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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한 수 산
1
차들은 밤에만 와서 섰다. 자디잔 자갈이 깔린 그 주차장으로 차들은 밤이면 쥐처럼 모여들었다. 주인은 차의 문을 잠그고 잠을 자러갔다. 낮의 주차장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백여 대의 차가 들어설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아침이면 그들은, 식후의 담배를 피워 물고 마치 남의 차를 몰래 훔쳐 달아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비가 내린다. 텅 빈 주차장에 빗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주차장 건너편의 숲은 어두웠다. 비에 젖고 있는 검은 숲은 음모 같았다. 가야하지 않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말에 대답을 할 사람을 그는 자신의 속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공항까지 두 시간,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서울은 거기에 있었다. 서울은 거리가 아니라 시간의 저편에 있었다.
빗물이 주차장에 남아 있는 차들의 차체를 번들거리게 하며 흘러내렸다. 주차장 입구의 자동판매기도 비에 젖은 모습이다. 그 위의 대형 광고판의 여자도 비를 맞고 있다. 예약을 하자. 그의 안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비를 맞고 있는 광고판 속의 여자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정확하게 석 달이야. 이건 지켜진 약속이야. 너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여기까지 왔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이냐. 전화가 온 것은 이른 아침 이었다. 빗소리에 섞여서 그는 아내가 받는 전화소리를 들었었다. 최명하 교수가 돌아가셨대요. 아내가 와서 그 말을 전했을 때, 그는 아 하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 그것은 놀라움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이 그의 이제 막 잠이 깨려는 의식을 흔들어놓았다. 놀라움은 슬픔으로 변했다가 다시 놀라움이 되었다. 석 달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석 달로 예견되었던 삶이었다. 최 교수님의 남은 시간은.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정확했다.
서울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한 채 그는 일어나서 욕실로 갔고, 머리를 감았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아침을 먹었고,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는 숲과 그 앞의 텅 빈 주차장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뱉어내면서, 이것으로 나는 내 예정된 삶에서 오 분쯤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창문에 커튼을 치고 돌아선 그는 천천히 책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책들을 정리해서 책꽂이의 제자리에 꽂았고 연필들을 연필꽂이에 꽂았고 종이들을 가지런히 해서 한옆에 밀어놓았으며 재떨이를 가져다 물기를 닦았다. 그때 그의 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건 죽음이군. 그는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이 책상. 깨끗이 정리된 책상. 이건 죽음이야.”
“그게 삶이지. 정리된 책상에는 네가 없어. 네가 걷는 시간도 거기에는 가라앉아 있을 뿐이야. 그게 죽음이야.”
“정리된 삶이 죽음이라니. 죽음이란 삶의 진행에서, 그 움직임이 멈추는 거야. 아무도 그 무엇도 정리하지 못해.”
그는 이마를 짚으며, 서울에 갈 때 있을 수 있는 일들을 헤아려보았다. 조문·눈물·지나가버린 날들의 아쉬움. 죽음 사람에 대한 기억들. 자기에게 맞게 변형된 추억을 하나씩 껴내 들고 나누는 속삭임들. 그리고 숨길 수 없이, 그 얼굴과 얼굴들에 드러나 기름처럼 번져가고 있을 안도감들. 아,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나는 아직 죽지 않았거든.
그 안의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죽음은 우편물 집배원이 아니다. 주소와 이름을 들고 찾아오지 않는다. 예정된 순서, 치러야 할 고통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다 그렇다. 깨끗이 정리된 책상을 손바닥으로 짚고 그는 일어섰다. 그는 그때 서울에는 가지 않을 것이며 조의(弔意) 전보를 치는 일마저도 하지 않으리라 결심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큰 것이, 그에게서 사라져갔다. 따뜻했던 움집 같은 것, 새들이 날아가 웅크리는 것 같은 것이. 이제 내가 다시 내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없듯이, 나는 다시 그런 사람을 내 시간 안에서 갖지 못하리라.
돌아서서 그는 집을 나서기 위해 현관으로 갔다. 세 개의 우산이 거기 있었다. 물방울무늬가 있는 푸른 우산, 검정 우산, 그리고 비닐 우산이었다. 그는 어떤 우산을 쓸까 잠시 생각했다. 바람이 불고 있으니까 비닐우산을 써서는 안 되겠지.
구두를 신으며 그는 집 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거기에서 자신이 놓아두고 나가는 다른 자기를 보았다. 그래, 잘했어. 바람이 부는 날은 비닐우산을 쓰지 말고, 길을 건널 때는 조심하고, 이런 날은 누구와도 약속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아. 그가 다가와 그의 등을 쳤다.
보라구. 이 세상은 여전히 처녀지야.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것도 여전하다구. 태초의 그날처럼 땅 위에는 삶이 가득하다는 걸 잊지 마. 하루하루는 아침 우유처럼 싱싱해.
2
영혼의 빛나는 발견 혹은 존재의 형식에 대한 이해, 그런 말들이 내 젊은 날의 노트에는 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어야 하는가를 나는 존재의 형식이라는 말로 썼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 영혼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 했으리라.
그 어떤 길목에서 나는 최명하 교수를 만났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뒤돌아볼 때 나는 언제나 우울했다. 거기에는 물론 나의 불성실도 얼마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낭비였다고, 대학 사 년이라는 시간을 내가 그렇게 말해버리는 이유는 그 기간 동안 대학의 도움으로 어떤 모습으로든, 발전이라는 것을 겪지 못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내가 그때 다른 학생들은 이미 다 떠나버렸을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다, 그것은 낭비였다. 덧없이 시간을 흘려버린, 아니 아무것도 흐르지 않고 머물러 썩어간 정체였다.
그 수렁에서 내가 최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누구나, 「애너벨리」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사랑은 특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별한 사랑이 무엇인가. 모든 사랑은 다 개인에 게 특별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일반적인 것이거늘.
나는 아직도 그 목소리의 부드러움까지도 잊지 않으며 기억한다. 문과대학 이 층에 있던 강의실이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어느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로 최 교수는 오후 강의를 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은 작가다. 그러나 토머스 울프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도전했었다. 위대한 실패라는 면에서 울프는 헤밍웨이보다 위대하다. 이 말은 동시대의 작가 가운데서 누가 위대한 미국 작가냐는 말에 대한 윌리엄 포크너의 대답이었다.”
미국문학사 시간이었다. 미국의 작가들 가운데는 유난히 알코올중독이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 말을 곁들이다가 최 교수는 말했었다.
“나는 이 세상을 둘로 나누라면 토머스 울프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싶다.”
그 말은 나에게 하나의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흑판과 책상과 교수라는 그것만으로 대학 교육이 시작되고 끝이 나던 그 무렵의 학교에서, 나는 그만큼 목말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머스 울프라는 그물을 들고, 인류를 둘로 나누다니.
낭만주의가 영국에서 어떻게 태동했는가를 들려주던 시간도 내 기억 속에는 살아 있다. 꿀벌이 잉잉거리는 어느 봄날의 들판처럼 그것은 아직도 나에게 푸르다.
낭만이라니. 우리가 흔히 한자어를 쓸 때의 그 낭만이라는 말. 어딘가 미숙하고 비합리적 이며 정서에 얽매이고 비과학적 이며 충동적인 행위의 냄새가 그 한자에는 있다. 그는 로멘티시즘의 건축을 이야기 했고 신비주의를 말했고 반합리성과 반고전주의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워즈워스의 시를 우리는 읽었다. 그 시간이 끝나갈 무렵 이었다. 최 교수는 흑판에 Plain Living, High Thinking 이라고 썼다.
그것은, 공자였고 맹자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산 영어 참고서 첫 장에, 소년들이여 희망을 가져라 하고 쓰여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평범한 생활, 고아한 사고. 아니면 생활은 평범하게 이상은 드높게…… 그런 말로 옮겨질 그런 경구를, 그 워즈워스의 말을 나는 하품을 하며 바라보았다.
그것은 입시생이 책상 앞에 ‘인내’라고 써 붙이거나 시골에서 통신강좌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누군가가 ‘성공’이라고 써 붙이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플레인 리빙, 하이 싱킹. 강의를 듣고 있는 어떤 녀석이 일기책 앞장에 저 말을 적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도 일기라는 것을 적는 녀석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강의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기를 매일 밤 적으며 보낼 녀석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내 동생의 모자를 통해서 배웠다.”
갑작스런 최 교수의 말이 나에게 날아와 낚싯바늘처럼 꽂혔다. 워즈워스를 동생의 모자를 통해서 배우다니.
“군에 가 있던 동생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때는 다 가난할 때였다. 나라도 가난했고 사람들도 가난했고 군대도 가난했다.”
다 가난했다는 최 교수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나도 가난했었고 우리 아버지도 가난했었다. 내 어린 시절의 동네 사람들도 다 가난했었다. 그때는 워즈워스도 가난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아는 학생은 알겠지만, 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람을 굵게 만드는 그 이라는 작은 벌레 말이다. DDT라는 것이 그 이를 죽이기 위해 요즘의 항생제만큼이나 유용한 약품이었을 시절의 이야기다. 군대에서 휴가를 온 동생에게 목욕을 하라고 옷을 갈아입히다 보니, 그애의 옷이 옷이 아니었어. 속옷을 보니 거의 실밥 자국이 보이지 않게 이가 가득하지 않겠냐. 이가 이렇게 꾄 옷을 입고 지내야 할 정도의 생활이라면, 그 애의 군대생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거의 분노 같은 게 치밀어 오르는 거였다. 차마 빨아서 입히
기에도 어렵게 때 묻고 이투성이인 속옷을 버리고 나서, 나는 그 애가 쓰고 온 모자를 들여다보았다. 까맣게 때가 묻은 그 모자 안쪽에 희미하게 써 있는 말이 있었다. 그것이 이 말, 플레인 리빙, 하이 싱킹이었다.”
그러고 나서 최 교수는 강의를 끝냈다. 나는 가슴속을 헤집고 무언가 덩어리 같은 것이 목을 아프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와 세상을 나누는 이분법으로 나에게 문학을 가르친 사람.
5
나무도 날아다닌다.
그날 아침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창밖에셔 너울거리고 있는 오동나무 잎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그 위에 얹혀서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은 가을날처럼 가벼워 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접니다.”
낯선 목소리에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그는 그 오동나무가 이제 여름을 지나고 나면 자신의 키만큼은 자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동나무는 풀처럼 자랐었다. 처음 그 나무가 집 마당으로 날아왔을 때,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모든 풀과 나무는 흙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풀이 아니면 나무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옮겨 심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무릎 높이로 자라 오른 나무가 잎을 틔우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그것이 오동나무인 줄 알았고, 오동나무의 열매도 민들레꽃처럼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것을 자르거나 뽑아내지 않고 기르리라 다짐 했었다. 그런 결심의 바닥에는, 나무도 날아다니는구나 하는 작은 놀라움이 있었다.
“절 아실까 모르겠어요. 대학에서 중급영어를 가르치던…… 박인희예요.”
그녀가 그가 다녔던 대학과 자신이 그곳 대학의 교수라면서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서른은 넘었을 것이며, 사회생활이라고 흔히 말하는 집안일이 아닌 세상 밖의 일에 꽤 단련되어 있으며,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저물어가는 봄날, 이제 이글거리며 다가올 여름날을 준비하며 나믓잎 위에서 너울거리고 있는 햇빛이 갑자기 자디잔 빛의 조각들이 되어 부서져 내렸다. 갑자기 모든 빛이 자디잘게 부서져서 떨어져 내리고 그 자리가 아무런 색깔도 부피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으로 남는 것을 그는 보았다.
“아, 이제 생각나세요? 네, 저예요. 그동안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 전 남편 따라 외국에 나갔다 오고 그러느라 주욱 학교에만 있지 못했어요. 실은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했는데…… 이런 애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최명하 교수님 아시지요? 물론 잘 아시는 사이인 거야 나도 알지만요…… 혹 교수님 소식 듣고 계시나 모르겠네요.”
박인희 교수의 목소리로 듣는 최명하라는 이름이 갑자기 그의 가슴속에서 징소리같이 두웅 하고 울렸다. 비로소 하나씩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랬다, 박인희 교수는 모교의 교수였고 그는 한 학기 그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중급영어라는 교과목의 그 강좌는 영미 작가들의 단편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외교관이었다는 것, 강의를 하던 무렵의 그녀는 매우 젊었다는 것, 그리고 몇 번인가 최명하 교수가 있는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지 않았던가 하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최명하. 그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며 물었다.
“무슨 소식인가요?”
“그러셨군요. 모르시지 않나 생각했어요.”
최명하라는 이름. 따뜻하게 아주 따뜻하게 달구어진 돌처럼 언제나 가슴속에 포개져 있던 이름. 그러나 그는 그분을 만난 지 또 해를 넘기고 있었다.
“입원하신 건 아시지요?” :
“입원을 하셨습니까? 언제요?”
그렇게 해서 박 교수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지난해에도 입원을 했었고 큰 수술을 받았으며, 그동안 많이 아프셨다는 이야기들을 그녀는 그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확인해가는 방법으로 그에게 알려주었다.
“수술하신 거 모르시죠? 지난해 입원하셨던 거 모르시죠?” 그녀가 말했다.
“오늘부터 항암 치료에 들어가세요.”
“항암……이라면?”
“네. 지난해 받으신 수술이 암이셨어요.”
갑자기 방 안의 무엇인가가 솨아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와 어깨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선생님을 스쳐갔구나.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모른 채 나는 어딘가로 도망쳐 있었구나. 이제 창밖에는 햇빛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희고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오늘부터 항암 치료에 들어가시는데, 교수님이 참 보고 싶어 하세요. 어제저녁 병원엘 갔는데도 얘길 하시는 거예요. 다른 분들이 소식을 알리겠지 하다가…… 전화하는 거예요.”
차갑고 투명한 얼음 하나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지난달이었다. 그는 왜 내가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나 하는 절박함에 의구심을 숨기지 못하면서 최명하 교수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것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던 연재에세이였다. 그 산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의 순서로도, 그가 가지고 있던 전체적인 구성으로도 그때는 최명하 교수의 이야기가 나올 순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도 모를 이상한 힘에 이끌리며 두 회에 걸쳐 최 교수의 이야기를 썼었다. 살아온 이야기가 끝나면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동안 만
났던 사람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이 그 산문의 구성이었다. 이제 그 산문은 자신이 자란 자연과 사회라는 환경의 이야기가 끝나고 시간 속에서 그의 날들이 어떻게 굴절되었나를 다루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몇 회 후가 되어야 했을 텐데도 그는 최명하 교수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 회분의 끝부분이 실린 잡지가 나온 게 십여 일 전이었다. 그때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이란,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런 말밖에 더 있으랴. 항암……이라니. 이 소식이 그 스스로도 알 수 없던 절박함에 대한 대답이란 말인가.
“시간 있으시면, 한번 찾아가보세요. 교수님 이 좋아할 거예요.”
박인희 씨의 그런 말이 그에게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번 찾아간다는 표현이 용납될 수 없는 부피를 가지고 최명하라는 이름으로 그를 내리눌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오면서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크고 부드러운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은요, 신관이에요. 웅급실 있는 쪽을 지나서 가면 있는 E동인데 7층이 에요.”
손에 집히는 대로 읽고 있던 잡지의 표지에 병실 번호를 적었다.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로 가 뵙겠습니다.”
창밖에는 유리관 저편처럼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속에서 나뭇잎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햇빛은 어디로 갔는가. 문득 그는 배반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떠오른 말이었다. 무언가 엄청난, 회복될 수 없는 배반이 그에게서 자라 있었다. 나무 하나가 내 뜰에 와 뿌리를 내려 잎을 틔우며 자라듯이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왔고 그와 같은 높이와 굵기를 가지면서 배반이라고 뉘우쳐져야 할 나무 하나가 또 그렇게 자랐던 것이 아닌가.
두 개의 나무가 창밖에서 너울거리는 오동나무 옆에 우뚝우뚝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무것도 내다볼 수 없었다.
4
“병명은 뭔가요?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나는 물었었다.
“암이에요. 췌장암. 그런데 그 주위로까지 번졌다고 해요.”
아, 하느님. 나는 누군가라토 부르고 싶었다.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두세 달 전부터 아프시기 시작했어요. 수술 후에는 괜찮으셨죠. 학회에서 세미나도 준비하시고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고통이 시작된 게, 한 달 전부터는 진통제를 쓰기 시작할 정도로 심해지셨어요. 수술 끝나고 나서 회복이 되시니까 좀 쉬셔야 하는데 무리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번졌다는 얘기 예요.”
주치의를 만났던 이야기를 박 교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용어를 섞어가며 말했었다. 항암 치료라는 게 뭔가. 암은 잘라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암의 전부였다.
“투약을 시작하면 혼수상태가 되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걸 이겨내야 되는데…… 의사 이야기로는 교수님 경우는 오십 대 오십이라고 해요.”
“못 이겨내시면요? 그건 의사가 아니라 몸이 해내야 할 일 아닙니까.”
“결국은 몸이 의지죠. 삼 개월이래요. 한계가. 항암 치료가 효과가 없을 때 사실 수 있는 건 삼 개월이란 이야기지요. 그러면서도 의사는 오십 대 오십이라고 해요.”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향해서 욕을 퍼붓고 있었다. 이건 게임도 아니다. 이런 식의 반칙이 어디 있느냐. 적어도 그것이 무엇이든, 준비하고 정리하고 치러낼 시간은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 세상에는 재기 한다는 말까지도 있지 않느냐.
“베토벤 좋아하시는 거 아시죠? 선생님이.”
박 교수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삼 개월이 남아 있는데, 겨우 삼 개월인 데 베토벤이라니.
“선생님 이 그러세요. 베토벤을 들을 수 있고, 울 수도 있는 그렇게 맑은 정신으로 죽고 싶다고 말이에요. 선생님도 이젠 자신에 대해서 아시는 거 같아요. 암이라는 건 알리지 않았었거든요. 전번 수술에서도 말이에요.”
5
나는 그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나에게 어떤 무형의 것이었다. 그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람들의 관계란 대개 일반적이고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이란 거기에 특별한 의미, 그 만남을 위한 어떤 의식적인 자아도 끼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학생과 선생으로 이루어지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인 내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그를 만났다는 데에는 아무런 특수성이 없다.
우연이란 것도 그렇다. 우리의 만남이란 더없이 흔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한 학기가 거의 다 지나갈 때까지 나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로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그만큼 그의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의 눈만이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그랬었다.
나는 그를 교수님이라고 불렀었다. 교수님. 그러나 나는 이 호칭에 한 번도 개인적인 애정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직업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대학사회에서 그것은 때때로 직위로 통용된다. 강사 다음의 조교수 다음의 부교수 다음에 있는 대학선생의 자리.
어디서부터 사람들은 그의 직업과 인격을 동일시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가늠하는 자는 무엇일까. 수위라든가 청소원이라든가 하는 직업만이 아니다. 조각가라든가 성악가같이 그 직업에 집가(家) 자가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에 성을 붙여서 부르지 않는다. 김 수위, 박 청소원, 정 조각가, 최 성악가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도 예의도 아니다. 어딘가에서부터 그것은 깨어지고, 사람들은 불러댄다. 김 변호사님, 최 목사님, 조 기자님.
그를 최 교수님이라고 부를 때, 나는 그의 성 뒤에 오는 교수라는 명사가 직업을 말하는 것인지 직위를 일컫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그것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가르친다는 일이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변혁이나 성장을 가져다주는 힘을 잃어버려 가던,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대는 그런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그 말을 묻지 않았었다. 그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의 영어시간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대학 영문과에서, 그는 영미 시와 문학사를 가르치는 교수였고 나는 학생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가르쳤고 나는 열등한 학생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다감했으나 나는 학회실이나 연구실에 찾아가본 기억도 없다. 그는 여럿 속에 함께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어쩌다 나는 생각하곤 했다. 저분은 누구를 가르치며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너무도 다면체였다. 그는 선이나 면 혹은 형태에 대해 선험적*일 정도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소리에 얼마나 강했던가. 그는 호안 미로의 그림을 음악으로 이야기했고,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형태로 말하곤 했었다. 그는 슬픔을 웃음으로 환치시키는 미다스의 손을 가졌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기쁨을 말할 때면 언제나 가슴이 눅눅해지곤 했었다. 그가 했던 영문학사 백이십 분 강의는 마치 써가지고 온 원고를 읽듯 정연했었다.
그가 종교를 가질 수 없으리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었다. 그는 너무나 만화가였고 건축가였고 귀가 열려 있는 음악 애호가였고 화가였고 때로는 전방부대의 소대장이었고 혁명가였고 파계한 수두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종교를 가질 수 있으랴. 종교는 단순성이거늘.
내가 그에게 묻지 못한 것 가운데 하나가 또 있다. 그는 아마 연애라는 것을 해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 시정(市井)의 연애라는 것 ― 조금의 거짓과 조금의 소유욕과 조금의 무책임과 조금의 자기기만과 조금의 욕정과 조금의 보상심리가 겹쳐져서 만들어내는 진실이란 이름의 거대한 수렁, 어떻게 그가 그런 곳에 빠져들 수 있었으랴. 그는 어떻게도 자신을 내던질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는 아마도 종교를 가졌었으리라, 누구보다도 뜨겁고 견고하게. 그는 참혹한 연애에도 스스로 족쇄를 채웠었으리라. 그는 아마 스스로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부를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6
말하고 느끼고 주장하고 슬퍼하면서 용서하고 나누어주고 함께하면서 기쁨을 아는―밥을 먹고 걷고 손을 잡으며 사는 그 사람을, 인체의 한 기관과 기관이 불가해*의 신비로 묶여져서 그의 행위를 만들어내는, 그 인간을 각 기관으로 제각각 떼어놓는다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어렸을 때 읽었던 슈바이처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원시림에 사는 환자들은 슈바이처에게 찾아와 말했다. 저는 삼겹살이 아픈데다가 어쩐지 제 양지머리에도 병이 든 거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푸줏간의 고기처럼 말했었다.
우리 피 속의 소금기는 바다의 소금기와 그 짜기가 같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바닷물일 수 없다.
강의실에서였다. 오월이었고 아직 푸르기보다는 더 많은 갈색으로 뒤덮여 있는 잔디밭에서 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가 가늘게 강의실 안으로 새어들었다. 우리는 T. S. 엘리엇의 시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었고 해부였다. 우리는 그 시를, 허파와 간과 심줄과 늑골을 각각 끄집어내어 무게를 달고 색깔을 들여다보고 어떤 기능을 가지는가를 관찰하고 있었다. 영시 해부학 교실은 지루했고 졸음이 우리들의 메스를 든 손을 감싸고 있었다. 창밖에 모여 앉아 노래를 하고 있는 녀석들을 저주하며, 차라리 나는 그들이 더 좀 크게 노래하기를 바랐다. 우리들의 메스를 든 손이 잠이 깰 정도로.
그때 그가 말했다.
“나는 최소한 하루에 두 개 이상 사과를 먹는다.”
그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엘리엇을 자르고 있던 메스를 든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시의 주인공은, 결국 ‘나는 인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왔노라’ 하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저런 세상일로 허비한 자신의 시간을, 커피 스푼으로 설탕이나 뜨는 걸로 이야기하고 있거든.”
사과라는 말과 커피 스푼으로 되질한 인생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인가. 어느 성급한 녀석이 있어, 사과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하고 묻지도 않았고, 교수님은 무슨 사과를 좋아하시는데요. 국광인가요 후지인가요 하고 실없이 묻지도 않았다.
“내가 하루에 두 개씩 사과를 먹었다면, 보자, 나는 도대체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사과를 먹어치웠다는 얘기가 되지? 이 주인공이 커피 스푼질이나 하며 일생을 보냈다면…… 아마 나는 사과나 씹으며 보냈노라 해야 하겠지.”
나는 웃었다. 사과나 씹으며 보낸 인생, 그가 그렇게 어석어석 씹어 삼켰을 몇 트럭의 사과. 사과. 사과. 강의실 뒤쪽 창가에서 내가 킬킬거렸고 이어서 많은 여학생과 몇 명의 남학생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종로 5가에서 인삼장사를 하는 집 아들인 옆의 녀석이 내게 물었다.
“왜 웃니? 사과가 어쨌다는 건데?”
창밖의 기타소리가 사라지고 우리들이 다시 엘리엇의 허파와 심장과 발톱까지를 도려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가 말했다.
“강의를 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킬킬거리며 따라 웃는 학생이 있고, 조금 있다가 웃는 학생이 있고 나중에 옆의 녀석에게 물어보고 웃는 학생이 있어.”
나는 그를 향해 킬킬거리면서 그렇게 돌 하나씩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던져놓은 돌들이 다리가 되어 다음에는 물을 막으며 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잠을 잘 수는 없다.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함께할 수 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웃을 수 있다. 사랑도 함께한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잠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이다. 물 위에 홀로 솟아오른 땅의 이름 그것이 섬이다. 우리는 혼자다. 그 무엇도 함께 할 수 있지만 잠이 들 때는 각자로 돌아가 혼자여야 한다. 하나의 섬에서 다른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뱃길이 필요하다. 섬은 움직일 수 없다. 배가 그들을 이어준다. 그러나 그 길은 물 위의 길이다. 지도에만 있는 길을 배는 오고 간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물 위의 길, 뱃길은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 아무런 영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 학기, 엘리엇의 해부학 교실이 끝나던 때였다. 우리는 이글거리는 여름을 창 안팎에 놓고 시험을 치렀다. 이제 교실 밖의 잔디는 충분히 푸르게 변해 있었다.
엘리엇의 시를 살갗과 근육과 뼈와 내장으로 갈라낸 녀석들이 하나 둘 시험지를 내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무딘 메스에 엉긴 피를 닦아내고 나서 시험지를 들고 교탁 앞으로 나아갔다. 강의실에는 반쯤의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B를 바라면서 C여도 좋을 시험지를 교탁 위에 놓았다. 그때 그가 물었다.
“너, 그 수산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냐?”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좀 무식했냐?”
“아, 아뇨.”
“거짓말 마, 임마. 얼마나 무식했으면 그렇게 쉬운 한자만 갖다 붙였겠냐.”
밖은 여름이었다. 드문드문 교정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와 같았다. 햇빛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난 자리에 남아 있는 불티같았다. 나는 웃었다. 세상의 원칙이란 질서를 위한 약속일 뿐이다. 세로의 형태가 가로의 꼴로 바뀔 때 필요한 것은 원칙이 아니다. 두 곳에 적용될 수 있는 질서일 뿐이다. 나는 웃었다. 내 이름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니. 사학과의 조교 하나가 더위에 땀을 흘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자식이 더위를 먹었나. 웃기는.
그렇게 해서 그는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는 휴식이었고 종교였고 나에게서 권력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추악하지 않은 권력이었다.
때때로 그리고 그 후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나는 그에게 안겨 쉬었으며 그로부터 엄정한 계율의 질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힘이었다.
7
한강을 건넌 차가 청량리로 들어섰을 때 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였다. 종합병원의 까다로운 면회시간을 생각하면서도 그는 차를 빨리 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시간이 늦어져서 면회시간에 대지 못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그의 두려움을 조금 부축했다. 이런 식으로의 참담한 만남을 치러내야 한다 해도 최 교수를 만난다는 것은 기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집을 나오기는 했었다. 그리고 그는 기뻤다. 그것은 최 교수의 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데 대한 기쁨이었다. 은사와의 오랜
헤어짐 끝에 그를 만나러 찾아간다는 것이 그 은사의 병보다도 기쁘게 다가오는 데 대해 그도 처음에는 놀랐었다.
그러나 차가 한강을 건너가서 청량리로 진입하기 위해 차선마저 헝클어져 있는 혼잡 속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세 개의 염려와 일곱 개의 기쁨으로 집을 나왔다면 한강을 건너며 그것은 여섯 개의 고통과 네 개의 간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항암이란 말도 또한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항암제의 그 항(抗) 자를 너무 믿었던 아침을 떠올렸다. 암에 저항하는 내성을 기르는 치료라면, 그런 치료가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암이라는 것에 그만큼 지배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가. 지난해의 큰 수술이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한 번의 수술이 도려낼 수 없었던 운명이란 무엇인가. 수술이란 매매나 이혼이나 합격 같은 용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다시 돌이키거나 이의가 없는 일회성의 완결은 아니었던가. 어떤 운명이 수술의 폐허를 헤집고 다시 씨를 뿌렸는가. 그의 육체는 그다지도 기름졌던가. 이제 교수님은 ……돌아가신다는 말인가.
클랙슨이 다급하게 울리면서 바로 위에서 그 순간 쇳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소리쳤다.
“운전 똑똑히 해, 이 새끼야.”
그는 놀라 브레이크를 밟으며 목소리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트럭 운전수였다. 그가 눌러쓴 모자 밑으로 길고 더러운 머리카락이 내려와 귀를 덮고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가 미안하다고 손을 저어 보였다. 트럭 운전수는 재판정의 판사처럼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만화 속의 악한 같은 얼굴을 했다. 차선을 바로잡으며 그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눈에 익은 거리가 또 그만큼 낯설게 늘어난 건물들과 함께 다가서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는 이곳에 와보는 일이 헤아리기도 어렵게 오래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몇 번, 그나마 최근에는 이쪽으로 와볼 일이 없던 그였다. 최 교수는 모교의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학교 정문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길가에 세워져 있는 몇 대의 전경호송차량을 보았다. 학교에서 오늘 시위가 있을 모양이구나. 길이 막히기 전에 병원을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문 옆을 돌아 대학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쯤에 그는 또 달라져 있었다. 여섯 개의 고통과 네 개의 간절함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일곱 개의 고통과 세 개의 절망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치 무슨 민원사항을 가지고 관공서를 찾아온 사람처럼 화를 대면서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시위로 하여 길이 막혀도, 그가 병원에 하투 종일 갇혀 있어도, 면회시간이 지나서 저녁까지 기다려도 좋다는 식으로 조금씩 자신을 포기해갔다.
신관을 찾아가며 그는 소아과 앞을 지나쳤다. 그는 그곳이 산부인과가 아닌데도, 사람은 결국 병원에서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하는구나 하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옆에는 정형외과에 입원해 있는 게 분명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석고붕대를 한 다리를 대포처럼 앞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그의 아내는 몹시 지쳐 보였는데도 환자인 그는 머리를 깨끗이 감아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는 대포의 뒤를 따라가듯 다리를 치켜든 환자를 따라 엘리베이 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음을 알았다. 병원 앞에 오면, 문병객을 위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는 거기서 과窪크 이든 꽃이든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늘렀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멎었다. 시위 때묻이었어. 골목에 진을 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차가 막히거나 병원 진입로가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엉망이 되어버린 거야. 그는 묵묵히 구두 끝을 내려다보며 5층 복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최 교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가 진료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환자들을 보면 어쩐지 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환자로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그것은 노인을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노인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장례식 엘 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거기서 죽음은 사라진다. 죽은 사람은 지금 자기만의 특수한 체험을 치르는 중일 뿐이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실감하지 못한다. 그는 늘 그랬었다.
내려가는 옐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과일을 사러 가는 일도 최 교수를 만나는 일도 그는 다 포기하고 싶었다. 자기가 느끼고 있는 슬픔이나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상실감도 그리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와서 자신을 내리누르기 시작한 운명의 손길, 최 교수와 자신을 얽어맨 그 줄마저도 그는 다 포기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3. 2. 1. 그런 숫자에 불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엘리베이터는 내려갔다. 간호원 둘이 뒷굽이 넓은 구듯발소리를 울리며 그의 뒤를 지나쳐 갔다. 목소리만이 남았다.
“어머, 얘는. 등산 가서 만난 남자를 뭐 시내에서 또 만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러니.”
8
한쪽 팔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최 교수는 병상 옆에 놓여 있는 사물함의 서랍을 열었다. 그가 꺼내 드는 담배를 나는 놀라며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피우셔도?”
“여기 누워서 담배 피우는 자유도 없으면 어떻게 하냐. 자네도 피워.”
나는 선생님께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드렸다. 담배를 끊는 거야 얼마나 쉬운 일이냐, 나는 평생 담배를 수백 번도 더 끊었다. 그런 유쾌한 말을 한 흡연론자의 말을 들려준 이도 선생님이었다. 조금 여위긴 했지만 그것은 그분이 입고 있는 환자 가운 때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선생님은 여전했다. 오히려 그의 조금 마른 듯한 얼굴이 보기 좋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 쉬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병은 그의 어디에 숨어 있는가. 나는 선생님의 병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 유혹의 탈을 쓴 속삭임처럼 생각
되었다.
“그래 박 교수가 전화를 했어? 그런 짓들 하지 말라고 했는데.”
“교수님이 절 보고 싶어 한다기에 왔지요.”
나는 아주 작아져서 조그맣게 웃었다. 벌레 하나씩을 눈 위에 붙여놓은 것 같은 그의 짙고 두터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연기의 맛을 보듯이 그는 조금씩 연기를 빨아들이며 담배를 피웠다.
“그래, 며칠 전에는 김선영이가 전화를 했어. 네가 내 이야길 쓴 게 있다면서 말야. 그래서 뭐라고 썼드냐고 물었지. 옛날 자기 얘기도 거기 들어 있다더군. 자기를 미모의 신인이라고 썼다기에 그건 한 아무개가 잘 봤다 그랬지. 그러곤 또, 글을 쓰는 것보다는 물장사로 나가는 게 더 낫겠다고 썼다기에, 그것도 진실인 것 같다고 했지. 김선영이 말이 재미있어. 그때 자네 말처럼 물장사나 나갔으면 좋았을걸, 이제 애가 둘이나 있는 여편네가 됐으니 어쩌느냐더라.”
김선영은 대학 후배인 소설가였다. 언젠가 최 교수님 댁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고 그때 나는 몹시 취해서 그 후배에게 물장사 운운하는 망발을 했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삽화를 곁들였는데 김선영이 그것을 읽었나보았다.
“그 전화를 받고 내가 그랬지. 한수산이도 이제 큰일 났구나. 내 이야기까지 써서 글로 팔아먹고 있으니, 아마 그 녀석이 상상력의 고갈이 왔나보다.”
나는 선생님의 팔로 끊임없이 떨어져 들어가고 있는 링거 병의 방울들을 바라보면서, 네 그런가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상상력의 고갈이라는 게 작가들에게 자꾸 술을 마시게 만들지. 너는 어떻냐 요즘?”
“많이 마십니다.”
“청탁불문, 소주 양주…… 아직도 그렇게 마시니?”
“상상력의 고갈인가봅니다.”
“그만 마셔라 이제. 할 일이 늘 많나보던데.”
“헤밍웨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상상력의 고갈이 술을 마시게 하지는 않지만, 지나친 술은 상상력에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우리는 아무도 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링거가 다해가고 있었다. 담배를 서랍에 집어넣으며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야단맞을라.”
선생님이 인터폰을 늘러 간호원을 불렀을 때야, 나는 야단맞는다는 말이 간호원을 두고 한 말임을 알았다. 다 맞은 주사를 거두고 새로운 링거를 꽂아놓고 간호원이 나갔을 때 최 교수가 말했다.
“난 평생 제복 입은 사람이 무섭더라. 간호원도 그래. 그 옷에서 이상한 힘이 나와. 그게, 옷이 아니라 상징이거든.”
선생님은 마치 이 병상 위에서의 시간들을 즐기고 있는 표정이었다. 간호원이 무섭다는 말도 그랬다. 주사를 갈아 끼우던 간호원이, 아프시죠? 하고 덤덤히 물었을 때도 선생님은, 간호원들이 저마다 들어와서 아프죠? 아프죠? 해대니까 안 아프다가도 참 이 주사가 아픈 주사라지 하게 돼요, 하며 길게 말했었다. 그것마저도, 선생님은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했다.
나는 들고 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쓰고 있던 긴 소설의 세 번째 권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홉 권으로 계획하고 있었고, 이제 그 세 번째 권이 책으로 나왔던 것이다. 집에서 서명을 해가지고 온 책을 받아 든 선생님에게 내가 말했다.
“세 번째 권이 마악 나왔습니다.”
책을 넘겨보며 최 교수가 클클거리며 길게 웃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었다.
“그래 고맙네. 네가 보내준 두 권은 읽었지. 야 그러고 보니까 너도참 촌놈이더구나. 그렇게 지독한 산골에서 살았냐?”
그 소설의 이야기는 강원도의 내설악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삶의 터전으로 볼 때 도시는 도금된 곳이야. 원형이 아니지. 인간 존재랄까 혹은 삶의 방식의 원형이 오히려 시골에 오래 남아 있어. 그래서 그것이 뛰어난 소재가 될 수도 있는 거지.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 컨트리라는 것도 그런 존재의 원형 이거든.”
그때 손님들이 우르르 병실로 들어왔다. 두 여자분과 최 교수의 둘째아들이었다. 그중의 여자분이 대뜸 말했다.
“사람이 왜 이래. 또 들어와 누워 있어. 나잇값을 해야지.”
병실 뒤쪽에 서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칠 층의 높이 때문에 창밖으로는 건물의 지붕 몇 개가 바라보일 뿐이었다. 그들이 이제 마악 공항에 내려 병원으로 왔으며, 여자분 중의 한 분이 최 교수의 누이라는 그런 것들이 이야기 속에 드러났다. 집에 가서 짐이나 우선 풀고 좀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이 나갔을 때였다. 봄날의 안개처럼 가슴 밑바닥을 기어 나와 깔리는 것이 있었다. 미국에서 누님 이 날아올 정도로 선생님의 병은 지금 무겁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마술사의 손에 홀리듯 나는 최 교수의 그 유쾌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누이가 병실을 나가자, 최 교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꺼내 물었고 나는 또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그가 여전히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내 누님이야. 미국에서 삼십 년을 살고 있는데도 저렇다니까. 전혀 미국에 사는 사람 같지가 않아. 나보다도 더 한국 사람이야.”
선생님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해에 아주 큰 수술을 했어. 다 잘라냈지. 난 아파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췌장, 위…… 다 잘라내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 상태야. 의학이 자르고 떼어내는 건 잘하는데. 살아나는 건 의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몫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회복이 안 되나 모르겠어.”
물이 한 방울씩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선생님의 혈관 속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는 링거액이 목소리가 되어 새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다시 입원을 하면서 주치의를 만나 물었어. 수술이 뭐가 잘못되었던 거냐. 의사 이야기는, 수술은 퍼펙트했다는 거야. 퍼펙트했는데 왜 다시 입원을 해야 하느냐.”
선생님의 담배를 받아 나는 주스를 담았던 종이컵에 껐다.
“다시 입원은 했는데 간호원들이 자꾸, 주사가 아플 거라고 하는 거야. 주사는 원래 아픈 건데 뭘 그러냐며 있었는데, 오늘부터 맞는 건 많이 힘들 거라고까지 해. 그래서 병원의 실장 하는 친구에게 여기서 전화를 했어. 야, 그 내가 내일부터 맞는 주사가 많이 아프다면서? 힘들다던데 무슨 주사인데들 그러냐? 그런데 이 친구가 쉽게 대답을 하는 거야. 아프지, 힘들지, 항암제니까.”
어제, 그러니까 어제 겨우 선생님은 자신의 병이 암이었다눋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도 친구가 무심하게 내던진 말을 통해서였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암이었다니. 그걸 알고 나니까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어. 2시에 잠이 깼는데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어.”
쓸쓸함이란 무엇인가. 고독인가. 절대의 고독. 아니면 비애의 감정인가. 고통도 쓸쓸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쓸쓸함의 고통.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드넓은 심상, 지금의 이 쓸쓸함이란 말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시간, 자기 삶의 예정된 진행을 눈치 챈 사람의 가슴이 아닐까. 비로소 홀로 있음을 안 사람의 마음의 들판.
선생님 의 목소리가 아주 유쾌하게 다가왔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이 건물 맨 밑이 응급실이고 그 옆이 영안실이야, 그게 보여. 여기가 칠 층이니까 만약을 위해서 십 층쯤 올라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바로 그 앞이 응급실이고 옆은 영안실이니까, 순서대로 운반하기도 쉬울 테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도 그렇게 쓸쓸한 거야.”
9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다. 햇빛이 그 위에서 부서진다. 물빛은 푸르지도 검지도 않다. 강 건너편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대형 중장비들이 움직임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
주차장을 걸어 나온 그는 선착장 건물로 다가갔다. 유람선 회사에서 틀어대는 음악이 귀에 따갑다. 왜 여길 왔지?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여길 왔지? 하고 바꾸어본다.
선착장 건물 삼 층으로 그는 걸어 올라갔다. 강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주스 한 잔과 커퍼 한 잔을 샀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고 목이 말랐으나 물이 없었다. 햇빛을 등지고 앉아 그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여의도까지 가는 배가 출항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따귀를 때리듯 다가왔다. 여자의 목소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감사합니다를 외쳐댔다. 삶은 감사하는 나날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 없다.
그의 손에서 다 마신 종이 주스컵이 구겨져 나갔다. 담배도 안 피우셨는데…… 입원하시면서 피우시는 거예요. 최 교수의 둘째아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아주 불안해하세요. 자주 좀 와주세요. 아무 데도 아버지를 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아들은 또 말했었다. 그에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따로 적어주면서 그는 말했었다. 위암도 그렇고 췌장도 그렇고 몹시 아프실 텐데, 가족이 힘을 내셔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 말을 했던 그 태연한 얼굴의 사내가 탁자 맞은편의 빈 비닐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일어섰고, 사내는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 컵의 주스를 사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아흡 권까지 써야 할 책입니다. 이제 겨우 세 권이 끝났습니다. 빨리 건강해지셔서, 지켜봐주셔 야지요. 병실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던 자신을 그는 또 떠올렸다. 앞자리에 그 사내가 앉아 있었다. 햇빛이 탁자 위에 만들고 있는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넌 계꾼이야. 계꾼이 낙찰계 일 년짜리 끝나면 한 해가 간다고 말하듯 너는 책 숫자를 가지고 세월을 계산하는 거냐. 앞자리의 사내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삶. 그는 소리 내어 그 말을 중얼거렸다. 삶.
배가 떠나고 있었다. 여의도로 향해 가는 유람선이었다. 배 위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뱃전에 서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선착장 매표소와 주차장에 늘어선 차들이 햇빛 속에 정 물화 같았다. 선착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젊은 남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강을 등지고 선 여자를 향해 삼각대 위의 카메라 셔터를 그千른 남자가 뛰어왔다. 잠시 아무 움직임도 없이 남녀는 서 있었다. 사진이 찍혔는가,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으며 깡충깡충 뛰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속에서 그들의 웃는 모습이 햇빛에 부서져갔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누가 있어, 나에게 가르치고, 감화를 주고, 아낌을 받으랴. 그는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눈물을 가리기 위해 그는 그것을 썼다. 선생님의 아픔에 동참할 그 무엇도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제 혼자가 되어가는 것도 자신임을 그는 알았다. 갑자기 닥쳐온 죽음에 대한 실감조차 Ξι것이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에 던져진 갑작스런 공포라는 것도 그는 알았다.
그는 울었다. 덧없이, 덧없이 울었다.
10
인도 여행에서였다. 옛 왕조의 자취는 델리의 성 벽에 남아 있었다. 땅을 지배한 권력은, 어디에서나 같다. 하늘을 향해 구조물을 올린다. 웅장한 대리석 의 성 벽을 걸으며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무위(無爲)한 행위에 빠져 드는 것인가. 불멸의 그 무엇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무위 ―부나비가 불올 찾아 날아들어서 제 몸을 태우며 죽어가듯, 우리들 또한 그런 허무의 불에 우리들의 시간을 태워 가는 것인가.
그 성벽을 거닐다가 붉은 대리석이 삭아서 작은 모래알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었다. 풍화(風化)였다. 바람이 불자 대리석 성벽에서 자디잔 모래들이 흘러내렸다. 삭아서 모래가 되어 흘러내리는 대리석, 그 붉은 가루들.
최 교수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인도에서 만났던 그 거대한 성벽의 풍화를 떠올렸다. 그의 쇠약을 확인하며 나는 그의 몸에서 떠나가고 있는 영육의 모래알을, 그 풍화를 보아야 했다. 하루는 다리에서 하루는 팔에서 그렇게 우리를 살아 있게 하던 그 무엇이 떠나가고 있었다.
항암제 투여가 끝나면 그는 집으로 퇴원을 했다. 박인희 교수에게 이따금 전화를 해서,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차츰 그의 병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찾아갔을 때도 나는 그분의 병이 어디쯤 와 있는가를 묻지 못했다. 자신의 병이나 치료과정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그도 마찬가지 였다.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래요.”
박 교수에게서 그런 말을 전해 들으면서도, 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게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배가 부르다든가 속이 메슥거린다든가 아니면 가슴이 저린다든가 하는 어떤 종류의 느낌도 그 말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암이라고. 하는 것도 세포였던가 싶었고 임파선이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열차 이름 같았다.
“방사선 치료를 안 받으시겠다고 하세요. 의지가 점점 약해지시는 거 같애요.”
박 교수가 목이 잠겨서 전화를 해왔을 때도 나는 그의 말에서, 선생님이 겪고 있을 어떤 아픔이나 떨림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 며칠 동안에 그에게서 또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렸구나 하는 암울함이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 같은 암 환자들 아니겠어요.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와 있는 사람들 말예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저게 어떻게 사람이냐 원숭이들 같지 않으냐,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런 꼴로 살고 싶지 않다고도 하시고요.”
주르륵 주르륵 바람이 불 때마다 흘러내리던 대리석 성벽, 선생님의 피부가 머리카락이 손톱이 그렇게 부서져서 선생님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감정을 통제하느라 꿈틀거리듯 움직이던 선생님의 검은 눈썹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선생님이 탄 말이 내 앞에 와 무릎이 꺾이며 팍팍 쓰러져가는 것 같았다. 말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달려 와서 쓰러져갔다.
11
엘리베이터를 내려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누구에게인지 알 수 없이 중얼거렸다. 들고 온 과일바구니가 어쩐지 선생님에게 욕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잘 익어 싱싱한 과일이었다. 그러나 잘 익어 싱싱하다는 과일의 상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썩은 것과 떫은 것과 싱싱한 것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아들이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어느새 눈에 익은 벽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굵은 선으로 가을 산을 그린 유화였다.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웅얼 들리고 나서 최 교수가 밖으로 나왔다. 가운을 입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원숭이처럼…… 그렇게 되어…… 하던 말이 언뜻 떠올랐지만, 최 교수의 모습은 단정 했다. 어쩌다 동물원에 갈 때마다 참 야비한 얼굴을 한 동물이구나 하고 늘 같은 생각을 갖게 하곤 하던 원숭이와는 전연 먼 모습이었다. 많이 수척해 있긴 했지만 눈에는 여전히 빛이 있었다.
“바쁠 텐데…….”
그런 말로 인사를 건네고 나서 최 교수는 아들에게 말했다.
“나 담배 좀 갖다 다오.”
그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놓았다. 약한 걸 피우느라…… 최 교수가 낮게 중얼거리고 나서, 아들이 가지고 온 양담배 켄트를 꺼내 불을 붙였다.
드시는 건 어떠세요. 요전에 전화드렸더니 식사를 하러 나가셨다고 하던데요. 병원에는 한 주일에 한 번 가신다고요. 그는 모래가 뿌려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먹고 싶기도 한데 소화가 돼야지. 냉면이 먹고 싶어서 나갔었어. 병원에 가고 오는 시간이 힘들어, 차 안에 앉아 있기가. 문득 어느 쪽이 환자이고 어느 쪽이 문병을 온 사람인지 모르게 서로의 목소리가 뒤바뀌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 교수는 그렇게 담담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아들이 문을 열자,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원에서 왔는데요.”
아들이 돌아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등 뒤에 커다란 화분을 든 사내가 둘이 보였다. 아주 커다란, 거의 내 키에 가까운 소철을 그들은 무겁게 들고 서 있었다. 화분이 놓일 자리를 가르쳐주고 나서 최 교수가 말했다.
“조금 이쪽으로 돌려놓지. 아, 그래요, 그게 좋구만.”
커다란 화분이, 푸른 잎을 내뻗으며 응접실과 현관 사이에 놓여졌다. 화원에서 온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자 최 교수가 말했다.
“풀도 이따금 병원엘 보내야 해. 잎이 자꾸 안 좋아지길래 화원엘 보냈었지. 한 두 달 보냈더니 아주 좋아져서 왔군.”
십 년쯤 자라면 저런 크기가 될까. 풀을 길러본 적이 없는 그는 우람한 소철의 나이를 헤아려보면서, 최 교수보다는 소철 쪽에 눈길을 보냈다. 지금 왜 풀이 그에게 필요할까. 병은, 그의 병은 그와는 무관한 어딘가를 지나가고 있는 건가. 나는 지금 저 풀이 최 교수보다도 오래 살 거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전화 왔어요. 이사장님 이신데요.”
아들이 건네주는 송수화기를 받은 최 교수가 느릿느릿 말했다.
“나 아직 안 죽었다 그래. 아무렴 너보다야 오래 살아야지. 나쁜 짓을 해도 네가 나보다 더 했을 테고, 일을 해도 네가 나보다 더 많이 했을 테니 순서를 봐도 그렇지 않냐.”
최 교수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소철은 물기를 머금은 듯 푸른빛이다. 그는 갑자기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배반감을 느낀다. 최 교수의 병세를 전해 들으며 가슴에 와 얹히던 무거움이 색깔이 변하여 배반감이 된다. 이분이 지금 병과 친해지고 있는 건가. 병과의 싸움이 아니라 병과 무언가 은밀히 속삭이고 있는 건가.
전화를 끝낸 최 교수가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 내가 잘못 만났어.”
“네? 누굴 만나셨는데요?”
“누가 아니고, 내 몸 말일세. 내가 이번에 잘못 만났어.”
최 교수는 자신의 병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하. 그가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지난해 수술을 할 때였어. 내가 암이라는 걸 다들 알았으니까, 나한테 와서 울고, 기도하고…… 그랬는데 나는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하고, 그걸 몰랐던 거야. 어이없는 일이지. 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정신을 차려서, 그 빚을 갚아야 하지 않나 싶고…….”
최 교수가 말끝을 흐렸다. 잠시 후 그는 표정을 밝게 하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고생한 걸로 말하면야 난 지금 죽어도 돼. 남이 칠십 팔십까지 할 고생을 난 버얼써 다 했으니까. 고생의 양으로 보자면 그런데…… 사람 빚을 갚아야 할 게 많아.”
그리고 그가 웃었다.
“오혜령이라고 하든가 그 여자. 나도 구렇게 살아야 할까봐. 기도하고…… 일어나서 비추든가 그것도 하고.”
최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나올 때도 그가 가지고 간 과일바구니는 현관 한옆에 놓여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그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최 교수는 어디에 있는 건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그가 겪은 고생 속에 있는가. 소철을 화원에 보내 싱싱하게 살려내는 그가 최 교수인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이 많아서 더 살아야 한다는 그는 또 누구인가. 일어나서 비추어야겠다는 그가 최 교수인가. 내가 사 가지고 간 그 과일바구니의 상대는 최 교수가 아니었던가. 임파선에 암세포가 들어가 있다는 사람, 곧 다른 환자나 똑같이 원숭이처럼 변해갈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아파트를 나섰다. 경비원이 수돗가에서 자루 끝에 달린 걸레를 빨고 있었다.
그는 뜻 없이 중얼거렸다. 저것도 삶이다.
12
그러나, 그 후의 하루하루는 붕괴였다. 사람의 삶에는 어떤 모습의 가설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그것을 확인하는 하루하루가 그에게서 흘러갔다. 한 번의 삶, 한 번의 평생은 그러므로 그에게 쓰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삶은 모아나가는 것도 쌓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몫으로 받아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써나가는 나날이었다. 단 한 번의 평생을 살 뿐이라는 것을, 그토록 절실히 느껴가면서도…… 그는 붉은 도장으로 경고라고 찍힌 쪽지를 들고 민방위 훈련을 받으러 갔고, 자동판매기의 커피를 맛없다고 중얼거리며 마셨고, 아내는 왜 점점 살이 찌는가 무심히 생각했다.
13
달그락거리며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눈앞이 흐려져와서 나는 묵묵히 선생님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무너졌다. 그런 말을 나는 그 맨발에서 보고 있었다. 발톱 옆으로 하얗게 가루가 묻은 듯이 흰 것이 드러나 보이는 선생님의 맨발은 가늘게 야위어 있었다. 발가락 위에 나 있는 털마저, 그럴 리 없겠는데도, 바싹 여윈 듯싶었다.
“좀 누우세요. 앉아 계시면 더 힘드시잖아요.”
요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선생님에게 내가 말했다. 그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어떤 포즈를 해도 편하지가 않아. 편한 포즈가 없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유머만은 여전하시구나 싶었다. 이런 것을 이성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겠지. 어떤 포즈도 편하지 않다니.
“사람들은 나에게 투병을 하라고들 해. 투병을 하라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무엇과 싸우라는 거야. 투병…… 그래서 내가 3, 4년을 더 산다고 해봐. 그게 무어야.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싸우라니…….”
갑작스럽다고나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선생님은 무너져 있었다. 그의 육신이 그랬다. 그는 응접실로 나오지도 못하고 안방에 딸린 침구 위에서 나를 맞았다. 전번에 찾아오려고 했을 때, 병원에 가고 안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두 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렇겠지. 막살아왔다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왔다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무슨 짓이든 하겠지. 그러나…… 난 그렇지가 못하잖아. 그렇게 막살지도 못했잖아.”
얼음 조각을 하듯 그렇게 사셨을 것이다. 깨뜨리면 잘못 부수면 회복이 안 되는 것으로 사신 시간들일 것이다. 선생님의 시간.
“폭력적인 생각이 자꾸 들곤 해. 뛰어내릴까. 그래서라도 죽는 게 낫지 않나. 딱 죽는 약이 있으면 먹을까도 싶고. 이런 폭력적인 생각을 또 고쳐. 내가 이래선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왜 그런 약한 생각을 하세요. 나는 겨우 그렇게 중얼거리려다가 목이 아프게 누르며 그 말을 참았다. 아무것도 선생님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죽음이…… 화려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해. 그게 두렵지가 않아. 이상하지. 전에 할아버지 무덤에 가 앉아 있을 때 생각이 나. 그때, 그 융단같이 푸른 잔디를 보며 앉았노라면 그렇게 좋고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어. 내가 이제 여길 내려가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이며 살아갈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지. 물론 살아가며 순간순간의 기쁨이야 있겠지. 그러나……”
이미 노오랗게 물들어 있는 선생님의 눈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병이 저렇게 만든 것일까. 검고 컸던 선생님의 눈. 우리는 이다지도 무력 한가. 우리가 무엇을 이룩하겠다고. 무엇을 남기겠다고 매일을 고단하게 살았단 말인가.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커튼이 열려진 창에 가 멎었다. 텅 빈 하늘이 거기 가득했다.
“끊임없이 싸워. 정상적인 자아와 병든 자아가 이십사 시간을 싸워. 이게 나야. 내가, 두 개의 내가 살아 있어. 내가 나를, 정상적인 자아가 병든 자아를 두 시간만 재워놓자. 그러면서 잠이 들어. 여덟 시에 깨우자. 그러면서 살아. 병든 자아를 달래서 악을 먹이고, 병든 자아에게 사정해가며 물도 몇 모금 먹고…….”
그때, 왜 그 생각이 떠올랐을까. 그것은 내가 본 처음이자 마지막 한 번의 선생님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대학의 보직을 맡고 있었다. 마침 약속이 있어서 학교 본관의 처장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 다른 단과대학의 학장을 했던 원로교수 하나가, 최명하 너 이놈 하고 고함을 치며 처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었다. 그는 아마 선생님보다 스무 해는 나이가 위였을 게다. 그를 향해서 그때 선생님이 소리쳤다. 학자라는 게 나잇값도 못 하고! 당신하고 할 이야기 없으니 당장 나가! 놀라서 집무실 한구석에 나는 서 있었고, 선생님은 그 노교수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몰았다. 문을 닫아걸며 선생님이 내뱉듯 말했다. 무슨 부정입학생 명단을 수첩에 적어 가지고 합격을 시키자니! 그걸 내가 못 한다고 잘랐더니 저 주책이야! 그때는 마침 대학입시철이었다. 그처럼 격렬하고 단호했던 선생님의 모습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선생님, 또 다른 선생님의 자아를 생각했던 것일까.
메마른 발을, 여윈 발을 당겨 앉은 자세를 바꾸며 그때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황 교수. 그 사람이 뭔데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아.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다니.”
황 교수. 그분은 선생님과는 가까웠던 국문과 교수였고, 원로소설가였다.
“오늘 비행기는 전연 예약이 안 되네요. 그냥 비행장으로 나가보실래요. 좌석 이 있으면 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내의 그런 말을 들으며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니, 가지 않겠어. 병든 자아와 정상적인 자아가 아냐.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자아와 싸웠던가. 때로는 두려웠던 나. 때로는 슬펐던 나. 때로는 그의 병듦을 보며 살아있는 자신이 기뻤던 나도 있었어. 그의 무너져가는 몸을 보며, 건강에 조심해야지 하고 쥐가 천장을 갉아대듯 속삭인 나도 있었어.
그는 새로 빤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비뚤어진 매듭을 거울 속으로 바라보며 다시 맬까 어쩔까를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양복을 걸치며, 넥타이를 고치지도 다시 매지도 않은 또 하나의 자신에게 말했다. 두 시의 약속을 미룰걸 그랬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기 위해 구두를 신으며 그는 오늘 저녁에는 술을 마시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많이 마시지는 마.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빗발을 뿌려 그의 구두를 젖게 했다. 그는 우산을 바람 쪽으로 기울이며 걸음을 빨리 했다. 비는 모래알같이 뿌려댔다. 골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 같았다. 비를 맞고 있는 집과 나무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골목을 바라보았다. 사막. 순간 그는 자신 속에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고 느꼈다. 어떤 모습의 그도.
『문예중앙』 (1990년 봄); 『모래 위의 집』 (나남 1992)
한 수 산
한수산〈韓水山〉 194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4윌의 끝」 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감각적인 문체와 따스한 시선으로 삶의 생성과 소멸, 생명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1981년 필화사건에 휘말려 전두환 정권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학생시절 정신적 우상이던 은사의 죽음을 통해 삶 속에 내면화한 죽음의 실체를 그린 「타인의 얼굴」을 비롯하여 「4월의 끝」 「모래 위의 집」 등의 단편과, 서커스단을 소재로 뿌리 뽑힌 삶의 세계를 그려낸 장편 『부초(浮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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