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지난날의 짧은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정보체제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방식에 대한 세밀한 묘사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 변화는 우리의 지각,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 우리의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우리는 소통과 정보에 도취하여 혼미한 상태다. 정보의 쓰나미가 파괴적인 힘들을 발휘한다. 어느새 그 쓰나미는 정치 분야마저 덮쳐 민주주의적 과정에 막대한 혼란과 장애를 유발한다. 민주주의가 인포크라시로 변질하고 있다.”(27쪽)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정보’를 키워드로 삼아 그린 사회적 초상을 담은 《정보의 지배》가 출간되었다. 그는 《투명사회》《심리정치》와 같은 저작부터 최근작인 《사물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정보의 현상학’을 천착하면서, 디지털 문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선보여왔다. 이번 책에서 한병철은 드디어 ‘정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우리가 매 순간 다루고 있거나 그것의 일부가 되고 있는 정보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특히 어떻게 민주주의적 과정에 거대한 균열을 내고 있는지를 밝힌다. 종족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강화하는 음모론, 정보 전쟁이 된 선거전, 이야기하지 않고 계산하는 빅데이터, 선동과 증오를 퍼트리는 소셜 봇과 댓글 부대, 바이러스적인 특성을 보이는 밈 등을 살펴보면서 말이다.
책의 주제이자 독일어판 원제이기도 한 ‘인포크라시(Infokratie)’는 저자가 새로이 발굴해 사용하는 개념어로, 정보체제 내에서 민주주의(Demokratie)를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지배 형태를 뜻한다. 본래 민주주의의 정치적 공론장 형성에는 책이라는 미디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중매체의 등장 이후 지배 형태는 텔레크라시와 씨어터크라시로 변질했으며, 여기에서 또 변화한 인포크라시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정보의 정치학에 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공론장의 구조변동과 의사소통행위에 관한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롯, 루소 · 니체 · 벤야민 · 푸코 · 아렌트 · 쇼샤나 주보프 · 해리 프랭크퍼트 등의 이론을 경유하여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정보체제는 우리의 감각과 인지를 어떻게 분열시키며
그것은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늘날의 정보체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지배 형태인 규율체제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생명정치적인 규율체제의 예속된 주체들은 억압적 권력에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지만, 심리정치적인 정보체제의 예속된 주체는 “자기가 자유롭고 진정성 있고 창조적이라고”(10쪽)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능동적 송신자다. 모든 사람이 항상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제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형태마저 띤 소통 도취가 사람들을 새로운 미성숙 상태에 가둔다.”(34쪽)
스마트폰과 인터넷과 SNS를 통해 다루어지는 정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의식의 차원에서부터 바꿔놓는데, 그 변화는 소통과 담론과 정치, 즉 민주주의적 과정들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35쪽) 또 정보의 이런 특성은 사실성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총체적 거짓말인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확산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는 종족주의와 정체성 정치의 강화로 이어진다.
정보체제에서 많은 시간을 거쳐 구성되는 ‘담론’이나 시간적 연속성을 창출하는 ‘이야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하지만 이 과정이 시간적 연속성만 와해시키는 것은 아니다. 주장은 반박될 가능성을 지닐 때만 소통적 합리성을 지니며 타인의 목소리가 있어야 비로소 나의 의견에도 담론성이 주어지는데, 정보체제는 반박가능성과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담론과 타당성 주장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과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기계적 계산을 통한 관리가 남는다.
“정치는 데이터 주도의 시스템 관리로 대체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정들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내려진다.”(69쪽) 하지만 정보에는 ‘방향 설정력’이 없다. “진실은 정보의 옳음 혹음 맞음 그 이상”(91쪽)인데 말이다. 소통적 합리성이 아니라 산술적 합리성을 지닌 인공지능으로 진실을 찾을 수는 없다. 인간이 챗 GPT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인공지능의 세기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희미해져가는 ‘진실을 향한 충동 · 의지 · 용기’와 ‘경청 능력’이 민주주의와 맺는 관계를 분석하며 그 실마리를 찾는다.
대립되는 두 개념과 낯선 비유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가
변증법적 논증과 문학적인 형식 속에서 고유한 빛을 발하는 철학적 사유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현상과 관련하여 대립되는 두 개념항을 설정하고 비교 · 대조를 통해 해당 현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측면을 탁월하게 포착해내고 있으며, 환유와 제유와 같은 비유와 묘사, 용어 분석 등을 통해 우리가 직 ·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언어화하기 어려웠던 현상에 대한 통찰을 준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대립항으로는 규율사회와 정보사회, 고립과 연결, 생명정치와 심리정치, 담론과 정보, 정치와 관리, 정당화와 계산, 정치인과 전문가(컴퓨터과학자), 소통적 합리성과 디지털 합리성, 이야기와 숫자, 거대서사와 빅데이터, 의견과 정체성, 행위와 소비, 손과 손가락 등이 있는데, 이 개념과 그 현상을 천천히 보는 과정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은 두 대립항의 절대적 구분과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이 개념항을 도구 삼아 변화와 차이 속에서 무엇이 지속되고 있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