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28.부활 제2주간 목요일
사도5,27-33 요한3,31-36
예닮의 여정
- 참나의 삶; 사랑과 순종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2.9)
어제에 이어 반복되는 화답송 시편은 늘 들어도 새롭고 좋습니다. 건강한 영혼의 본능적 영적 욕구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믿는 이들은 물론 누구나의 깊은 영적 욕구는 참나의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영적 본능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라 갈파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찾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궁극의 목표도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삶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참내가 되어 참삶을 살 때 참기쁨에 참행복일 것입니다. 작년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써놨던 ‘평생소원’이란 고백기도문 일부를 나눕니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의 구원의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이것 하나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이런 하느님의 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영혼 깊이에서의 갈망입니다. 이래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일컬어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하느님과 하나되는 예닮의 여정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사막교부들의 언행록중 사막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일컫는 안토니오 압바의 두 일화를 나눕니다. 예수님을 닮아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았던 수도자들의 모범, 안토니오 압바였습니다.
-세 제자들이 해마다 복된 안토니오를 찾았습니다. 그들중 둘은 스승 안토니오에게 자신의 생각들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스승의 자문을 구했으나, 오직 한제자만은 언제나 질문 하나 함이 없이 침묵중에 머물뿐이었습니다. 얼마후 안토니오와 그 제자간 오고 간 대화입니다.
“너는 여기 방문할 때 마다 있는 내내 어떤 질문도 결코 하지 않았다.”
“사부님, 저에겐 사부님을 뵙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It’s enough for me just to see you, father).”-
아마 제자는 침묵중에 예수님을 닮은 복된 안토니오를 모습을 보며 모든 답을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 예화입니다.
-한 원로가 하느님께 사부들을 뵙게 해 주십사 청했고, 하느님이 원로에게 사부들을 보여 줘 보았을 때, 안토니오 아빠가 보이지 않자 그 원로와 하느님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안토니오 압바는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이 계신 어디든, 거기 안토니오 압바도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늘 하느님과 함께 일치된 영원한 삶을 살았던 안토니오 압바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생전 처음 수도원의 저를 찾았던 94세 송율리안나 자매와 83세 한젬마 자매를 잊지 못합니다. 노년에도 치매기 하나 없는 밝고 맑은 웃음에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에 또랑또랑한 음성이었습니다.
참으로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는 튼튼한 영혼의 자매들이었고, 참 많이 예수님을 닮은 분이었기에 예수님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환대했습니다. 83세 한젬마 할머니는 수년간 날마다 제강론을 200명에게 발송하다 요즘은 50명에게 발송한다 하며, 94세 송율리안나 자매는 수년간 제 강론을 날마다 받아봤던 애독자라 고백했습니다. 새삼 디지털 문명의 경이로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믿는 이들 삶의 여정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날로 하느님과의 일치가 깊어져 가면서 참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 목표이자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요 기쁨이자 행복일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됩니까? 답은 단 하나 간단합니다. 주님께 사랑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진리 말씀이신 주님께 사랑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은 결속관계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매하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구체적 행위를 겸비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복음서 저자의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깊은 묵상을 전해줍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한량없이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우리들에게는 유일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하느님과의 일치로 인간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회복하여 참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참내가 되어가는 사랑과 순종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면초가의 적대적 상황속에서도 용감히 주님을 증언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참나를 산 사도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 사도들의 확신에 넘친 감동적 고백을 전부 인용합니다. 역시 핵심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순종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 증인입니다.”
참으로 회개하고 죄를 용서 받는 길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길은 오직 하나, 우리의 영도자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순종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는 참으로 무지에 눈먼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최고의회 일원들이 참 개탄스럽습니다. 문득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 진리에 순종하다 순교한 토마스 모어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착한 종이지만 이에 앞서 하느님의 첫 번째 종입니다.”
물론 왕도 사랑했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거스를 수 없어 진리에 순종하다 거룩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함으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참나의 삶을 살게 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새삼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 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과 순종의 예닮의 여정,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마태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