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이 익어가는 동안 / 김밝은 봄이면, 할머니는 진달래꽃을 따다 술을 부어 꽃밭 귀퉁이에 묻어놓고 봄날의 향기로 무르익을 때까지 들여다보곤 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마당까지 올라오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잘 익은 분홍을 술잔에 담아 상을 차려놓고는 나쁜 놈 나쁜 놈 질펀한 목소리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런 날은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나쁜 놈이 되어버린 아버지 얼굴이 더 궁금했다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건드려주곤 해서 혼자 있을 때면 하늘에 가닿는 비밀을 키우며 두근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한 번쯤 꼭 만져보고 싶던 얼굴 세상의 간절함을 모두 모아도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터득해 버린 후 쑥쑥 자라던 상상력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도 가끔 고개를 숙인 채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곱씹어보는 날들이 늘어갔다 새까만 울음을 박박 문지르면 맑은 눈물이 될까, 생각하는 사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리던 슬픔이 잠깐 윤슬처럼 반짝일 때도 있었다
— 시집 『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 (미네르바, 2024.06) -----------------------
* 김밝은 시인 1964년 전남 해남 출생. 방송통신대 교육학과 졸업. 2013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술의 미학』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시예술아카데미상, 심호문학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