂浪郡)에는 열수(列水)가 820리 班固, 앞의책,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를,
우북평군(右北平郡)에는 경수(浭水)가 650리 班固, 앞의책,「地理志」卷28下, 地理志 第8 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 行六百五十里.”를,
어양군(漁陽郡)에는 고수(沽水)가 750리 班固, 앞의책,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를 흘러,
이물을 모두 합치면 8,616리를 흐르는 엄청난 샘물과 같은 것으로, 遼라는 글자의 뜻과 일맥상통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 물이 모두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산서성이 遼라는 글자를 지니게 된 이유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사방 약 2천리이다.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 곳에서 흘러나온다.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의 꼬리부분에 있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서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고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姚思廉, 梁書 卷54, 「高句麗」 “句驢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其王都於丸都山下. 多大山深谷 無原澤百姓依之人居, 食澗水.”
南史(남사)에도 고구려에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흘러나오고 당시의 도읍지는 환도성(丸都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그 선조에 대한 사적은 北史(북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그 산에서 흘러나온다. 한(漢)·위(魏) 시대에는 남으로 조선(朝鮮),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인접하였다.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 꼬리부분에 있다. 땅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李延壽, 南史 卷79, 「列傳」제69,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其先所出事詳北史. 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漢.魏世南與朝鮮獩貊 東與沃沮北與夫餘接. 其王都於丸都山下 地多大山深谷 無原澤百姓依之人居, 食澗水.”라고 알려주고 있다.
양서와 남사의 사서(史書) 가운데 ‘왕도는 환도산 꼬리부분에 있다.’라고 해석한 필자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원문은 “其王都於丸都山下”라 되어 있다. 사람들은 ‘하(下)’를 ‘아래’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사서의 해석에서는 ‘아래’라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구려의 환도성은 안시성과 함께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환도산(丸都山)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3단, p.51. “[丸都] 高句麗故都. [通典]城在丸都山下沸流水之東”
臧勵龢等, 앞의책, 제1단, p.763, “[馬首山] 在山西新絳縣西四十里, 俗名馬頭山. [絳州志]在傳趙盾田於首山, 卽此, 一名火焰山.”
中國古代地名大詞典, “馬首山: 在山西新絳縣西北四十里, 俗名馬頭山. [張[絳]州志]在傳趙盾田于首山, 卽此, 一名火焰山.”
歐陽修等, 新唐書,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 曆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南至安市, 入於海.” <그림 3>에서 밝힌 것처럼 ‘대요수가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마자수와 합류하여 남으로 안시성을 거쳐 황하로 들어간다.’ 하였다. 따라서 안시성의 위치는 지금의 화염산으로 비정되므로 환도산이 곧 화염산임을 알 수 있다.>에 있었는데, 이 환도산은 말처럼 생겨 말머리 부분을 마수산(馬首山)이라고 부르고, 말꼬리 부분은 마미산(馬尾山)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말머리 부분에는 안시성(安市城)이 있었고 말꼬리 부분에는 환도성(丸都城)이 있었기 때문에 ‘下’를 ‘아래’라고 해석하지 않고 ‘꼬리부분’이라 해석한 것이다. 자전(字典)을 찾아보면 下의 뜻에 ‘물건의 머리와 반대되는 쪽 끝’이라 되어있다. 만약 下를 ‘아래’라고 해석한다면 앞뒤 문맥으로 보아 전혀 논리성이 없는 것이다.
“땅이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라고 했는데, 도성이 환도산 아래 있다면 산골짜기가 아니므로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시냇물을 마실 필요가 없는 것이 논리적인 사고다. 환도산 위에 都城이 위치하였기 때문에 산골짜기의 물을 마셨던 것이다. 김부식은 같은 산에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에 안시성과 환도성이 각각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三國史記(삼국사기)』「地理志(지리지)」에서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 한다.”66) 金富軾著, 李載浩 편역, 『三國史記』(서울: 솔, 1977), p.64. 라고 적었던 것이다.
新唐書(신당서)역시 고구려에 遼山과 遼水란 하천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앞의 두 史書보다 더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遼水가 왜 鴨綠水란 명칭을 갖게 되었는지의 이유도 잘 말해주고 있다.
“물(水)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소요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량수(梁水)가 새외(塞外: 요새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백산(靺鞨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물빛이 오리머리와 같이 푸르러 압록수(鴨綠水)라 부른다.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거쳐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바다(海: 황하) 수경주, 지리지 및 그 밖의 여러 사서들을 잘 검토해보면 옛날에는 黃河처럼 흐르는 물은 해(海), 하(河), 수(水)라고 부르고, 천연호수처럼 고여 있는 물은 해(海) 앞에 한 글자를 더 붙여 천해(天海: 현재의 외몽고 바이칼 호수), 북해(北海: 산서성 최남단 천연호수인 운성염지로 동서 84리 남북 17리 이며 지금의 해지海池), 청해(靑海: 청해성에 있는 호수로 서해西海라고도 부름) 등으로 2글자로 된 고유명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황하 = 해海 = 하수河水 = 서하(西河: 산서성과 섬서성 사이의 황하를 칭함).
한반도의 압록강과 요녕성에 있는 요하(遼河)를 고구려 당시의 압록수로 비정하여 신당서에 기록된 ‘해(海)’를 황해(黃海)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의 海는 ‘황해’가 아니라 ‘황하’라는 사실을 다음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尙書 卷11, 「周官」편에, “武王旣伐東夷, 肅愼, 來賀”...란 주석에서 “海東諸夷, 駒麗, 扶餘, 馯, 貊之屬.”이라 설명하고 있다. 만약 ‘海’를 황해로 주장한다면 황해의 동쪽은 한반도로 한반도에 고구려, 부여, 한(馯), 맥이 모두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사(史), 서(書), 사료(史料), 문헌(文獻), 자료(資料), 지도(地圖)(冊)에도 한반도에 이들이 살았다고 분명하게 밝힌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당시의 海는 황하를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당서의 기록을 산서성 오늘날의 분하(汾河)에 맞춰보면 수수께끼를 풀 듯 정확하게 맞아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요하가 고구려 당시의 요수(압록수)라고 주장한다면 신당서의 기록을 요녕성의 요하(遼河)에 직접 대치시켜 보길 제안한다. 그리하면 대요수, 마자수, 소요수가 발원하는 수원(水源)은 물론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의 위치가 정확하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司馬遷, 史記上 「夏本紀 第2」, p.20. “徐廣曰海一作河(서광이 말하기를 해(海)는 하(河)라고도 한다.)”
로 들어간다. 평양성(平壤城)은 압록의 동남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이 건너다니므로 해자(塹濠) 역할을 한다.“ 歐陽修等, 新唐書 卷220,「高[句]麗」“水有大遼.少遼: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少遼出遼山西, 亦南流, 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 曆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南至安市, 入於海. 而平壤在鴨綠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
라고 하여 고구려에는 요산(遼山)이 있고 대요수(大遼水), 소요수(小遼水), 마자수(馬訾水), 염난수(鹽難水)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황하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그림 3 참조]. 그리고 “마자수(馬訾水)가 압록강(鴨綠江)이며 일명 압록수(鴨綠水다)” 臧勵龢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2단, p.765, “[馬訾水]卽鴨綠江.「漢書地理志」玄菟郡西蓋馬縣. 馬訾水西北入鹽難水. 「通典」一名鴨綠水.” 라는 사실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증명해주고 있다.
지나대륙의 하천 약 1,252개를 자세히 설명해놓은 고대(古代) 지리서인 水經注(수경주)에도 고구려의 대요수(大遼水)가 새외(塞外)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성(安市[城])까지 흘러 황하(黃河)로 들어가며, 현토 고구려현에 있는 요산(遼山)에서 소요수(小遼水)가 흘러 요대현(遼隊縣)을 지나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 陳橋驛, 葉光廷 注譯, 新譯水經注 (中)(臺灣: 三民書局服彬有限公司, 2011), PP. 608, 611, “十三州志曰.. 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入于海. 「小遼水」: 又玄菟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縣, 故高句麗, 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西元前109年), 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與大梁水會. 水出北塞外, 西南流至遼陽入小遼水. 故 「地理志」曰..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郡國志」曰.. 縣, 爲淡淵. 晉永嘉三年涸. 小遼水又逕遼隊縣入大遼水.> 라고 적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양서, 남사, 신당서, 수경주 모두 고구려의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과 요수(遼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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