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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 린 바 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원한의 흥남철수작전(1.4후퇴)
1.4후퇴는
함경북도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 전투에서 시작한 미 해병대의 철수작전은 흥남부두 민간인 철수작전이 1951년 1월4일 개시된 것입니다.
이때 철수병력과 피난민은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개마고원의 강추위 속에 후퇴하는 미 해병대
중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국군과 UN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국군 2군단은 해체되었고, 국군의 3개 사단과 미 제 2 보병 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재편성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특히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중국군의 2차공세로 12월 6일 평양을 내어주고 임진강까지 철수하게 되자, 흥남 일대의 미 제 10군단은 측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육로철수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한 미 제 10군단은 국군 제 1군단과 함께 함흥-원산 일대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고 방어전을 치를 것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 원수는 ‘해상을 통한 철수’를 지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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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LST(Landing Ship Tank, 전차 양륙함) 81척, LSD(Landing Ship Dock, 도크형 상륙함) 11척, MSTS(해상 수송부대) 함선 76척을 비롯해 모두 200척이 넘었습니다. 10여 일간의 흥남철수작전 기간 중 유엔군과 한국 해군 함정, 그리고 민간 선박을 이용해 철수한 인원과 장비는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10만5천명, 차량 17만5천대, 화물 35만 톤에 이르렀고, 피난민이 9만 1천명에 달했습니다. 피난민들의 숫자에는 부모의 품에 안긴 영유아나 어린이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어선 등 민간 선박을 타고 넘어온 피난민들 숫자를 감안하면 1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7천6백 톤급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 4천명의 피난민을 빽빽이 싣고 철수하는데 성공해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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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뉴스위크는 흥남철수 작전(미군은 ‘철수’가 아니라 ‘병력재배치’를 뜻하는 ‘Redeployment’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만)을 일컬어 ‘진주만 이래 최대의 패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2차대전 초기의 던커크(Dunkirk) 철수작전에 비견되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도 있죠. 하지만 칼바람 불어 오던 부두에서 피붙이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기억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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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으며 서울 등 북한지역 주민들 40만 명이 대거 육로로 피난하였습니다. 전쟁이후 피난민은 120만에서 130만 명으로 추산 합니다.
1.4후퇴는 미군이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작전을 한것으로 흥남철수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당시193척에 군인 10만명. 북한민간인 10만명이 북한을 탈출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건 북한쪽 철수당시의 일이고 "(북한 장진호전투중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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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쪽 사정]
6.25당시는 여름이었고 한강물이 깊어 다리로 통과하여야 하는데 국군이 인민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을 폭파로 수도권시민이나 서울시민이 같혀 피난을 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몇몇 서울시민만이 한강쪽배를 얻어 타고 한강을 건넜을 뿐 서울시민의 발이 3개월 동안 묶여 있었다.
하지만 1.4 후퇴는 정부와 군이 작전상후퇴를 알려줬고 당시 겨울이라 한강이 얼어붙어 짐을 소달구지에 실고 혹을 어린이들을 등에 업고 한강을 건너 후퇴를 했습니다.
특히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사업가 .공산주의가 싫어서 젊은층. 등.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전쟁 중이라 통계를 낼 사람도 낼 엄두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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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시 인구는 백 만명으로 잡고 군/경. 가족. 사업가. 공무원. 공산주의가 싫어서 등.병자. 실종자. 남북자. 부산에서 자리 잡고 있는 시민. 등을 뺀 순수한 서울시민으로서 약 30만~40 만명 정도가 서울을 탈출 한 것입니다.
흥남부두
철수하는 LST미국 해병대의 군함을 얻어
타려고 몰려든 북한 피닌민들
철수(후퇴)하는 미국 군함을 타기위에
흥남 항구에 몰린 탈북 피란민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1950년 12월
흥남부두 철수는, 갑작스런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어선과 군함 105척에 군인 105,000여명과 피란민 100,000여명이 철수하는 대대적 작전이었다.
배에 실었든 탱크와 트렄등 무기를 다 바다에 버리고 우리 피란민을 구제한
미해병대의 인류애적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후퇴하는 UN군과 피난민의 북새통 장면들
UN군과 피난민14,000명을 태우고 떠난 마지막 군함은
흥남부두에 쌓여 있는 군수물자를 폭파했다,
흥남역을 출발한 마지막 열차가
부산을 향해 목메인 기적 소리를 울리며 칙칙폭폭
1950년 12월, 북한을 출발한 피난 열차는
무조건 남으로 남으로 달려야 했다.
1951년 1월 2일, 서울을 떠난 마지막 피란열차.
콩나물 시루같이 들어 찬 화차안이었고,
화차위에도 이렇게 피난민이 가득.
죽기 살기로 기어 올랐지만 너무 추워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기차위에서 얼어 죽고 또 떨어저 죽었다.
기적소리와 함께 흥남애서
부산까지 달리는 열차가 힘겨운듯 목메어
북한주민들의 탈북 피난은
고향을 버린 실향민으로 반세기가 넘어셨다.
1951년 1월 2일, 이렇게 마지막 열차는 서울역을 떠났다.
혹한의 겨울, 달리는 화차 위에서 얼어 죽고, 졸다가
터널에서 떨어저 죽고, 많은 피란민들이 죽었다.
이렇게 목숨을 내 걸고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
1950년 12월말~1월 4일 ----- 1.4후퇴.
중공군에게 서울을 다시 빼았기니
서울 시민은 또 다시 피란을 가야 했다.
서울 시민들은 얼어 붙은 한강을 건너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
군함과 마지막열차를 못탄 북한 피란민들은
그 추운 눈속의 겨울철에 이렇게 걸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을 수용할
암무런 능력도 없어서 항구와 역전에는 난민들이 마구 버려저 있다.
흥남부두의 배가 부산과 거제도에 도착하여 피란민들을 내려 놓았으나
판자집은 커녕 먹을 물도 모자라서.... 다리 밑에 진을 첬다.
그이름도 유명한 판잣집들
1953년 현인의 노래 "굳세야라 금순아" 현인이 불러 대구에서 시작된 노래다. 현인의 고향, 부산 영도다리에 가면 금순아 굳세어라를 부른 현인의 노래비가 서 있고 이 노래가 계속 나온다.
굳세여라 금순아
[출처] 원한 흥남 철수작전과 1.4후퇴|작성자 아름다움
그런데
내일(2014. 12. 19.)이
통진당 해산심판 선고기일
'진보당 해산심판' 헌재 주변서 보수·진보 격돌 예고 본문
전쟁군사무기군사전문가 미§⊙ㅹ⊙§르 SMC미리내 세계섹시여군특수부대 클릭☆
굳세어라 금순아
작사 작곡 / 박 시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 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 달만 외로이떴다.
철의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현인
1951년 1.4 후퇴 직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와 함께 전쟁으로 헤어진 血肉 금순이가 굳세게 잘 살아주길 바라는 심정이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의 "굳세어라 금순아" 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수이자, 부산이 낳은 "제1세대 가수"인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현란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유명한 현인은 불어, 중국어, 영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로, "굳세어라 금순아" 외에도 "비 내리는 고모령","고향만리",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베사메 무쵸" 등 1천여곡의 노래를 남긴 "국민 가수" 이다.
부산 영도에서 출생 현인은, 아버지 현 명근과 어머니 오 봉식의 2남 1녀 중 맏이로 1919년 12월 14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풍족했다.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초량의 영주 소학교로 옮겼으며,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 1931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영어와 일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학교 배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밴드부 활동을 통해 일본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고 한다.
현인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일본 여인과 재혼하자,
이에 상심해, 아버지가 권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현인은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을 포기하고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 - 현 도쿄예대) 성악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관립(官立) 우에노 음악학교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인 소프라노 윤 심덕, 바이올리니스트 홍 난파, 동요 작곡가 윤 극영 등 극소수의 조선인에게만 입학이 허용 될 정도로 조선의 음악 엘리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5개 국어 능수능란한 인텔리 가수... 그러나 음악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이니치신문 보급소에서 신문포장 일을 하는 등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재학 당시에는 음악이론보다는 재즈나 샹송을 좋아했으며, 방송국에 드나들며 최신 음악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4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성악교수가 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성보악극단의 음악교사가 된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황해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상하이와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악극단 활동을 했으며, 텐진의 클럽 "신태양" 에서 샹송 등 외국가요를 본격적으로 불렀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현인은 음악활동에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작곡가 박시춘과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미8군과 악극단을 오가며 활동하다 1947년 서울 명동 시공관(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영화 "자유부인" 개봉 축하공연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다.
그 자리에서 아직 음반 취입도 하지 않은 "신라의 달밤" 을 불러 "아홉 번 앙코르" 기록을 세웠다. 결국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을 취입곡으로 데뷔, 데뷔곡이 빅 히트를 한다.
이국적인 멜로디, 가수 특유의 부르르 떠는 창법 등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데뷔곡 "신라의 달밤" 의 인기를 몰아 1949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등장,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베사메 무쵸' 등을 번안해 노래함으로써,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1952년에는 "장밋빛 인생" 등을 불러 샹송 붐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으로 징용간 젊은이들의 망향을 그린 "고향만리",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사람들의 그리움을 노래한 "비 내리는 고모령", 전쟁 중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전우여 잘 자라" 등은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한 민족의 노래이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 준 희망의 노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현인은 부산에서 동아극장 은방울 악극단의 '은방울 쇼'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가수 남인수, 영화배우 황정자, 최은희 등과 활동을 함께 하는 한편, "현인과 그 악단" 을 만들어 무대에 오른다.
1952년에는 신청년 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 에 남인수, 김정구, 신카나리아, 이난영 등과 출연하기도 했다.
영도다리에 노래비와 동상, 1967년 문화공보부 공로상을 받았으며, 가수의 날 특별 공로대상(1996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대상(문화훈장·1999년) 등을 수상했으며, 2002년 4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는 현재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노래비는 가로 세로 각각 4m, 높이 3m로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형상과 음반 파도 음표와 함께 갈매기가 나는 모습으로, 노래비 앞에는 현인이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의 1.2m 동상이 세워져,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구 파크호텔 입구에 "비 내리는 고모령", 경주 불국사 앞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첫댓글 역사는 살아있는거라서!
후세에 전하는 교훈이 됩니다.
오늘은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네요~
우리 회원님들 항상 행복하시고
얼마남지않은 이한해도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에는 모두묘두 소원성취 하시길 바랍니다.
송덕 선생님!
꼭 상기하시기 바랍니다.일본의 만행이 그 얼마나 잔인하였는지? 일본의 実体입니다. 끔찍한 사진이 많으니 임산부와 심장이 약한 분은 주의가 필요 합니다.
ぜひ、想起して ください。日本の残虐行為がどのくらい残酷だったのか?日本の実体[じってい]です。恐ろしいの写真が多いので、母性的な、心臓の弱い方は注意が必要です.
http://cafe.daum.net/kokoin/EnOn/1
또다시 이 민족들이 그러한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시려면 꼭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이 민족들이 겪어야 했던 이러한 일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정의실천시민역사관 건립위원회 / 민족문제연구소
http://ibuild.tistory.com/
굳세어라 금순아 역사는 살아있어 뒤안길 상기해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