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國民의 ‘中道化’가 문제가 아니라, 右派의 권력적 어피니언 리더가 ‘개념’이 없는 게 문제.
바다를 건너다는 일관되게 주장한다. 국민의 중도화는 ‘개념없는’ 우파의 권력적 어피니언 리더가 있기에 가능한 ‘결과’이지, 권력적 어피니언 리더의 개념없음을 정당화할 근거가 아니란 것이다. 닭과 달걀 수준이 아니라, 바뀔 수 없는 ‘선’ ‘후’관계가 있다.
1987년 이전에 ‘安定’을 가져다주는 보수 색깔은 ‘善’이었다. 2006년에 ‘安定’을 말하는 보수 색깔은 ‘惡’이다. 그 변화는 누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어떻게 왜 가져왔는가? 친북좌파의 ‘연방제’통일의 숨막힌 정서를 뚫고서 ‘안정’속의 경제 발전을 바란다는 우파의 열망은 누구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왜 샌드위치로 몰리게 되는가? ‘안정을 바라는 기대’는 어떻게 내부에서조차 외면당하는가?
친북좌파정서에 오염된 이들의 애닯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서 조국근대화 경제 발전에 힘을 기울인 박정희대통령을 미워했던 이들은, 권력을 잡고 나서 ‘안정 속의 경제 발전’을 바라는 모든 열망을 침묵 시키고서 ‘안정 속에 경제 발전’의 전형적인 슬로건인 ‘무한전진’을 뺐어서 북한민주화운동에 적용했다. 국민의 안정을 바라는 모든 열망은 간절한데도, 우파 내부에서조차 왜소화시켜서 퍼뜨리는 권력적 어피니언 리더가 있으니, 그 반영으로서의 ‘중도층’ 확산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폭력 가정에서 ‘자녀’가 폭력자녀로 자라나듯이, ‘대화’가 안 먹히는 친북정서에 오염된 어르신들을 무시하고 추진한 경제 발전 모습에 ‘미움’을 익혀 먹은 ‘개념없음’으로 무장한 우파의 권력적 어피니언 리더들이 정말로 문제일 것이다. ‘바다를 건너다’의 국민의 안정이 우파정당마저도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다니 하면서 외칠 때마다, 박정희대통령과 감정을 일치시키며 ‘무시하려는’ 논리를 볼 때마다, 친북좌파정서에 오염된 자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철면피에겐 박대통령의 경제발전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를 느끼며 무서움에 절었다.
한나라당의 잘못은 ‘기독교 방송 텔레비전’ 목사님의 설교내용 일부에서가 더 적절하다.
군사정부에서 모든 이념 문제를 국가정보기관이 관장했다면, 김영삼 장로님(前대통령)께서 이념 문제를 文士와 民間(文民)에 맞겼다면, 의당 기독교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우파 이념 스탠스에서의 좌파 이념 비판 입장이어야 한다. 그러나, “배우면 천당에 못간다”류의 설교가 나오는게 무슨 말인가? 일제 때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선 ‘기독교’도들의 계몽정신을 버렸다. 한국의 목사님들은 아직도 ‘소’를 잃고서도 ‘배움은 힘’이고 ‘아는 게 힘’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국가권력이 좌익 이념을 방어하는 선에서 ‘시민사회’의 방어력으로 권력 이전하려는 생각 없이(1993년부터 1997년까지 20대들은 전부 사기당했다. 시민사회에 이전하는 줄 알았다.) 좌익 이념에만 보수 언론을 통해서 포커스를 맞추었다. 전대협이나 한총련 출신의 낮은 서민들의 국가반역적 좌경이념 공부에는 철퇴를 들되, 서울대학 외 명문학원들의 좌경 반역 이념 공부에는 보수 언론은 정신없는 홍보를 해줬다. 한나라당을 둘러싼 ‘우익도 좌익’이요 ‘좌익도 좌익’이란 발상은, 전대협 한총련등 김일성 김정일 관련자에 선별적 처벌만 좋아했지 마르크스의 논리에 빠져 사는 보수 언론들의 수동적 반영이다. 이해찬 총리의 전직 좌경 운동권 전력을 아무리 떠벌이더라도, 1990년대 대학가를 지낸 사람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가득 메운 창작과 비평계 잡지에 가끔 글을 기고하는 전대협과 다른 학생운동권으로만 안다.
민족문제는 지금 당장 화제가 되지 않더라도 잠재적 폭발성이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에 대해 대응 방안이 있어야 하는데도, 한나라당은 정부여당의 방침에 대해 반대만 하다 보니 수구세력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반대만’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20대 30대에 인기를 갖춘 질적 수준이 높은 이념 전달자의 개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월간조선>의 우파 어피니언 주도력의 독점화와 관련이 있고, 그들의 일관된 관점이 1970년대적 인식관과 구세대 우위에서 1980년대식 사유를 철부지의 것으로 모는 것에 관련이 있다. <월간조선>의 주도력에서 좌파와 대등하게 맞서 싸운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월간조선>은 단 하나의 유일한 절대 매체가 되지 못한다. 경쟁하며 극복한다는 인상을 한번도 준바가 없다. 네오콘 닮게 뉴레프트에 ‘경쟁하고 극복하는’ 인상을 갖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더니, 뉴라이트는 뉴레프트와 친구가 된다고 한다.
우파 어피니언 형성이 <월간조선>의 지식 정보 생산에 결정적인 영향이 있고, <월간조선>의 마케팅 전략이 좌익의 속살을 파헤쳐서 극복하는 식보다는, 구세대들의 과거 지향적 만족감을 높이는 식이 되기에, “경쟁하며 극복하는” 이미지의 실제적으로 마음을 끌게 하는 요소의 사람들이 드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애국우파 중심부가 구세대 위주의 70년대식 사고력에 구호위주 방식이 ‘비판의식’ 이전이 ‘반대논리’란 염증을 낳게 하기도 한다. 윤여준씨의 한나라당 비판은 윤여준씨에 되돌아간다.
<월간조선>을 중심으로 한 애국우파세력의 이데올로그가 ‘기회의 평등’이란 중세봉건제와 거리를 둔 근대 우파 자유주의의 철학과 사회민주주의의 ‘분배의 평등’을 거의 구분을 하지 못한다. 구분을 하지 못해야만 ‘천황제’ 우파와 유물변증법 우위의 개혁적 보수파의 연결을 짓는, 그들만 영원히 옳은 선민주의가 나타난다. (이러한 선민주의는 전대협 한총련 선민주의와 동일한 것이다.) ‘기회의 평등’과 ‘분배의 평등’을 구분해서 쓰며 ‘평등’자체만 가지고 좌익의 어법이라고 쓰는 조갑제기자의 어법이, 오히려 좌경불순세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비판했다.
기회의 평등과 분배의 평등을 구분하지 못하면 ‘토론의 자유’가 무의미해진다. 공산당식 당서열 논리와 천황중심의 신분제가 교묘하게 혼합되면서, 실험 속에서 검증되면서 진작에 ‘국민의 자유’를 보장 못할 3류 이론이 폐기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소수 구세대들의 오야붕에 대한 충성논리식이 상향논리에, 유사 종교 논리가 더해져서, 국민의 자유를 계속 무너뜨리는 불량 이론임에도 국민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바탕으로 자리했다.
기회의 평등을 인정하면 인간은 도덕적 존재요 과정 중심이나, 기회의 평등을 부정하면 권력중심의 쟁탈전 논리로 바뀐다. 따라서, ‘善’과 ‘惡’이 없어지고 ‘권력유지’이냐 ‘권력약화’이냐의 이분법으로 바뀐다. 나라가 망해도 누구네들 義理가 남겠네 할 때 희희덕 대면서 더욱더 그 방향으로 나아간 바탕과, 일본 역사극에서 상황이 어떻게 되어도 자기는 정반대로 사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발상과, 국민들의 공인으로서의 자격박탈 이후에도 최연희의원이 기세등등한 점은 연결될 수 있다.
문민정부에서 ‘현명한 시민’층이 판가름 할 것이라고 하면서 공권력의 약화를 주장했다면, 현명한 시민층이 활약할 출구를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출구는 믿었던 이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봉쇄당했다. 그러한 출구가 마음 껏 열려지면 <월간조선>의 판매부수가 절대적이지 않고, 중국고대사회 수준의 ‘제갈양’이라 제마음대로 일치시킨 윤여준씨를 필요로 하지는 않게 된다. 시민들에게 더 똑똑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측면을 강화해야 할 측면에서, 더 구세대적이고 더 70년대적이고 더 젊은이들에 멀어진 사유논리를 과시하는 것은, “진리”보다는 “권력”을 숭상하는 바에 있다.
우파의 모든 권력자들을 비판하는(언론 효과의 모든 공세적 비판은 대중차원에서 띄워주기 의미를 갖는다) 지식이 있다면, 우파는 좌파 지식의 대부분을 비판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 헌법상의 ‘과잉금지의 원칙’은 문민정부 이래에 쓰여 왔는데,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되지 않으면 긍정적이라고 포함하는 모든 담론(discourse)들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조갑제기자를 비판하는 글. 그 외에 우파의 주요 논객들을 비판하는 글의 목록과, 제도권 내에서 ‘백낙청’ ‘강만길’ ‘최장집’등을 비판하여 우파 언론에 주목받는 목록을 비교해보자. 조갑제기자가 ‘송건호기자’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번 환기시켰다. 좌파가 좌익 출신의 우파를 공격하는 것은 천문학적이다. 반면에, 원조 우파가 좌익 출신 우파의 동료인 좌파를 공격하는 것은 그로써 금지가 된다. 그것은 좌익 출신 우파가 우파의 요직에 들어와서 좌파 이념 공세를 허무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작업중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
국민이 국민의 안정을 먼저 바라는 정당에 지지를 한다는 열정은 분명히 비난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반동”이란 규정을 좌익 출신의 우파들이 우파 내부에서 계속 떠벌임을 멈추지 않는다.
결론은 간단하다. 우파 내부에서 한다 하는 논객 전부가 ‘고의’ 아니면 ‘애초부터’ 아예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스스로 사고를 못하고 외부에서 어떠한 사고 주입이 있어야 된다는 문화주의 좌파의 가정을 인정할 때, 우파는 ‘월간조선’과 윤여준씨의 밥그릇을 위해서 외부에서 사태를 인정하여 주입할 바탕을 늘 봉쇄당해왔다. 연극이나 뮤지컬등의 문화로 전파하는 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대중들의 ‘수요’(needs)에 맞는 ‘공급’(supply) 였던가?
좌파의 논지를 비판하는 객관화된 학술지도, 보수 언론의 한 지면도 녹록하게 허락되지 않아왔고, 그로써 대중심리를 좌우할 걸출한 스타급 논객들이 숫자가 절대 빈곤하게 되었다. 그나마 있는 논객들 조차도 ‘진리’ 개념보다는 오야붕 권력을 향해 뭉치는 정치판법칙의 ‘선수’에 가깝다. 침묵하는 다수는 사람이 아니다는 전제 아래에서 가볍게 무시하게 되니, 억화감정 가진 이들의 원하지 않는 열린당 선택이 있을 것이다.
윤여준씨의 행보는 누가 보더라도 (1) 개념이 없이 (2) 국민을 대변한다는 자의식이 없이 당파싸움 당쟁놀이로 한나라당을 까내리는 형국이다.
윤여준씨등이 분석한 환경은 ‘국민은 안정을 바라면서 한나라당 지지’를 하는 데, 좌파 어피니언 리더에 영락없이 포위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포위를 뚫으려는 의지를 가지지 못하도록 길들이며 우파 내부에서 ‘권력’쟁투의 지지고 볶고 싸움이다.
그 근본 원인은 김영삼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기보다는 김영삼대통령을 지지했던 자들을 ‘야단 칠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한 것이 아니라, 근본을 잃은 행위를 해도 말이 안 먹히는 사람들이었다는 지나놓고 보는 역사적 평가를 우파 구세대들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자리에 ‘부끄러움’을 기록할 새로운 자리를 철폐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은 국민을 대변하려는 國父라는 의식이 있었다. 김영삼대통령은 일관되게 ‘통일운동’이 우선이고 ‘國父’란 인식이 나중이다. 이후의 대통령은 더욱더 심해진다. 박대통령이 國父란 책임감이 과도하며 군인식의 일처리 방법으로 부작용은 있었으되, 일추진에서 지향하려는 목적에서는 순수하다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영삼대통령은 ‘국민대변’보다는 김영삼김대중민주화 선언의 ‘통일실천’이 앞서 있다. 여기에서, 박정희대통령의 ‘국부’로서의 대변의식을 가진 우파 지도자가 있겠나 하며 한나라당을 지지할 때, 김영삼 지지자 스타일의 ‘국부’로서 책임감이 뭔데? 정치 이데올로기 사업이나 하자 하는 발상이 있다.
결국, ‘개념없는’ 우파 어피니언 리더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를 만나본 지 오래이며 ‘당파의 지도자’만 만나봤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김대중전대통령의 ‘6.15’는 선량한 국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한다. 그 주장을 인정할 때 북한동포에 대한 관심이 계속 우선이 된다면 그는 지킬 게 없는 세력(보수가 아닌)이 된다. 그러나, 당파의 지도자를 지지하는 자는 무조건 옳다고 한다.
개념 없는 우파 어피니언 리더가 있기에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의 ‘대충’ 중간에 있으려는 바가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중도’는 찍히지 않겠다는 의지이지, 실체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sbs 8시 뉴스 정진홍 한림대 교수가 ‘염치’란 말이 사라졌다고 한다. 책임있는 지도자 박대통령 시대는 칸트 철학 왕국시대였다. 그러니, 보수 문학이 순수문학이기도 했다. 칸트 철학이 개념에서 시작해서 개념으로 끝난다. 그래서, ‘개념이 없다’는 말은 가장 최고의 욕으로 쓰인다. 차근차근 순수하게 진리지향적으로 문제를 풀어낼 능력이 없다는 말로 쓰인다. 하도 개념이 없는 시대가 되어 놓으니, ‘개념이 없다’는 말자체가 없어졌다. ‘염치’란 말도 복권되어야 하고 ‘개념이 없다’는 말도 복권이 되어야 한다.
한나라당을 둘러싼 진짜 문제는 절대지지층이 ‘안정=선’으로 지지를 하면, 한나라당 외곽 확장을 위해서 들어온 문민정부세력들이 ‘안정=악’으로 몰고 당파의 논리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해결할 ‘개념 갖춘’ 어피니언 리더는 당파와 분파의 이익 문제로 거의 거세가 된 상황이란 것이다.
첫댓글 좋은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