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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일역사연구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출처: http://winlee96.blog.me/220332347179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의 상황 전쟁의 배경 AD 1941년 유럽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여 있을 때 독일 및 이탈리아를 제외한 삼국동맹의 마지막 남은 일본 역시 AD 1937년 일으킨 중일전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던 상태였다. 일본의 예상과 달리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은 점점 자원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비록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해외에 파병된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며 일본에 대한 석유ㆍ 철광 등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하였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경제봉쇄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을 포기할 수 없었고 이에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과 삼국동맹에서 탈퇴할 것 등을 요구한 헐 노트를 일본이 거절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 네덜란드와 공조를 이루며 일본에 대한 경제 봉쇄망을 더욱 강화하였는데 이 경제 봉쇄망은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의 영 문 첫 글자를 따서 ABCD 포위망( http://cafe.daum.net/korjaphistory/Spjh/301 참고 )이라고 불렸다. 한편 일본은 미국의 경제 봉쇄를 풀기 위한 외교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부족한 자원의 확보방안으로 프 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반도 점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미 AD 1940년 독일의 침공을 받아 붕괴되고 남동부 지역에 독일의 위성국인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력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켜낼 힘이 없었다. AD 1940년부터 일본군이 비시 프랑스를 위협하며 베트남 북부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AD 1941년에는 남부까지 진출하며 베트남 전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일본이 중국에서 철수하기는 커녕 오히려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점령하자 미국은 즉각 중국 뿐만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역시 물러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의 반미감정이 퍼지면서 미국과의 외교협상을 추진하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붕괴되고 군인 출신의 강경파인 도조 히데키 내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일본은 미국의 경제 봉쇄를 외교적 수단으로 해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유럽 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인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말레이 반도와 버마, 미국령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자원산지들과 태평양의 섬까지 모두 장악해 동남아시아의 질서를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하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진주만 공습 직전 일본 제국의 영토현황 전쟁 발발 이전의 상황 미국은 지난 AD 1823년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 의해 주창된 먼로주의에 의해 유럽의 분쟁에 대한 불간섭주의(혹은 고립주의)를 주요 외교원칙으로 삼았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도 어디까지나 독일의 잠수함으로부터 자국 선박이 공격받았기 때문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처음에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럽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대두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고 AD 1940년 11월 3선에 성공한 뒤에는 같은 해 12월 29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AD 1941년 3월 11일 무기 대여법(렌드리스)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영국과 소련, 중국 등에게 막대한 무기와 장비, 군수품, 식량, 연료 등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무기대여법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기 대여국이 대금을 선불로 지급하고 직접 운송하는 것을 요구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캐시 앤 캐리 법안"이 무효화되어 사실상 무상지원에 가까워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쓰시마 해전을 통해 승리를 거둔 후 해전에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대함결전사상'이 팽배해졌다. 더구나 미국은 AD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과 AD 1930년 런던 군축조약에 얽매여 AD 1920년대 이후 단 1척의 신형 전함을 건조하지 못한 상태였던 반면에 AD 1934년 군축조약에서 탈퇴한 일본은 자유롭게 신형 군함 건조에 나선 상태였고 미국도 뒤늦게 AD 1937년부터 신형 군함 건조에 나섰지만 당시까지 건조된 것은 단 2척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만일 선제공격을 통해 미국이 보유한 군함 상당수를 격침시킬 수만 있다면 미국이 새로운 군함을 건조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를 모두 점령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그럴 경우 미 해군력이 회복되더라도 독일과의 전쟁이 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대두했다. 이에 따른 공격 대상을 두고 가까운 필리핀과 멀리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두고 격론이 벌어 졌으나 결국 미 태평양함대 대부분이 주둔 중인 하와이의 진주만이 선택되었다. 본래 미 태평양함대는 미국의 샌디에고에 있었으나 당시에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하와이의 진주만에 전진배치된 상태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계획 일본의 진주만 기습작전의 계획과 총지휘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맡았다. 야마모 토는 미국 유학과 주미대사관 무관 근무를 경험하며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력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해 왔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 등의 강경파에 의해 미국과의 전쟁이 추진되고 이를 일본 천황이 승인하자 그나마 승산을 높힐 수 있는 방법이 기습 공격을 통해 진주만의 미 태평양함대에게 재기불능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진주만 기습작전을 맡게 되었다. 한편 야마모토는 일찍부터 기존의 거함거포주의의 한계와 항공모함이 가진 잠재력을 깨닫고 해군항공대 와 항모전단 육성에 전력을 기울인 상태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단순히 군함건조 경쟁으로는 승산이 없는 일본의 현실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이 함재기 활용에 심혈을 쏟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야마모 토는 AD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에 의해 진행되었던 타란토 해전 에서 타란토 항에서 꼼짝하지 않는 이탈리아 해군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 해군이 기존의 전함이 아닌 함재기를 탑재한 항공모함을 투입하여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는 크게 고무되었다. 특히 타란토는 그 지형이 진주만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큰 참고가 되었다. 이에 따라 야마모토는 미 해군에 대한 기습공격 방법으로 미 태평양함대 대부분이 주둔 중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상대로 타란토 해전과 동일하게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이용한 원거리 공습을 감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대형 군함 간의 대구경 함포전만을 생각하는 거함거포주의에 빠져있고 동 남아시아 점령이라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우선적으로 필리핀에 주둔중인 미군을 제거하기를 원했으나 야마모토가 워낙 확신에 찬 주장을 하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서 물러나겠다는 초강경 자세로 나오자 야마모토의 계획이 채택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주도한 진주만 기습 준비 진주만 기습을 위해 AD 1941년 4월 항공모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과 전함 2 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1척을 동원한 제1항공함대(통칭 '기동부대')가 조직되었고 그 사령관으로 해군 대학장인 나구모 주이치가 임명되었다. 나구모는 적극적인 군비경쟁을 요구하던 대표적인 함대파로서 군축조약 준수를 주장하던 조약파의 대표격인 야마모토와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우던 앙숙이었고 항공전에도 무지했으나 연공서열에 따라 임명받을 수 있었다. 이에 야마모토는 기존에 함재기 지휘를 항공모함 함장이 맡던 것을 항공대 지휘관이 하도록 변경하고 어뢰 공격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던 후치다 미쓰오를 임명하여 인선을 보완하였다. 후치다 미쓰오(淵田 美津雄,Mitsuo Fuchita)1941年8月下旬、第一航空艦隊の赤城飛行隊長に淵田は着任した
야마모토는 단 1번 밖에 기회가 없을 진주만 기습을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 조종사들을 비행시간이 800시간이 넘고 중일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만을 엄선하고 이들에게 하와이와 지형이 비슷한 규슈 가고시마현 가고시마만 일대 12곳에에서 폭격 훈련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하와이 현지의 일본인을 첩자로 이용하여 미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요일 새벽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도조 내각이 11월 1일 공격개시일을 12월 7일 (일본시간으로는 12월 8일)로 결정하여 11월 5일 일본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기습공격의 성공을 위해 승무원과 조종사들에게조차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최대한 기밀을 유지한 채 11월 18일 기동함대가 11월 18일 사할린의 단칸만으로 이동하였고 11월 26일 드디어 진주만을 향해 출항하였다. 그제서야 기동함대의 승무원과 조종사들은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정도로 기밀이 철저히 유지되었고 이동항로를 민간 어선조차 잘 다니지 않는 곳이 선택하였기 때문에 미국 정찰기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여기에 야마모토는 중유의 배기가스가 멀리서 발각된다는 이유로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도록 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일본 정부 일각에서는 여전히 외교적인 방법으로 미국의 경제봉쇄를 풀려는 시도가 병행되었으나 12 월 2일 최종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일본군 대본영은 하와이를 향하여 가고 있던 기동부대에게 예정대로 12월 8일에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라는 의미의 “니이다가야마에 올라라(ニイタカヤマノボレ) 1208"이라는 암호문을 보냈다. 니이다카야마(신고산)은 당시 일본 지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현재 타이완의 옥산을 의미했다. 다만 일본은 공격 개시 30분 전에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고자 하였으나 무려 5천 단어로 된 선전포고문을 암호로 송신했기 때문에 워싱턴 주재 주미 대사관에서 이를 해독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버렸다.(의도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선전포고문은 공격개시된 시간으로부터 3시간 가까이 지난 8시 50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국에게 전달되었고 이 때문에 진주만 기습은 선전포고 없이 진행되고 만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 함대의 이동경로 진주만 기습 전개 일본 기동부대의 진주만 공격은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이용한 2차례 공습으로 계획되었다. 일본의 함재기는 3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B5N 97식 함상공격기는 어뢰로 함선을 공격하는 뇌격기였고 D3A 99식 함상폭격기는 급강하 폭격기였으며 A6M 영식 함상전투기(통칭 '제로 전투기')는 97식 함상공격기 와 99식 함상폭격의 호위전투기였다. 제1파 공격은 주력공격으로 속도가 제일 느린 97식 함상공격기가 선두에 서서 기습의 효과를 이용해 어뢰를 이용해 타격을 가하면 이어서 99식 함상폭격기가 급강하 폭격으로 항공모함과 전함을 우선적으로 침몰시키도록 계획되었다. 그리고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히 캄 기지와 휠러 기지 등 오하우 섬의 여러 항공기지를 강타하여 미군 전투기들이 이륙하지 못하게 만들도록 하였고 제로 전투기의 경우에는 아군 공격기를 호위하는 한편 기총사격으로 지상의 미군 전투기를 파괴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제1파 공격이 끝나면 제2파 공격으로 제1파 공격시 파괴하지 못한 나머지 목표물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이 공격을 위해 보유한 총 399대의 함재기 중 360대를 투입 하기로 하였고 나머지는 항공모함 호위를 맡기로 하였다. 다만 야마모토가 진주만 기습을 계획하면서 최우선 파괴대상으로 삼은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당시 진주 만에 없었는데 USS 새러토가는 미 서해안의 샌디에고 해군항에, USS 호넷과 USS 요크타운은 대서양에 있었고 하와이에 정박 중인 것으로 파악되던 USS 엔터프라이즈와 USS 렉싱턴 역시 하와이 근해에서 훈련을 겸한 함재기 수송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진주만을 떠난 상태였다. 특히 엔터프라이즈의 경우에는 일본의 공격개시 하루 전에 진주만에 입항해야 했으나 도중에 열대폭풍을 만나 천우신조로 일본의 기습공격을 피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공격 전날 오하우 섬의 일본 영사관에 배치된 요시가와 소위가 긴급히 알려왔으나 기동부대 지휘관인 나구모까지 전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였고 나구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예정대로 AD 1941년 12월 7일 오전 6시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3종류 함재기 12월 7일 7시 49분 제로 전투기 43대, 99식 함상폭격기 51대, 97식 함상공격기 89대, 총 183대로 이 루어진 일본의 제1파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도달하였다. 일요일 오전의 한가로운 라디오 음악을 일 본 조종사들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진주만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일본의 함재기 지휘관인 후치다 가 공격개시 암호인 "도, 도, 도(トトト)"를 송신하자 먼저 일본의 97식 함상공격기가 발사한 어뢰들이 진주만에 정박중인 전함들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진주만의 수심이 낮았지만 일본의 어뢰는 사전에 이 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어서 일본의 99식 함상폭격기들이 어뢰를 피격당한 전함들에서 발생한 연기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고 급강하 폭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후치다는 기함 아카기에 기습 이 성공했다는 의미의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 암호문을 전송했다.미국은 일본의 기습공격을 허용하고 대혼란에 빠졌다. 7시 58분 “진주만 공습받고 있다! 이것은 훈련 이 아니다!(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a drill)“라는 유명한 경보를 발령했으나 여전히 병사 들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를 못했고 일부에서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착각까지 했다. 탄약고 가 잠겨있고 전투기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응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일본 항공 기들의 공격에 전함인 USS 애리조나, USS 캘리포니아, USS 웨스트버지니아가 침몰했고 USS 오클라 호마는 전복되었다. 일본의 제1파 공격대가 발진한 지 한 시간 15분 뒤인 7시 15분에 제2파 공격대가 발진했다. 이번에는 제로 전투기 36대, 97식 함상공격기 54대, 99식 함상폭격기 54대로 총 171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8시 54분 펼쳐진 두번째 공습에서는 미군의 대공포 반격에 제1파 공격대보다는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지만 전함 USS 메릴랜드, USS 네바다, USS 테네시, USS 펜실베이니아에 타격을 가 하는 데 성공했다. 진주만에서 미국 전함이 침몰하는 모습 한편 제1파 공격 이후 기함 아카기로 복귀한 후치다는 제3파 공격을 건의했다. 비록 제1파와 제2파 공 격으로 미군 전함과 항공기를 상당수 파괴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유류 저장소와 어뢰 저장 소, 항만 시설, 각종 선박 수리 공작소, 수리 조선소 등의 군항 시설들은 모두 무사했기 때문에 이들을 파괴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후치다의 의견에 다른 5척의 항공모함 함장들도 동조하였으나 신중한 성격은 나구모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더 이상 모험하지 말고 철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야마모토는 공식적으로는 나구모의 의견을 지지했으면서도 주요 항구시설들을 파괴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은 공격개시 90분 만에 끝이 났다. 진주만 기습의 결과 진주만 기습은 겉으로는 일본군의 대승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미해군 전함 8척이 침몰하였고 그 밖의 함선 18척이 타격을 받았으며 180여 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고 미군 사상자도 사망자 2,300 명을 포함해 3,400명에 달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단지 항공기 29대와 소형 잠수함 5대 뿐이었고 인명 피해도 경미하여 55명의 일본군 조종사들과 9명의 소형 잠수함 승무원들이 사망하고 한 명이 생포되 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항공모함이 모두 무사했다는 점과 그나마 타격을 입힌 전함의 경우도 진 주만의 수심이 얕아 침몰한 8척 중 6척이 인양되어 수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진주만 기습은 당초의 목적을 온전히 달성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유류와 어뢰 저장소, 각종 수리시설이 모두 무사했 고 그동안 신형 함선 건조에 소극적이던 미국이 막강한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군함 건조에 총력을 기울 이면서 일본 해군력을 단기간에 추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진주만 기습은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여 미국에게 큰 타격을 입힌 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이끌어내겠다는 전략적인 목표가 있었으나 미국인에게는 외국군에게 미국의 영토를 공격받은 최초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을 줬고 더욱이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했다는 점에 대해 오히려 많 은 분노를 유발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일본과 협상에 나서기는 커녕 그 동안 제2차 세계대 전의 참전에 소극적이던 여론이 삽시간에 반전되고 주전파가 득세하게 된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은 진주만 기습이 일어난 12월 7일을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될 그날'로 선언했고 다음날인 12월 8일 미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공식 결의했다. 일본 항공기에 찍힌 진주만 공습의 모습 일본의 동남아시아-남태평양 점령, 남방 작전 남방작전의 배경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한 목적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것이었던 만큼 진주만 기습과 동시에 동남아시아를 공격하는 남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 주된 목표는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속하는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유전과 보르네오 섬의 바리크파판 유전이었다. 두 유전의 연간 생산량은 800만톤으로서 AD 1939년 당시 일본의 연간 석유 소비량 500만톤을 상회하므로 이곳만 점령한다면 일본은 지속적인 석유 확보가 가능하였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대부분이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가, 홍콩과 버마, 말 레이시아, 싱가포르는 영국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필리핀은 미국이,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이 각 각 식민지로 삼은 상태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반도는 이미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명목만 프랑스령인 사실상 일본의 점령지가 된 상태였고 네덜란드 역시 본국을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였으며 포르투갈은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세력도 보잘 것 없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 세력만 격파하면 동남아시아는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으로 미 태평양함대를 우선 격파 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와 함께 영국 해군도 물리쳐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영국령 말레 이 반도를 모두 차지하고자 하였다. 남방작전의 전개 말레이 해전 홍콩은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차한 이후 동남아시아의 최전선 기지로 활용하고 있었으나 당시 에는 이미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진행하면서 광동성 해안지방을 점령하고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진군하면 서 홍콩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AD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홍콩 공격이 시작되어 우선 12월 13 일 홍콩에 인접한 주룽반도를 점령하였고 영국군의 저항을 뚫고 12월 25일 홍콩 점령에 성공했다. 비록 영국군은 일본군에게 홍콩을 빼앗기기 이전에 영국 함대를 싱가포르로 옮긴 상태였으나 독일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던 만큼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HMS 리펄스 단 2척의 대형함과 이를 호위하기 위한 구축함 3척(HMS 일렉트라, HMS 익스프레스, HMS 엔카운터, HMS 주피터)으로 구성된 'Z 함 대'만 파견했을 뿐이었다. 본래 항공모함도 2척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 중 한 척인 HMS 인도미터블는 이동 도중에 암초에 부딪쳐 수리를 받아야 했고 나머지 한 척인 HMS 허미스는 너무 구형이었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12월 10일 오전 일본군 정찰기 중 한 대가 쿠안탄에서 영국 Z함대를 찾아내면서 말레이 해전이 발발하였 다. 영국에서는 대형함이 단 2척에 불과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영국이 자랑하는 최신예 전함이었 고 일본의 남견함대는 순양함과 구축함으로만 이루어진 소형 함대였으므로 기존의 거함거포주의 개념에 의하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이미 진주만 기습을 통해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상태였고 이러한 일본의 공중공격을 영국의 전함 과 순양전함, 구축함의 대공화기만으로는 막아내기 힘들었다. 영국 Z함대로서는 함께 하지 못한 항공모 함 2척의 전력공백이 아쉬울 뿐이었다. 비록 일본 폭격기들의 폭탄 공격은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 지만 뇌격기들의 어뢰 공격은 큰 피해를 입혔다. 3발의 어뢰공격을 받은 리펄스가 가장 먼저 침몰하였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끈질기게 버텼으나 총 어뢰 6발과 폭탄 1발을 맞으며 최종적으로 격침되었다. 영국의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피격 모습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격침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고 나 중에 "전쟁 전체에서 이 보고를 빼고 나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준 보고는 없었다"라고 나중에 회고록에 적 었을 정도로 영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줬다. 이에 반해 일본은 오랜기간 전 세계 바다를 누볐던 영국 해군에게 대승을 거둔 것에 크게 고무된 채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까지 만들어 배포할 정도로 전 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국동양함대는 사라졌고 동남아시아에서 더이상 일본 해군을 견제할 세력이 없게 되었다. 또한 아무리 최신예 전함이더라도 이제는 항공기의 공중지원을 받지 못하면 항공모함의 함재기 공격에 무력화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되면서 명실상부하게 해전의 중 심축이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옮겨지게 된다. 영국령 말레이 반도 점령 말레이 해전이 벌어지기 이틀 전인 12월 8일 인도차이나 반도에 주둔한 일본 육군이 태국을 침공했다. 그 러나 태국은 일찍이 버마를 점령한 영국과 인도차이나를 차지한 프랑스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동남아시아 에서 유일하게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을 정도로 뛰어난 외교능력을 보여줬는데 이번에도 일본과 사전 밀약을 통해 독립과 주권을 인정받는 대신에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기로 이미 확정지은 상태였다. 태국의 비행장을 자유롭게 이용가능해진 일본의 항공기들이 말레이 지역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영국 공군 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12월 10일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승리하자 일본 육군이 영국령 말 레이 반도 곳곳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당시 말레이 반도에 투입된 일본군의 규모는 3만6천명에 불과한 반면에 영국군은 총 규모가 약 12만면에 달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더 긴박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말레이 반도에 주둔 중이던 정예병 력을 이미 차출하여 말레이 반도에는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데려온 병력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인도인 부대는 억지로 끌려온 만큼 사기가 낮고 싸울 의지가 부족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인 부대 도 이제 막 징집된 신병 위주로 구성되어 훈련도가 낮고 실전경험도 일천했다. 이에 반해 일본 육군은 영 국군 정예병력 만을 우려했을 뿐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인도인 부대나 신병 위주의 오스트레일리아 부대 는 전혀 자신의 상대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특히 일본군과 영국군의 전투의 결정적인 차이 는 전차 보유 여부에서 갈렸는데 일본군은 자체 개발한 97식 치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정 글이 대부분인 말레이 반도의 특성상 전차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는 단 1대의 전차도 배치하지 않았 고 별다른 대전차 무기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전차를 막아낼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일본군이 97식 치하 전차를 앞세워 진격하기 시작하자 전투의지가 부족했던 인도인 부대는 일본군의 치 하 전차를 보면 그대로 도망쳤고 나중에 재집결도 잘 되지 않았다.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수많은 물자와 병력을 잃으면서 싱가포르로 퇴각했고 일본군은 12월 30일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를 점령한 후 이듬해 1월에 싱가포르까지 거침없이 진격하였다. 영국군은 싱가포르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하 고자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싱가포르는 바다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적합하게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을 뿐 일본 육군이 펼치는 지상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별다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 가상으로 일본군이 싱가포르의 수원지까지 빼앗자 영국군도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아서 퍼시발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2월 15일에 공식 항복하였고 약 9만명에 가까운 영국군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은 손쉽게 영국령 말레이 반도를 모두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일본 대본영조차도 말레이 반도 점령에 100일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실제 로는 70여일 밖에 걸리지 않아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 전투를 통해서 그동안 두려워하 던 영국군도 실제로는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일본군 내에 팽배해지게 된다. 싱가포르 입성후 행진하는 일본군의 모습 영국령 버마 점령 말레이 반도가 일본군에게 넘어가면서 이제 동남아시아에서 남은 영국령 식민지는 버마 밖에 안 남게 되 었다. 그러나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 등의 영국 주요 식민지가 대부분 일본군이 점령하고 영국의 동양함대 까지 괴멸당한 상태에서 버마 단독으로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AD 1942년 1월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공 격에 남부의 핵심지역인 랭군과 페마가 차례로 함락되었고 버마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중국군마저 만 달레이에서 패배하면서 버마는 일본군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버마인들은 처음에 영국군을 몰아낸 일본군의 존재를 반가워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영 국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 이 바로 아웅 산이다. 아웅산은 이미 영국의 점령기부터 저항운동을 펼치던 인물로 처음에는 영국의 탄압 을 피해 중국의 하이난 섬으로 망명을 떠난 후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무장저항단체를 양성하였고 일본군 의 버마 점령 이후에 버마로 다시 돌아왔으나 나중에 일본군의 학정이 심해지자 일명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AFPFL)'을 결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네덜란드령 말레이 제도 점령 AD 1941년 12월 15일부터 서쪽의 수마트라 섬에서 동쪽의 뉴기니 섬으로 이어지는 말레이제도에 대 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말레이제도는 동인도제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였으나 이미 네덜란드 본국이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비병력이 없었다. 일본군은 12월 15일 브루나이 상륙을 시작으로 일본군은 12월 24일에는 보르네오의 쿠칭을, AD 1942년 1월 11일에는 남보르네오의 타라칸, 1월 24일에는 발릭파판을, 2월 10일에는 반자르마신을 차례로 점 령하면서 보르네오 섬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민간 기술자들에 의해 보르 네오의 바리크파판 유전의 정유 시설들은 폭파당하며 가장 중요한 유전 확보에는 실패했다. 1월 11일에는 보르네오 섬의 동쪽의 셀레베스 섬 북단의 메나도가 태평양 전쟁 최초로 공수부대의 공 중강습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를 거점으로 티모르 섬과 발리 섬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고 중립을 유지 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동티모르도 침공도 이루어졌다. AD 1942년 2월 14일에는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유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수부대가 우선 투입되어 비행장을 장악하였고 이어서 육군 상륙부대가 투입되면서 이번에는 유전과 정유시설을 온전히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남은 곳은 자바 섬 뿐이었다. 자바 섬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의 함대가 연합한 이른바 ABDA(American-British-Dutch-Australia) 연합함대가 출동하였으나 2월 27일 부터 3월 1일까지 벌어진 자바 해전에서 네덜란드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3척, 미국 중순양함 1척, 오 스트레일리아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 영국의 중순양함 1척이 격침되는 피해만 입었다. 이렇게 연 합군 함대가 지리멸렬하는 동안 일본군은 자바 섬에 동쪽과 서쪽에 각각 상륙하여 말레이 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97식 치하전차를 앞세워 진격하여 결국 3월 8일 최종적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의 항복 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자바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일본군은 뉴기니 섬까지 침공하게 된다. 일본의 말레이 제도 공격 모습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공습 남방작전을 진행중이던 일본군은 AD 1942년 2월 19일 연합군 반격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진주 만 기습을 마친 나구모의 기동부대에게 이번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포트 다윈을 폭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포트 다윈의 군사시설 및 병기창, 항만 및 민간비행장, 철도, 석유저장고가 폭격 대상이었다. AD 1942년 2월 19일 4척의 일본해군 항공모함(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에서 출격한 188대 의 함재기가 9척의 선박을 격침시키고 54기의 육상공격기가 기지 곳곳을 파괴하고 20대의 군용기를 파 괴했다. 이후 3월 3일에는 9대의 일본의 제로 공격기가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연안의 브룸를 공격하였고 AD 1942년 7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의 퀸즐랜드 일대가 대규모는 아니지만 일본군의 공습을 당 했다. 일본군으로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반격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폭격을 감행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본격적으로 일본군과의 전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령 서태평양 도서와 필리핀 점령 일본은 남방작전을 추진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본국의 사정으로 동남아 시아 식민지를 신경쓸 여력이 없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미군만을 유일한 위협으로 생각했다. 이에 진주 만 기습을 계획할 당시에도 진주만이 아니라 필리핀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진주 만 기습과 함께 서태평양의 미국령 섬들에 대한 공격도 이루어졌다. 진주만 기습이 이루어지던 날 괌에 대해서도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져 2일만에 점령하였다. 다만 웨이크 섬에서는 미군 수비병력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하여 진주만 기습에서 복귀하던 기동부대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12월 23일 점령에 성공하였다. 필리핀의 미 극동군에 대한 공격 역시 중요한 작전으로 추진되었다. 일본군은 우선 공격기를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필리핀 주변의 제공권부터 장악하였다. 이어서 필리핀의 루손 섬의 남과 북에 상륙하여 미군기 지인 클라크필드로 단숨에 진격하였다. 미 극동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방어전으로 버티며 본국 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마닐라를 포기하고 전군을 바탄 반도로 후퇴시켰다. AD 1942년 1월 7일 부터 바탄 전투가 시작되었고 미군이 결사적으로 방어에 나서며 4월까지 성공적으로 버텨냈으나 미 태평 양함대가 진주만 기습으로 당장의 전투력을 상당부분 상실하였기 때문에 구원병력이 도착하는 것은 요원 하기만 하였다. 이에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만이라도 탈출할 것을 지시하게 된 다. 일본의 필리핀 루손 섬의 진격로 현황 맥아더는 AD 1903년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츠를 4년동안 최고점수로 수석졸업하며 화려하게 임 관한 후 고속진급을 거듭하여 AD 1918년 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AD 1925년에는 최연 소 육군소장, AD 1930년에는 대장이 되었으며 AD 1935년까지 육군 참모총장까지 역임하면서 미국인에 게는 전쟁영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맥아더는 AD 1922년부터 AD 1925년까지 미 필리핀 주둔군 사령관을 지냈고 육군참모총장의 임기가 끝난 AD 1395년부터 AD 1937년까지는 필리핀 정부의 최고군 사고문을 지낸 후 퇴역하면서 필리핀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맥아더는 AD 1937년 퇴역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복귀하였고 미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 극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아 필리핀에 주둔 중인 상황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으로서는 전쟁영웅으로 취급받는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전사하는 것 이 큰 정치적 부담이었기 때문에 직접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자존 심이 강한 맥아더로서 부하들을 사지에 남기고 혼자 도망치는 것을 꺼려했으나 대통령의 단호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AD 1942년 3월 필리핀을 떠났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모습 맥아더가 떠난 이후에도 그의 지휘권을 이양받은 조나단 웨인라이트가 계속해서 일본군에게 항전하였으 나 결국 식량과 물자부족으로 5월 7일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 당시 미군 7만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는 데 이들은 바탄 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무려 88km를 강제로 이동하고 카파스까지 는 열차를 이용한 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널 수용소까지 13km를 다시 행군하는 '죽음의 바탄 행진'을 경 험해야 했다. 죽음의 바탄행진에서 일본군은 물 한모금도 주지 않고 구타를 일삼았으며 일부는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결국 행군 속에서 약 1만여명이 도중에 사망했고 일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쳐 최종적으로 5만 4천명만이 수용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방작전의 결과 이렇게 하여 일본군은 단지 6개월여 만에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역을 석권하는 데 성공했다. 진 주만 기습으로 미 태평양함대에게 타격을 입히고 말레이 해전으로 영국동양함대를 괴멸시켰으며 자바 해전을 통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주변의 연합군 함대의 위협마저 제거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의 동남아시아 지배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겉으로는 '대동아공영권'을 완성시키고 석유와 고무 같은 천연자원의 원활한 수급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일본의 계획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대로라면 이 상태에서 미국과의 협상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복으로 AD 1942년 4월 18일 일본 본토에 대한 둘리틀 공습을 감행하는 등 협상 대신에 대일항전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의 최대판도(파란색 계열) 미국의 보복폭격, 둘리틀 폭격 진주만 기습을 허용한 이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즉각 일본에 대한 보복공격을 지시하였으나 미 태평양함대의 전함들이 대부분 손상된 시점에서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무사 한 항공모함을 이용한 폭격이 제안되었으나 개전 초기 괌과 웨이크와 같은 서태평양의 거점들을 모두 상실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호위함 없이 항공모함 단독으로 일본 본토에 근접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이에 항속거리가 짧은 함재기 대신에 항속거리가 긴 지상용 폭격기를 싣고 가 원거리에서 발진시킴 으로써 항공모함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안이 추진되었다. 다만 활주로 짧은 항공모함에서 이륙 시키는 것은 물론 공습이후 적지 한복판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최정예 조종사가 엄선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운 임무의 지휘관으로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이 선정되었고 함께 선발된 80명과 함께 일본 본토에 대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을 실행하게 된다. 미국의 둘리틀 특공대 모습과 공습 경로 AD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특공대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경폭격기 16대가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하였다. B-25 미첼 경폭격기는 활주로가 짧은 항공모함에서 이륙해야 했기 때문에 기체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무전기와 기관총도 제거하고 대신 나무로 된 기관총 모형을 달아놓았다. 다만 항공 모함 호넷이 일본 감시정에게 노출되면서 예정보다 먼 거리에서 더 이른 시간에 이륙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 항공기의 공습을 전혀 예상치 못한 일본측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둘리틀 특공대는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욧카이치, 와카야마, 오사카 등 일본 각지를 폭격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둘리틀 특공대가 동원한 폭격기가 16대에 불과하여 일본 측 피해는 사망자 50명과 가 옥 262채 파괴로 경미했지만 일본 본토가 공격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큰 충격을 줬다. 이 때문에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장관인 야마모토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진주만 기습에서 함께 파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 했으며 서둘러 미 항공모함들을 격침시키기를 원하게 된다. 폭격을 마친 둘리틀 특공대는 각자 흩어져 소련과 중국을 도망쳤고 전사자 3명과 포로 8명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무사히 복귀하였고 둘리틀은 중령으로 임명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계 급 특진하여 준장이 되었다. 한편 포로로 붙잡힌 8명 중 3명은 일본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는 데 이는 명백한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다. 나머지 5명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그 중 1명이 수감 생활 중 사망하면서 전쟁 종료후 4명만이 미국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인도양 공습일본의 계획 일본군이 말레이 해전으로 영국동양함대를 괴멸시킨 이후 버마까지 진출하자 영국은 일본이 인도양까 지 진출하여 인도 식민지를 위협하는 것은 아닌 지 우려하게 되었다. 이에 3월 26일 제임스 서머빌을 새로운 영국동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함 5척(HMS 리벤지, HMS 로열 소버린, HMS 라밀레스, HMS 레졸루션, HMS 워스파이트)과 항공모함 2척(HMS 인더미터블, HMS 허미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이탈리아 군과 싸우느라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파견된 전함 5 척 중 HMS 워스파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전함이 모두 제1차 세계대전에 건조된 구식 전함이었고, 말레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부재의 어려움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항공모함 2척도 파견하였으나 정작 항공모함의 함재기는 구식 복엽기인 소드피쉬였다. 어쨌든 이렇게 영국이 인도양 방면의 함대 전력을 강화시키자 일본에서도 거의 점령이 완료된 동남아 시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인도양의 영국함대의 세력을 꺾어놓고자 하였다. 사실 그 내 면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고전하고 있던 독일이 영국의 해군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일본 해군의 인도 양 공략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도 있었다. 이에 일본은 진주만 기습으로 활약한 나구모의 기동부대를 인도양으로 파견하였고 그 목표는 인도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실론 섬(현재의 스리랑카)이었다. 다만 진주만 기습과 달리 이번 원정에서는 수리를 목적으로 빠진 항공모함 카가 대신에 2척의 전함이 더 추 가되어 항공모함 5척과 전함 4척으로 나구모의 기동부대가 편성되었다. 영국동양함대의 대응 나구모의 기동부대가 인도양으로 향했을 때 미국과 영국의 첩보기관이 그 사실을 알아냈고 일본 해군 이 진주만 기습과 동일한 방법으로 영국해군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실론 섬의 콜롬보 항과 트링코말라 항, 그리고 몰디브의 아두 아톨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서머빌은 급조된 영국동양함대 만으 로 일본의 기동부대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육상 공군기지의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여 콜롬보 비행장에는 허리케인 전투기 22대, 스핏파이어 전투기 14대, 풀머 공격기 6대 등 총 42대의 전투기가 배치되었고 트링코말리 비행장에는 허리케인 17대와 풀머 6대, 그리고 영국 해군의 쌍발 폭격기 블렌하임 9대로 도합 32대가 배치되었다. 다만 몰디브 군도의 남쪽 끝에 최근 설치한 제3 의 해군기지 아두 아톨의 경우에는 설치된 지 얼마되지 않고 단순히 정박과 급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 기 때문에 자체 방호시설은 부족한 형편이었다. 서머빌이 전달받은 첩보에 의하면 일본 함대가 4월 1일 경 실론 섬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 정 보는 연합군이 해독하기 시작한 일본군 암호를 기초로 했기 때문에 대체로 정확한 정보였다. 이를 바탕 으로 서머빌이 함대를 일본군이 실론 섬으로 이동할 만한 길목으로 이동시켰으나 4월 2일 밤이 되어도 일본 함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서머빌은 일본이 기만책을 펼쳤던지 아니면 다른 항로로 크게 우 회하여 실론 섬을 향하고 있던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에 일단 급유와 식수 보급을 목적으로 함 대를 분산하여 각 해군기지로 귀항하고 자신은 몰디브의 아두 아톨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 일본의 기동 부대는 예정대로 실론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단지 그 날짜가 영국 첩보군에서 예상한 날짜보다 3~4일 늦었을 뿐이었다. 서머빌은 4월 4일 몰디브로 돌아가자 마자 영국 정찰기가 일본의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아연실색했다. 이에 서머빌은 서둘러 콜롬보 항과 트링코말리 항에 정박시킨 함선을 서둘 러 몰디브로 집결시켰다. 일본의 실론 섬 공습 전개 4월 5일 새벽 5시 일본의 기동부대가 실론 섬의 콜롬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가동부대의 사령관 인 나구모는 영국 함대의 이런 속사정을 전혀 몰랐지만 우연히도 절묘한 시점에 기습공격을 한 셈이 되 었다. 콜롬보의 지상 비행장에서 총 42대의 전투기가 서둘러 출격하였으나 일본의 기동부대의 함재기 가 99식 급강하 폭격기, 97식 함상 공격기, 제로 전투기 총 315대에 달했기 때문에 손쉽게 격추당했다. 다만 일본의 나구모가 진주만 기습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간시설들을 먼저 파괴하라고 지시 하였고 영국의 서머빌 역시 사전에 모든 선박들을 피신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공격기들은 유류 저 장시설이나 항만시설만을 파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콜롬보 항에 군함들이 없는 것을 본 나구모가 역 포위를 우려하여 서둘러 보낸 정찰기가 콜롬보가 공격당하기 직전 출항한 중순양함 2척 HMS 콘웰, HMS 도르셋을 발견하면서 이들을 모두 격침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판단실수로 콜롬보의 기습공격을 허용한 영국의 서머빌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몰디브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 도중경로에 매복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당시에도 몰디브의 아두 아톨의 존재자 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에도 서머빌의 판단실수였다. 나구모는 콜롬보에 대한 공습이 끝나자 실론의 제2항구인 트랑코말리로 이동하여 4월 10일 아침부터 공습을 시작하였다. 트랑코말리의 영국 전투기들도 응전하였으나 32대로 서는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격추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구모는 이번에도 영국 의 주력함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정찰기를 띄웠고 트랑코말리에서 대피하였던 항공모함 HMS 허미즈와 구축함 HMAS 뱀파이어, 급유함 브리티시 서젠트, 콜베트함 홀리호크를 발견하였다. 이들 함선들은 몰디브로 향하던 중 일본군의 트랑코말리 공습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는 되돌아오던 중이 었다. 비록 항공모함인 허미즈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함재기를 모두 육상으로 대피시킨 상태였기 일본 항공모함의 공중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고 결국 허미즈가 가장 먼저 침몰하고 나머지 함선들도 차 례차례 격침되었다. 일본의 실론 섬 공습 모습 인도양 공습의 결과 이렇게 하여 일본 기동부대의 인도양 공습이 끝이 났다. 일본의 피해는 제로 전투기 4대, 99식 급강하 폭격기 10대, 97식 함상공격기 2대로 도합 16대에 불과한 반면에 영국은 항공모함 1척과 중순양함 2 척, 구축함 2척 등이 침몰하고 항공기 40대 이상이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진주만과 달리 항 만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어 콜롬보와 트랑코말리이 군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영국동양 함대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북아프리카의 전선에서 에르빈 롬멜의 독일아프리 카군단의 재공세가 시작되면서 이집트가 위험해졌기 때문에 더이상 아시아의 상황을 신경쓸 여유도 없 어졌다. 이 때문에 영국본국의 함대는 태평양전쟁에 더이상 관여할 수 없었고 이후에는 미국과 영연방 인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가 태평양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항공모함의 등장과 해전 전술의 변화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함정인 항공모함은 20세기 초에 등장했다. AD 1910년 11월 미국 버지니 아 주 햄프턴 항구에서 미국 민간비행사 유진 엘리는 미국의 순양함 버밍햄의 갑판에서 처음으로 비 행기를 이륙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전투함 펜실베이니아의 후갑 판에서 착륙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도중인 AD 1917년 영국 해군은 무역선을 개조하 여 비행갑판을 설치한 세계최초의 항공모함인 HMS 아거스를 진수시켰다. 비록 아거스가 투입되기 이전에 전쟁이 끝났지만 미국과 일본 해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미국이 AD 1922년 3월 석탄선 을 개조한 랭글리를 만들고 일본은 같은해 12월에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건조한 호쇼를 선보였다. 이후 항공모함은 꾸준히 발달하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항공기들을 자유롭게 발진·회수·격납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투범위가 480km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에 빠져 있 는 각국 해군들은 대구경포를 탑재한 대형 전함을 주축으로 삼았고 항공모함은 정찰 또는 추격과 같 은 보조함의 역할만 맡겼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HMS 아거스의 모습 항공모함의 새로운 가능성은 AD 1940년 11월 11일 타란토 해전을 통해서 제시되었다. 당시 영국 해 군은 지중해에서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이탈리아 해군의 전력을 깎기 위해 공격에 나섰으나 이탈리아 전함이 타란토 항에만 정박해 있기 때문에 전함만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해지자 항공모함 HMS 일러스 트리어스가 함재기를 이용하여 전함 3척과 순양함 2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항공모함 의 새로운 가능성에 영국 해군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의 일본 해군 이 타란토 해전의 사례를 연구하여 일본 해군 역시 AD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6척을 이용한 진주 만 기습을 통해 전함 5척을 파괴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아무리 대구경 함포와 두꺼운 장갑으로 무장한 전함이더라도 함포 사정거리 바깥에서 출격한 뇌격기나 폭 격기의 공중공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었다. 미 해군 역시 당초에는 진주만 기습에 서 항공모함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공모함 위주로 일본 해군을 상대하였으 나 나중에는 항공모함의 가치를 깨닫고 태평양전쟁 후기에는 아이오와급 신형 전함이 건조되었음에 도 불구하고 여전히 항공모함의 고속기동부대 위주로 운용하게 된다. [참고] 위키백과 태평양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