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정주영
1. 모욕을 받으면서 시작한 소양강댐
1967년
건설부 발주의 소양강댐 공사는
최저 가격 입찰로
현대건설에 맡겨졌다.
앞서 건설한 춘천댐, 청평댐도
외국 기술을 들여다 공사를 했듯이
소양강댐은 일본공영이라는 회사가
설계에서 기술, 용역까지 맡았는데,
이 공사를 통해 철근, 시멘트,
엄청난 물량의 기자재 값까지
전부 자기나라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속셈이 보였다.
철근, 시멘트는 수입해서 쓴다고 해도
그 산간벽지까지 드는 운반비용이
엄청날거라 갑자기 나는 머리가 무거워졌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순간 소양강댐이 들어설 자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갈과
무진장한 모래가 떠올라
조사를 해보니
주변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하여
사력댐으로 만드는 것이
일본공영의 설계인
콘크리트 중력댐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건설부에 이같이 설명하며
설계변경을 주장하니
관계 정부기관, 일본공영으로부터
극심한 반대와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끝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합리적 추론과 입김?으로)
사력댐으로 결정이 됐다.
그리하여 소양강 다목적댐은
우리 대안으로 바뀌어
30% 가까운 예산 절감을 이뤄냈다.
세계5위 진흙과 돌로 만들어진 사력댐
dnew.co.kr
2. 돈 좀 빌려주시오 '현대조선'
조선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을 제공할 수 있고 많은 연과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종합 기계 공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로서는 조선소 건설이 꼭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차관을 얻어서 여러가지 중장비와 기계들을 사와야만 조선소를 만들 수 있었는데 그 돈이 8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차관 도입 교섭국은 제일 먼저 미국, 일본 순서였는데 두 나라 다 "너희는 후진국이다. 그런 배를 만들 능력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금융 브로커 데이비스의 주선으로 영국 애플도어 엔지니어링과 기술협조 계약을 맺고 런던으로 가서 애플도어 사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도움을 청했다. "아직 선주도 나타지 않고 한국의 상환 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곤란하다"는 대답에 나는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거북선이 그려진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거북선이오.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는 1800년대부터라도 알고 있는데 우리는 1500년대에 벌써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졌지만 우리의 잠재력은 고스란히 있소."
결국 롱바톰 회장의 도움으로 버클레이즈 은행과 차관 도입 협의가 시작됐는데 넘어야 할 험난한 산이 또 있었다. 바로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보여야 했다. 그날부터 나는 울산 미포만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과 그 지역 지도 한 장, 그리고 26만t급 유조선 도명을 들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십상한 소리를 했다.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다."
롱바톰 회장의 주선으로 우리한테서 배를 사겠다는 나보다 더 미친 선주를 찾아냈는데, 바로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그리하여 리바노스한테서 받은 계약금이 입금된 서류를 들고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에서의 차관 도입이 성사되었다.
1972년 3월 '현대조선소' 기공식을 시작으로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2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도크를 파고, 14만 평의 공장을 지었다. 국제 규모의 조선소 1단계의 준공을 본 것이 1974년 6월로 2년 3개월만이었고, 세계 조선사에 최단 시일에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해낸 기록을 남겼다.
1974년 6월 애틀란틱 배런호 진수
3. 중동 진출의 드라마, 주베일 산업항 공사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렀던 일감으로 공사금액이 그 해 우리나라 예산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단 한 번도 해양공사 경험이 없는 '현대'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분다는 식의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가운데 미국, 영국, 서독, 네덜란드, 프랑스의 대단한 업체들을 제치고 당당히 우리 '현대'가 낙찰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현대'는 그 때까지 OSTT 고사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더욱이 30m 깊은 바다 속 암반에 너비 30m의 기초공사를 12km나 해야 하는 난공사였다. 그러나 나는 눈 하나 꿈쩍 안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가하는 사람은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1976년 7월에 착공한 이 공사는 실제 작업의 난이도보다 무경험으로 미지의 공사를 강행하면서 겪는 정신적인 고초가 훨씬 더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문리가 트리고 조금씩 개선되자 나는 모든 기자재를 '현대조선'에서 만들어 필리핀 해양, 동남아 해상, 몬순의 인도양을 거쳐 걸프 만으로 대형 바지선에 실어 나르는 대양 수송 작전 계획을 내놓았다. 다같이 기가 막힌 얼굴들 속에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오일쇼크로 배 만드는 일거리가 없어 침체되어 있던 울산조선소는 주베일 산업항에 들어갈 기자재를 만들어내느라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지선으로 전부 19항차를 해야 했다. 울산조선소에 지시에 터그보트 3천과 대형 바지선 6척을 최단시일 안에 만들어 내고 10층 규모의 자켓이라는 철구조물 89객와 콘크리트 슬래브까지 사우디의 석회석 대신 우리나라 화강암을 섞어 만들어 자켓과 같이 실어 날랐다. 나아가 자켓을 연결하는 빔까지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했다. 빔의 길이는 20m였는데 수심 30m에서 파도에 흔들리며 중량 5백t이 넘는 자켓을 5cm 오차 이내로 20m 간격으로 설치해야 했다. 감독관들이 빔 제작을 중단하라고 난리쳤지만, 우리는 울산에서 제작한 빔을 바지선으로 실어다가 미리 설치해 놓았던 자켓 89개 사이사이에 단 5cm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끼워 넣어 불가능하다며 비웃던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우디 주베일로 해양구조물을 바지선에 싣고 떠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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