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희망 오직 예수 (마태복음 4:17-25)
1.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지구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입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하나님 죽음의 신학>이라는 이름까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전쟁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은 것 앞에서 하나님을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차마 하나님을 말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죽으신 것이냐?”는 의문에서 나온 신학풍조이었습니다. 그 때에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 한권이 저술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의 말씀과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부활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희망이라는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이나 신약시대의 사람이나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경험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적인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절망 중에 희망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면, 저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항상 저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저에게도 아픔이 있었고, 절망스런 일이 있었고,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모습으로든지 희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2.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살아가실 것입니다.
어떤 희망들을 품고 사시는지요?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희망들이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들은 정말로 희망적인 것인지요?
희망적이냐는 것은 그 희망들이 정말로 우리를 희망하도록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품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라면 그것은 희망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희망을 하였다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라면 오히려 절망적인 것이지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붙잡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권을 샀습니다. 복권이 당첨이 되면 새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사고, 교회에 헌금도 한 움큼하고, 남에게도 좋은 일을 실컷하겠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이루어졌으면 하는 희망이지요.
그런데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미국의 인구가 3억 3천만 명입니다. 그 중의 하나이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적인 것이 아닙니다.
3.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삽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내에게 어떤 희망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거의 비슷합니다.
건강함, 마음의 평안-근심 걱정 없는 것, 가정의 화목, 자녀들 잘 되는 것,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을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시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빨리 천국에 갔으면 할 것입니다.
근데 이런 희망들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희망적인 것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희망적인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희망적인데, 내가 할 수 없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아야 한다면 희망이기는 하지만 희망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건강이 희망인 것이지요. 건강해야 인생도 즐길 수 있고, 희망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그런면에서 건강은 희망적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운동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건강도 희망적이지는 못한 것입니다.
4. 희망이 희망적이지 못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는 희망을 가졌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들이 많은 것입니다. 지내놓고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은 좋지만, 희망을 희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희망을 했다가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한 절망이 싫어서 희망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믿고 잘 해 주었는데, 몇 번 사람으로부터 큰 실망을 겪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뽑을 때에 그 사람이 정말 희망적이기를 바라지만, 임기가 끝나고 나면 온갖 비리로 가득하여 심지어 감옥에까지 가는 일이 있습니다.
희망이 자꾸 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5. 그래도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못삽니다. 또 속을지라도 소망을 붙잡고자 합니다. 그것은 소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고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희망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희망이어야 할까요? 어떤 희망을 붙잡고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람에 대한 희망이 가장 값진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나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희망이 있을 때에 살맛이 납니다. 자식이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고 싶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인하여 실망을 당하였을지라도 사람에게 희망이 있어야 내 인생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희망이 없기에 “인생은 다 똑같다”면서 사람에게 희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지 않으면 저 사람도 내게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또 저 사람이 내게 희망을 가지면 희망이 없었던 내게도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6. 어떤 분은 사람에게 희망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 희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너무도 부패하고 타락하였기에 더 이상 세상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희망하면서 믿음으로 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도피하자는 말이라면 틀린 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선교사들에게 교회에서 희망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희망적인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독립의 희망을 품고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이 세상에 희망을 품지 말고 저 천국에 소망을 품고 살라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이 선교사의 뺨을 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셨고, 이 세상에서 믿음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희망을 품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시면 몰라도 우리가 포기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잘못되어서 망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일이지, 우리가 포기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이 있고, 나 자신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적인 것입니다.
8. 희망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희망적인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너도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 희망적인 한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희망이 되면 나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희망적인 인생을 살면 또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담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한 가지 희망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희망을 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희망이 모든 사람의 희망이 되었고, 또 영원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더욱 그 희망이 진짜 희망이었음을 지난 역사를 통해 입증해주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알게 되면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희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온 이래로, 그분을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는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9. 오늘 말씀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바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무엇이 이들로 콩깍지를 씌우듯이 예수님을 따르게 한 것일까요?
그것이 힘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강압적으로 하여 되는 일일까요?
그것은 오직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희망이 생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말이고,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10.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셨습니다.
심지어 각종 병에 걸린 자, 고통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 곁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찾아오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약함을 인전하고 그들의 약함을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약한 것을 고쳐주시면서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희망을 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그렇게 따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망과 절망 중에 사는 사람이 주님으로 인하여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을 가리켜 천국이 찾아온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희망이 없는 사람이 참된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 천국의 시작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11.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휘어진 화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란 화살이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과녁은 우리 인생의 창조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과녁을 향해 날고 싶지 않은 화살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인생이든 태어나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지 않습니다. 계속 허공으로 날아갑니다. 딴 곳으로 날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화살이 휘었기 때문입니다. 화살이 휘었다는 것은 잘못 만들어졌음을 말합니다.
인생이 태어날 때에 모두가 죄를 가지고 태어나서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화살을 고치는 것이 비법입니다.
12. 이 화살을 고치는 것이 바로 희망이 없는 인생 속에 희망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자기 욕망이 앞선 인생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어 사랑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쳐진 화살입니다.
희망을 품고 사는 화살입니다. 사랑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입니다.
예수님은 휘어진 화살을 사랑의 화살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의 화살이 되면 어디에 맞히든 사랑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14. 희망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때에 마음에 희망이 생기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희망은 가까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능히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누군가 실망할 터인데”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희망을 얻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나라도 이렇게 하여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하는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을 보면서 희망을 얻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여러분이 합심하여 교회를 유지하고 전도하려 하고 부흥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제게도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배에 빠지면 교인이 많지도 않는데 목사님이 얼마나 실망하실까” 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시는 것을 보면, 여러분이 제게는 희망적인 것입니다.
15. 두 가지의 내용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적이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주님은 나의 희망입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희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말할 때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