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58
4월12일[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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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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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y3M4S7gs8s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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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우리 눈이 활짝 열리게 될 때 얻게 될 영적인 은총!>
전통적으로 저희 수도자들은 부활 대축일 다음날 엠마우스 소풍을 떠납니다. 저희 공동체도 오랜만에 서해 반대쪽 동해로 엠마우스 소풍을 왔는데, 토네이도 못지않은 강풍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주님과 함께 걸은 두 제자의 은혜로운 체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클레오파스라는 제자와 다른 한 제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등장하셨지만, 두 제자는 예수님임을 알아뵙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두 제자의 눈에 뭔가에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의 눈을 가린 가림막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히 예수님 죽음으로 인한 낙담과 좌절, 그리고 예수님 불신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길을 걸어가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기도 하고, 성경 전반에 걸쳐 가르치시기도 하고, 그렇게 몇 시간을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만을 위한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질문도 던지시고, 그에 대한 토론도 나누시고, 답변도 해주십니다. 두 제자의 무지와 불신에 다그치기도 하시고, 격려하기도 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서에 대해 자상히 설명도 해주시고,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소상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두 사람만을 위한 말씀의 전례가 끝날 무렵, 날이 저물고 해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두 제자는 한 숙소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드디어 성찬의 전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빵을 떼시는 순간, 두 제자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바로 당신 앞에 계신 분이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스승님께서는 홀연히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홀연히 사라지신 후 두 제자의 고백이 의미심장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복음 24장 32절)
우리 역시 매일의 미사 중에 말씀의 전례 가운데 온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말씀에 몰입할 때, 자연스레 우리 마음은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처럼 뜨거워질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인해 뜨거워지고 열렬해진 우리 마음을 안고 성찬의 전례로 넘어갈 때, 우리는 빵과 포도주 안에 생생히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뵙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장애물은 어떤 것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언젠가 우리 눈이 활짝 열리게 될 때 얻게 될 영적 은총은 어떤 것인지 기대해봐야겠습니다.
우리 눈에 어두운 장막이 걷히게 될 때,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행복한 얼굴로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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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m15z9eqZ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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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으로 부활 체험하는 법>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단순하게 복음을 분석해보면 처음엔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당신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야 함을 이해시켜 주시는 장면과 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여 그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를 통해 가슴 뜨겁게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란 특별히 구약의 내용이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회가 특별히 강론 때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너무도 당연함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는데, 여기서는 교회를 맞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알려주셔서 예수님을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했듯이, 신자들은 성경을 이해시켜 주는 교회에게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선악과를 봉헌하는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 체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몸까지 씻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몸은 씻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는 발까지 씻기지 않습니다.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적어도 말씀으로 어느 정도는 깨끗해져야 발을 씻어주실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살하기 직전인 사람이 바로 성경 말씀을 배우거나 성당에 다니는 일이 가능할까요? 어떤 열매도 단숨에 맺히지 않습니다. 씨가 뿌려지는 순간부터 그에 합당한 정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트랜스포머 주인공으로 유명한 샤이아 라보프는 얼마 전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찍 배우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권총을 장전해놓고 언제든 자살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구도 그를 응원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고 어린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기도 하였습니다. 부모가 이혼하여 홀어머니 곁에서 자랐어도 그는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을 믿었고 유명해지기는 하였어도 할리우드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항상 옳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폭행과 시비로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결국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계획이 달랐다고 믿는 순간 가야 할 길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이것을 바꿔준 계기가 있는데 알코올 중독 치료사로부터 받은 테이프였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새옹지마’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로 이뤄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 여자친구가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소리를 지르고 옷을 찢고 폭력까지 행사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그리고 차로 어디까지 바래다주면 되겠느냐고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 하나로 자신이 그렇게 바뀌는 것이 신기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교만을 꺾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받아들여 바티칸에서 하는 교육도 받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인생길에서 이것이 스토리의 힘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설명하시는 것은 말씀으로 그들의 생각을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고 말씀이 전해진 대상을 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가 되고 그러면 부활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부활이 있다고 믿어야 선행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되며 조금씩 더 강도 높은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지금은 성경 말씀이 우리 생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해석이 아닌 문자적, 윤리적 해석에 머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성경 고부가 십자가를 지게 하지 못합니다. 지식적인 것만으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겸손해지는 성경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이 있어서 현재를 참아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게 할 수 있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때 말슴이 부활을 체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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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모두가 천사라면’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생각나는 가사는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이 곳은 천국이겠지 하하하하/ 우리 마음속에 욕심도 없어지고/ 얼마나 화목해질까 하하하하/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눈물은 사라져가고 하하하/ 우린 꿈을 꾸듯 언제나 행복하게/ 이리저리 날아갈 거야.”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뜻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셉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천사는 날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뉴욕은 처음 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호텔을 예약해 드리고, 짐을 날라 드렸습니다. 저의 작은 정성이지만 그분들에게 저는 ‘천사’와 같았을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르지는 않겠지만, 형제님이 하는 사업이 잘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천사를 만났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도로에 떨어진 나무판 같은 것을 지나갔습니다. 소리가 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차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지만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왔는데 누군가 차에 종이를 부쳐 놓았습니다. 종이에는 ‘차에서 기름이 떨어진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차 밑을 보니 차에서 기름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마운 사람은 차 밑에 모래를 뿌려 놓았습니다. 당황하고 있는데 종이에 기름이 새고 있다고 하던 분이 와서 ‘토잉 카’를 불러주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 누군가 종이로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냥 차를 몰고 갔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차에 화재가 날 수도 있었고, 고속도로에서 차가 서버리는 낭패를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차는 무사히 토잉 카로 정비업소로 옮겼고, 고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천사와 같은 분들이 많습니다. 차에 기름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친절하게 알려준 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 하루였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천사’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동안 사목하시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피부병 환자를 옮기다 본인도 피부병에 걸렸는데 환자가 쾌유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10년 동안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분들이 다시는 슬픔도, 아픔도 없는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고통과 아픔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토론토로 신문홍보를 하러 갈 때입니다. 제가 신문홍보를 잘 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이 있습니다. 왕복 10시간을 차량봉사 해주었습니다. 신문홍보가 잘 되면 저보다 더 좋아하셨습니다. 신문홍보가 덜 되면 저보다 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없다면 어두운 우주만 있을 것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사도행전은 ‘천사’가 되어준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고, 신자가 3000명 이상 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금이나 은을 주는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베드로 사도는 천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함께 길을 걷던 나그네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 나그네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집으로 모실 수 있다면, 우리가 천사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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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르고 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신다. 그분이 바로 길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걷고 있지 못했다. 그분은 그들이 길을 벗어나 헤매고 있음을 아셨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가 되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그들이 실망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우리가 매일 먹는 빵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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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3-16)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늦은 오후쯤이었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원래의 인생으로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원래의 인생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인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처럼(요한 20,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가리어’라는 표현만 보고서 하느님께서 두 제자의 눈을 가리셨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나는 것을 ‘방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21)
두 제자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왜 메시아이신 분이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반대자들을 제압하고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라는 말과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아직은 그 믿음을 잃은 것은 아닌데,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다면, 금방 부활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5-27)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만 설명해 주시고, 부활은 설명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다는 것만 기록하고, 그 설명의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안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메시아께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이해했고,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부활 신앙으로 이어졌고, 부활 신앙을 갖게 되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변화 과정은 ‘불신’에서 ‘신앙’으로 바뀐 과정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에서 ‘깨달음’으로, ‘깨달음’에서 ‘신앙’으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그들이 아직 이해 못 하던 때의 상태를 ‘불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해가 안 되어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인 ‘신앙인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점과 예수님이 그렇게 사라지셨는데도 두 제자가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고, 아쉬워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줄어들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간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신다고(현존하신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증언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33절-35절) 믿는다면 증언해야 합니다. 자기 혼자서 속으로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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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루카가 전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정체는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두 제자에게 다가가시지만, 이들은 눈이 가리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24,16 참조). 제자들의 눈을 가리신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눈이 가리어지다’는 수동태 표현은 부활 이야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려고 복음서 저자가 사용한 문학적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어느 집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24,31 참조).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가리시어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셨다면, 이제 그분께서 그 만남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불신하는 제자들을 믿는 이로 변화시키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좌절과 실의에 빠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24,26-27 참조). 이로써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제자의 모습은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려진 눈을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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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에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할까요? 가려 있는 우리의 눈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는 절망하거나 실패하였을 때입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은 과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실 줄 알았던, 그래서 자기 생애를 내맡겼던 분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의 눈이 가려집니다. 그렇게 걷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믿고 따랐던 예수님, 말씀과 행동에는 힘이 있어 마치 모세를 보는 듯하였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했듯이, 그분께서 로마 점령군에게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릴 줄 알았는데, 그만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수난과 영광에 대하여 들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영광만 누리고자 하였던 욕망의 길과 죽음까지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던 비늘이 떨어져 나갑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 생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에 이르는 사랑, 이 고단하고 힘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마음이 타오르고 눈이 열립니다.
과테말라에서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냐면, ‘내가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으로 함께하고 일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들 때예요.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랑이 고난받는 것인 줄 몰랐니? 고난 다음에 영광이 온다고!’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단순한 이치를 왜 자꾸만 잊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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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길동무 예수>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고독합니다.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심동체라는 부부 사이일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대신해서,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삶을, 아내는 아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길을 내 발로 걸어야 하는 인생길이기에 반려가 필요합니다.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대신 걸어줄 수도 없지만 어깨동무하고 함께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사랑이란 외로운 인생길에서 넘어지지 않고 완주할 수 있도록 서로 도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숨진 스승 예수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실망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 옆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 길을 갑니다. 그분은 진리의 말씀으로 실의에 빠진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줍니다. 힘든 인생길에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식탁에 앉아 생명의 양식도 나누어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귀의하십시오. 그분이 길동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당신의 가슴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분이 내어주시는 생명의 빵을 먹고 당신의 인생길을 완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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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도 베드로>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모태에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거지를 만난다.
마흔이 넘도록(4,22) 성전 문 옆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던 그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가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로부터 적선을 구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러니 40년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신세 한탄을 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리라. 그 자리에 앉아 구걸하기 위하여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때로는 아부를 해야 했고, 그래서 비굴하리만큼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했으리라.
남들에게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불의를 당하거나 모진 수모를 당해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니 때로는 하느님과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땅을 치며 통곡하고 지내던 날들도 많았으리라.
이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그가 그날도 여느 날처럼 성전 문 옆에서 구걸하는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 곁을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여느 때처럼 적선을 청하였다. 그런데 사도들이 “우리를 좀 보시오.” 하고 말을 건넨다. 거지는 혹시 이 사람들이 어떤 귀한 것이라도 줄까 하는 호기심으로 사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거지는 자기도 모르게 베드로의 손에 이끌려 일어났다. 그랬더니 앉은뱅이인 자기가 일어서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걷고 있지 않은가? 아니 껑충껑충 뛰어보니 뛰어지지 않는가? 이처럼 놀라운 기적이 자신에게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거지도 아니요, 앉은뱅이도 아니며, 남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세상과 조상,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두발로 서서 걷고, 남들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정상인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는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되어 세상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다.
앉은뱅이라는 육신의 불구에서 치유되었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복되고 좋을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불구에서 치유된 것이다. 육신의 병은 병원에서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병은 어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사도들이 가진 최고의 보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거지가 구하던 세상의 재물들을 쓰레기로 여긴 사람들이었다.(필립 3,8)
베드로는 자신이 믿는 예수님의 능력과 은총에 의지하여 그의 병을 치유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메시아이며,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그러한 사람은 많이 있다. 육적인 장애보다 영적인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많이 있다.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여 살아가는 사람, 짜증이나 신경질, 화나 증오심, 어둡고 음울함, 공허감과 허무감으로 인하여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 삶의 의미나 보람, 기쁨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총으로 그들을 고쳐주어야 한다.
우리도 사도 베드로처럼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그들을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도들처럼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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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할 말이 없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쳤습니다. 가족을 품에 안을 갈망만이 남았습니다. 시간은 무심히 가고 속수무책입니다. 순간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잃은 허망함은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이나 기다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생환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도 이러한 부활의 기쁨이 담겨 있기를 마음 모아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 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린 것이고, 그분께서는 곧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는데 당신의 목적 달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알 것을 알고 절망이 기쁨으로 채워졌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곧바로 일어나 기쁨을 지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새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저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고통을 받지만 낙담하지 않습니다. 혼란되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시련받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내쫓기지만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시련은 잠시뿐이지만 다가올 삶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성녀 엘리사벳 시튼)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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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송도에 살면서 좋은 점 하나는 대중교통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나와 20분만 걸어가면 전철역이 있어서 어디든 시간 맞춰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서울로 강의 갈 때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강의라서, 30분 전에 도착할 생각으로 2시간 전인 저녁 5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직접 운전하지 않으니 2시간 동안 좋아하는 책이나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기분 좋게 성당을 떠났습니다.
저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전철 안에서 완전히 녹초가 된 것입니다. 마침 그 시간이 퇴근 시간이라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강의 때 나눠줄 선물이 있어서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 틈에 끼어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예전에 지하철 안에 성범죄 단속을 위해 CCTV를 시범적으로 설치했는데, 녹화된 영상에는 하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의 머리만 찍혀 있어서 무용지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매일 출퇴근을 지하철로 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싶더군요. 직접 체험하니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해 보지 않은 것을 두고 쉽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쉽게 판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남의 아픔을 나의 경험만을 내세워 말한다고 해결될까요? 그의 경험은 자기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과 나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법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도 인정하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복음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몇몇 여자로부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서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아닌지 토론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였음에도 말이지요.
저녁때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주님께서 빵을 떼실 때야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의 경험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었겠지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주님과 함께하며 들었던 모든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다시금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만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믿는 삶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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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여 길을 떠나시게나>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안식일 다음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벗이여 길을 떠나시게나>
벗이여
길을 떠나시게나
승리의 길이 아니라
패배의 길일지라도
기쁨의 길이 아니라
아픔의 길일지라도
멈추지 말고
한걸음 내딛으시게나
그대 걷는 길에서
그대 곁에는 늘
길이신 분께서
길을 내신 분께서
길로 부르신 분께서
함께 걸으시리니
벗이여
길을 떠나시게나
길이신 분께
길을 물으며
길을 내신 분의
길을 헤아리며
길로 부르신 분의
길을 따라서
멈추지 말고
힘차게 나아가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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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마음의 굼뜸>
굼뜨다는 것은 느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동작이 굼뜨다고 하는데 오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굼뜨다고 하고, 마음 중에서도 믿는데 마음이 굼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굼뜬지 오늘 복음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몇몇 여자가 깜짝 놀랄 일을 전했는데 죽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고, 천사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거였으며, 여자들의 말뿐 아니라 몇몇 제자들도 가봤는데 그들도 못 본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제자들은 왜 이렇게 믿는 데 마음이 굼뜬 것입니까? 그리고 이들만 이렇게 믿는 데 마음이 굼뜬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사실 우리도 믿는 데 굼뜨고 특히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믿는 것이나 죽음에서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아 굼뜨게 마련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은 대체로 실망이나 절망은 빠르지만 그 절망에서 희망을 되찾거나 부활을 믿는 것은 굼뜹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얕은 희망, 곧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는 깊은 희망을 가지려 하지 않고 얕은 희망인 기대를 가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대란 대부분 손 안 대고 코를 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어려움 없이 좋은 것을 손에 넣게 되기를 기대하고 고통이라는 대가 없이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대하며, 제자들처럼 수난 없이 영광만 있기를 기대하고, 심지어 그 좋은 것을 남이 공짜로 주기를 기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공짜로 좋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절망의 마음이 쉽게 희망의 마음으로 돌아서기 어렵고,
그래서 부활이나 희망의 상황을 믿는 데 굼뜨게 되지요.
사실 큰 희망이랄까 위대한 희망은 겨울을 이겨낸 이 봄의 꽃들처럼 온갖 역경과 절망을 이겨내고 피는 겁니다.
그러니 좋은 것을 쉽게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희망하던 사람이, 다시 말해서 그런 기대와 희망이 습관이 된 사람이 절망과 죽음을 이겨내야 하는 희망과 부활의 믿음을 갖기란 혹독한 추위를 각오하지 않고 봄꽃을 피우려는 것처럼 쉽지 않지요.
그래서 아무리 예언자들이 예언을 하고,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를 하고, 천사들이 부활을 알려줘도 믿는 데 마음이 굼뜰 수밖에 없습니다.
수난 없이 영광만을 찾는 사람에게 수난을 거쳐야만 갖게 되는 부활의 영광을 믿는 것은 굼뜬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아닌지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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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 계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105,3)
인간 영혼의 병에 최고의 만병통치약이 뭔지 아십니까? 파스카의 희망,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선사되는 파스카의 희망이, 파스카의 기쁨이, 파스카의 평화가 최고의 명약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만남중의 최고의 만남이 부활하신, 살아계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선물, 파스카의 주님이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요즘 부활시기의 말씀은 온통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읽게 되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불구자를 치유하는 장면은 언제 들어도 신이납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성전문 곁에서 구걸하던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걸인의 치유입니다. 성전문을 들어서려던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자선을 청하는 불구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불구자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시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 순간, 말그대로 아이컨택트 눈맞춤이 발생합니다.
서로간의 만남에 아이 컨택트의 눈맞춤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아마도 요한과 함께 베드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그윽한 사랑의 눈길로, 부활하신 주님의 눈길로 태생 불구자를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태생 불구자를 치유한 베드로의 이 말마디는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인지요! 말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니 모두가 경탄하고 경악합니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요! 요한과 베드로 사도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놀라운 치유입니다. 태생 불구자의 치유로 정말 말그대로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사도야말로 최고의 영적 부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좋은 보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일치의 삶을 살기에 이런 치유의 선물입니다. 정말 우리가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게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선물할 수 있다면 최상, 최고의 선물이 될것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살아계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교회의 전례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임을 저는 참으로 많이 강조했습니다. 도대체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두 사도가 이런 치유의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은 평소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행복기도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살아계신 주님과 만남의 선물이 바로 위로와 치유, 정화와 성화,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세상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주님의 무상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도대체 모든 것을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면, 치유가 없다면, 위로가 없다면 삶은 얼마나 황량할까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 모두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 계신 파스카 주님을 만날 때의 무상의 선물들입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했던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유일한 궁극의 처방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 말씀의 빛입니다. 이래서 무지와 허무의 병의 치유에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건강에, 무지와 허무의 병의 치유에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결정적인 처방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뿐이다”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래서 주님과 만남의 일상화, 생활화를 이뤄주는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날마다 바치는, 우리의 평생 거룩한 의무인 찬미와 감사의 시편공동전례기도와 미사공동전례기도 수행이 그처럼 고마운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공동 전례 수행의 부단한 선택과 훈련 및 습관화보다 영육의 치유와 건강, 영적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후에는 빵을 떼어주실 때 주님을 알아뵈니 말그대로 오늘 복음은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진 미사전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다음 두 제자의 고백은 그대로 말씀전례의 은총에 대한 고백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어, 두 제자의 환대의 부응하여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니 그대로 성찬전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의 여정에 주님과의 만남을 일상화해주는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진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가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나는 우리 모두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시며,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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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0)
<성체의 기적!>
오늘 복음(루카 24,13-3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1스타디온 185mx60=약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도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기들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곧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의 기적'입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 받느냐?"(루카 24,17)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라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몇몇 여자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망하여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지 못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매일 우리에게로 내려오십니다. 이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부활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해 매일 겸손한 모습으로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도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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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ogd4HXN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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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 35)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
엠마오의
부활입니다.
무료한 일상을
다시 활기있게
하는 부활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부활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헤어진 예수님을
말씀과 식사로
다시 만납니다.
말씀과 식사는
막혀있던
제자들의 일상을
부활의 일상으로
새롭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상이
부활의 삶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삶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행이며
오늘입니다.
오늘의 부활은
뜨겁게 타오르는
말씀이며
우리를 살게하는
성찬의 식사입니다.
말씀과
빵의 식탁에서
다시 만나는
예수님의
따뜻한
부활입니다.
부활은 일상을
새롭게 만나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의
새로워진 일상이
예수님의 부활이며
우리의 부활입니다.
기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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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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