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14: 11 사람이 그 가운데 살며
슥 14: 11 사람이 그 가운데 살며 -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 가운데 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다.
예비된 새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거주할 성이다. 물론, 거기에 거주할 사람들은 심령이 새로워진 구원받은 자들이다.
1]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그 복된 성은 죄인들이 거하는 곳이 아니고 의인들이 거하는 곳이다.
의인들은 영원히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이다.
2]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않을 것이다.
저주는 죄의 결과이며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나 죄가 없을 것이므로 저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없는 곳이 참으로 행복한 곳이다.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세계의 형편을 예언한 것이다.
* 계 22: 3 -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새 예루살렘 성에는 저주가 없다.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저주받은 세상이었다.
창세기 3: 17-18,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땅의 저주는 거두어졌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며 그에게 예배드리고 그의 얼굴을 뵈옵고 그와 교제할 것이다.
(1) 다시 저주가 없다.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 슥 14: 11 -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저주'(詛呪)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데마'(*)는 저주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창 3: 14-20의 저주 상태에서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슥 14: 11의 성취이다.
* 창 3: 14-20 -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러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렸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저주가 없는 곳이다. 택한 종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게 된다.
(2)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가운데 있다.
① 성도와 하나님의 연합.
② 삼위 하나님이 삶의 중심.
③ 삼위 하나님의 통치하심.
특히 하나님과 어린 양이 핵심이다.
저주 상태에서 회복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 함께 임재(臨在)하심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고 더 이상 저주를 받지 않게 된다.
* 계 21: 3-4 -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요 14: 20-21,23 -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 고전 15: 27-28 - 27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3)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하늘의 천군 천사를 말한다.
'그'가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은 세 가지이다.
Ⓐ 첫째는 하나님이며
Ⓑ 둘째는 어린 양이고,
Ⓒ 셋째는 둘 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 가지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그'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토'(*)는 단수로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하나의 단일체로 보고(삼위일체 되심) 있기 때문이다. (Beasley-Murray).
'섬기며'의 헬라어 '라트류수신'(*)은 예배 행위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모든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을 예배하며 경배함을 시사한다. (Ladd, Johnson, Morris).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은 안전한 거주지가 될 것이며 평화의 성이 될 것이다.
그 성은 재앙이나 외부의 침입이 없을 것이다.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은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하나님께서는 위기 때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구원하신다.
3절,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신약교회를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건지셨고 또 늘 지켜주시고 또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고 그 앞에 신실한 것이 승리의 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의 생수를 주신다.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우리가 받은 영생은 복음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 요 4: 14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영생의 생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하신 왕이시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세상은 하나님의 왕권을 알지 못하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
넷째, 하나님 안에 참 평안과 행복이 있다.
11절,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천국에서도 현세에서도 그러하다.
* 롬 14: 17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살후 3: 16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