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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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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아래에 있는 차 시배지와 관련한 비석. |
지난달 31일 들른,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은 '차의 나라'였다. 계곡과 맞닿은 산기슭에서 해발 수백m의 높은 산비탈까지 곳곳에 짧게 깎은 나무머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크고 작은 차밭들은 폭염을 압도하는 푸른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섬진강변 국도에서 칠불사에 이르는 약 15㎞의 계곡을 낀 소로에는 하동차문화센터를 비롯해 전통 찻집이 즐비했다.
쌍계사 아래 조성된 1만 ㎡의 차 시배지(始培地)를 비롯해 화개면에는 지난해 말 현재 1564농가가 860㏊의 차밭을 가꾸고 있다. 하동군 관계자는 "제주도와 보성의 차나무는 일본산 개량종인 데 반해 하동 차나무는 씨를 뿌려 가꾼 야생종인 데다 섬진강 새벽 안개가 차의 단맛을 더해주는 등 재배여건이 더 나아 맛도 우월하다"고 소개했다. 섬진강 새벽 안개는 지리산 차를 차별화하는 감로(甘露)라는 얘기다.
초의 선사는 화개면에서 우리 차문화의 이론적 뼈대를 확립했다. 첫 작업이 '다신전(茶神傳)' 편찬이다. '동다송'을 저술하기 9년 전인 1828년에 있었던 일이다. 다신전은 창작이 아니라 명말청초의 백과사전 '만보전서' 중 '다경채요'를 베껴 만든 책이다. 책은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고 보관하는 방법, 차를 끓이고 마실 때의 유의사항, 물의 선택과 다기 등 23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선사는 다신전을 동다송 저술의 기초 자료로 활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선사가 이 책에서 차를 신격화했다는 것이다. 차를 마신다는 건 차와 물과 불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이다. 좋은 물에 적당량의 차를 넣고 적당한 온도로 우려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넘치거나 모자라면 제대로 된 맛과 향, 색을 즐길 수 없다. 중용(中庸)의 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야만 다신(최상의 차)을 불러낼 수 있다. 다신의 호출은 선적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는 선사의 핵심 사상인 다선일미(茶禪一味:차와 선은 하나)와 관통한다.
■초의차 산실 칠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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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다신탑비. |
이날 칠불사 '아자방(亞字房)'의 문은 굳게 닫혔고 건물 밖에는 대나무로 엮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스님들의 하안거 결제를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인적이 끊긴 절집 마당에는 정오의 뙤약볕만 따갑게 쏟아져 흥건히 고인 정적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초의 선사는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49일간 지속된다는, 아(亞)자형의 구들이 놓인 이 방에서 다신전을 펴냈다. 다도에 무지한 스님들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선사는 '총림에도 간혹 조주(趙州)의 유풍이 있다. 하지만 모두 모르므로 베껴 써서 보이니 두려워할 만하다'고 썼다.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는 뜻의 '끽다거(喫茶去) 화두'로 선풍(禪風)을 쇄신한 중국 당나라 조주 선사의 다선 풍습이 당시 우리 절집에도 일부 남아 있었지만 대다수 스님이 다도를 몰라 차의 참맛을 즐기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스님들이 다도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는 동다송 주석에 상세하게 나온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 리나 군집하여 자란다. 우리나라 차밭 중에 넓기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골짝에는 옥부대가 있고, 옥부대 아래 칠불선원이 있다. 좌선하는 승려들은 늘 뒤늦게 쇤 잎을 따서 햇볕에 말린다. 하지만 나물국 삶듯 솥에서 끓여, 짙고 탁하고 빛깔이 붉으며, 맛은 몹시 쓰고 떫다. 천하의 좋은 차가 속된 솜씨에 망가지고 만다'. 선사는 동다송에서 "무엇으로 너희 옥부대 위에서 좌선하는 무리를 가르칠꼬(何以敎汝玉浮臺上坐禪衆·하이교여옥부대좌선중)"라고 안타까워했다.
다신전은 차의 기본 원리를 제시해 체계적인 차생활을 할 수 있는 길잡이 구실을 했지만, 중국식 차이론을 토양이 다른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한 데 따른 오류와 한계도 있었다. 다신전은 우리 차문화 정립으로 가는 과도기적 단계였던 셈이다. 현재 칠불사에는 선사가 다신전을 펴낸 것을 기리는 탑비가 세워져 있다.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 야생 상태로 자라는 차나무들은 선사의 다선 수행을 묵묵히 증언한다.
■신선 풍모 지리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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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칠불사 아자방. 초의선사가 '다신전'을 펴낸 곳이다. |
우리 토양에 맞는 차이론의 대표적인 예가 '찻잎 따기'다. 초의 선사는 다신전에서 찻잎 따는 시기를 '곡우(4월 20일경) 전 닷새가 으뜸이고, 곡우 지난 닷새가 그다음이다'고 했다. 그러나 동다송에선 '우리나라 차에다 이를 시험해보니, 곡우 전후는 너무 일렀다. 마땅히 입하(5월 6일경) 전후로 해야 알맞은 때가 된다'고 바로잡았다.
선사는 동다송에서 지리산차를 신선에 비견했다. '신선 같은 고결한 풍채 종자부터 다르네(仙風玉骨自另種·선풍옥골자령종)'. 지리산 차나무는 깊은 골짜기의 바위를 뚫고 나와 신령스러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사는 이어 '맑은 밤이슬 흠뻑 머금은/(지리산차를 채취하는) 삼매경에 든 이의 손끝에 기이한 향기 어리네(吸盡瀼瀼淸夜露·흡진양양청야로/三昧手中上奇芬·삼매수중상기분)'라고 했다.
또 이 찻잎을 덖고 말려 우려내 마시면 '맑고 총명함이 막힘 없이 두루 미친다(聰明四達無滯壅·총명사달무체옹)'고 썼다. '신비한 영험 빨라 팔십 노인이 다시 아이가 되고/주름진 얼굴 붉은 복숭앗빛으로 변하네(還童振枯神驗速·환동진고신험속/八耋
顔如夭桃紅·팔질안여요도홍)'라는 극찬도 덧붙였다. 더 나아가 '지리산차 한 잔 마시니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고/몸은 신선이 되어 하늘을 난다(一傾玉花風生腋·일경옥화풍생액/身輕已涉上淸境·신경이섭상청경)'며 선경으로 끌어올렸다. '중국 육안차는 맛, 몽정차는 약효가 있다는데/지리산차는 그 두 가지를 겸한다고 옛사람들은 높이 평가했다(陸安之味蒙山藥·육안지미몽산약/古人高判兼兩宗·고인고판겸양종)'는 객관적인 기술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좋은 차를 '나물국'으로 만드니 선사가 어찌 한탄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선사가 동다송을 써 우리 차문화의 기틀을 다진 것은 견성의 구도행이자 중생 구제의 자비행에 다름 아니다. 조선 말기의 문신, 백파거사 신헌구는 동다송에 이 같은 발문을 달았다. '초의 스님 새 차 달이니 푸른 향기 피어오르네/단산 운감, 월간 차 들먹이지 마오(草衣新試綠香烟·초의신시녹향연/莫數丹山雲澗月·막수단산운간월)'. 초의차가 중국 최고의 명품 차로 거론되는 운감차와 월간차보다 더 낫다는 평이다. 이렇게 선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차문화가 형성되어 갔다. 이른바 '초의 다맥'이다.
# 1000년 살았다는 차나무 동사 자라던 곳에 그대로 보존 처리, 주위 어린 차나무 대를 이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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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 동해로 얼어 죽어 보존 처리돼 있다. 이 차나무 앞에 '2세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
화개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 정금리 회강이골의 해발 200m 지리산 자락 중턱에 뿌리를 둔 이 차나무는 일명 '천년 차나무'로 불린다. 때 묻지 않은 지리산의 정기가 서려 있어서일까. '천년 차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차를 몰고 쌍계사 아래 차 시배지를 거쳐 교행하기 힘든 고불고불한 비탈길을 20분 넘게 엉금엉금 기다시피 가야 했다.
회강이골 도심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주민 오병현(72) 씨에게 이 차나무의 나이를 물으니 "1000년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차나무의 수령을 100여 년으로 추산하고 있다.
차나무는 높이 20m 정도까지 자라지만 찻잎 채취의 편의를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탓에 키가 1m가량인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차나무는 높이 4.2m, 지표면 줄기 둘레 57㎝, 뻗은 가지 너비가 5.6m에 달한다. 수령뿐만 아니라 크기와 굵기도 국내 최대로 알려졌다.
2006년 경남도 기념물 제264호로 지정됐으나 2010년 안타깝게도 동해로 얼어 죽었다. 현재 이 차나무는 보존 처리되어 자라던 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행히 이 차나무의 대를 이은 어린 차나무들이 주위에서 무럭무럭 자라며 '천년 전설'을 이어가고 있다. 이 차나무의 씨를 받아 파종한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