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25 10:54 | 수정 : 2013.10.26 14:07
지난 10월 19일 토요일 오후 7시,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어둠이 내리자 집창촌 ‘미아리텍사스촌’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모’들이 하나둘 가게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영업’에 들어갔다. 몇몇 영업장 안으로는 여성들이 모여앉아 화장을 하고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 낯익은 침묵 속으로 낯선 음악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음악이 시작된 곳은 미아리텍사스촌 25번지. 이곳 사람들에게는 ‘대원여관 자리’로 통하는 곳으로 수년째 방치된 2층 건물이다. 여전히 영업 중인 곳과 폐건물이 섞여 있는 골목 중간에 박혀 있다. 이날 건물 입구를 막고 있던 녹슨 철판이 걷히고 굳게 닫혀 있던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건물, 시멘트 골조가 속을 드러내고 있는 공간에 반짝반짝 장식전구가 불을 밝히고 사이키 조명과 촛불로 꾸민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 무대에서 인디밴드들의 공연이 열렸다.
공연은 25번지의 문화실험 ‘더텍사스프로젝트’(주간조선 10월 7일자 2276호 미아리텍사스촌 예술습격사건)의 세 번째 행사. 사진작가 김규식씨가 빈 건물을 빌려 독립문화공간으로 만든 이후 지난 8월과 9월에 두 차례의 미술 전시가 열린 데 이어 마련된 무료 공연이다. 건물은 프로젝트를 이어갈 뜻이 있는 예술가들에게는 누구든지 열려 있다. 드러머 강동규가 기획하고 인디밴드인 ‘동네빵집’‘소음밴드’ ‘에디 전’이 참가한 이번 프로젝트는 삭막한 미아리텍사스촌 사람들의 삶에 잠시나마 음악의 위로를 전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골목 안 사람들을 위한 공연이기 때문에 외부 초청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치러졌던 미술 전시와 달리 음악 공연은 걸림돌이 많았다. 첫 번째는 공연시간. 밤과 낮이 거꾸로 돌아가는 이곳에서 영업에 방해되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적정한 시간이라고 찾은 것이 오후 7시부터 본격적으로 영업이 시작되기 전인 저녁 9시까지. 두 번째는 ‘영업방해’라며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공연 시작 전 골목을 돌며 ‘이모’들에게 공연초대를 했더니 “영업해야지 무슨 공연이냐”면서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세 번째는 무대설치. 전기가 문제였지만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끌어다 쓰는 것으로 해결했다. 음향시설은 경기도 분당 갈보리교회 청년봉사단이 출동해 최고의 장비로 해결했다.
‘동네빵집’의 발라드 음악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첫 관객은 골목 안을 점령한 고양이들. 지붕 위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고양이들이 느닷없는 음악 소리에 놀라 한참을 지켜봤다. 음악이 몇 곡 이어질 때까지 골목 안 사람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인근 주민이 한 차례 찾아와 “여기는 시끄러운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 음악이고 뭐고 귀찮다”면서 싫은 소리를 한 차례 늘어놓고 갈 뿐이었다.
‘동네빵집’에 이어 최근 싱글앨범을 낸 ‘소음밴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계속되는 음악 소리를 듣고 몇몇 사람이 골목 안에 잠시 모습을 나타냈다 사라졌다. 1시간여 음악이 계속되자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쭈뼛거리며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고 사라지는가 하면 “이게 뭐냐” “왜 이런 공연을 하느냐”면서 호기심을 드러내고 한참을 서서 음악을 듣다 돌아갔다. 관객이 나타날 때마다 스태프들이 준비한 차와 함께 장미꽃 한 송이를 안겨줬다. 장미꽃에는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어머, 어머 이게 뭐야, 나 눈물 날 것 같아.”
잔뜩 경계를 하며 굳어 있던 얼굴들이 장미꽃 한 송이에 활짝 펴졌다. 슬리퍼를 끌고 음악 소리에 끌려 나왔던 여성은 장미꽃을 받아들고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며 돌아갔다. 한참 공연을 지켜보다 “어떡하나, 일하러 가야 하는데” “또 언제 하느냐”면서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세 번째 순서. ‘소음밴드’에 이어 SBS K팝스타 출신인 ‘에디 전’의 파워풀한 노래가 시작되자 문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늘었다. 강아지를 안고 나온 여성 둘이 에디 전을 알아보고 무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스무 살을 갓 넘겼을까 앳된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은 장미꽃을 손에 쥐고 쭈그리고 앉아 에디 전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즐거워했다. 공연을 한참 지켜보던 한 이모는 잠시 사라지더니 박카스 한 상자를 들고 와 건네주면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우리가 이런 공연을 언제 보겠어요.”
이날 공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한 번의 공연으로 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의 울림은 컸다. 진심으로 부른 공연 팀의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비록 골목 구석까지 미치진 못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공연팀의 최종 목표는 공연 날 모두 영업을 쉬고 음악을 즐기면서 골목 축제의 날로 만드는 것이다. 에디 전이 기타 연주에 몰입해 있는 동안 술에 취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무대 앞을 휘청거리며 지나갔다. 골목 양옆으로 솟아오른 초고층 아파트, 좁고 어두침침한 골목, 취객들 모두 무대장치 같았다. 값싼 장식 조명과 초가 전부였지만 25번지의 무대는 화려하게 꾸며진 어떤 공연장보다 아름다웠다. 공연을 지켜보던 ‘이모’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이 이 안에 갇혀 살아서 생각보다 순진해요. 마음이 터지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쑥스러워서 다가오진 못하지만 안에서 다 듣고 있어요. 지금 엄청 행복해 해요.”
공연이 끝난 후 무대를 정리하고 있는 사이 한 ‘이모’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빵을 건네주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코끝이 찡해졌다. 어떤 무대보다 행복했다는 공연팀들은 12월 초 크리스마스 기념 공연을 기약했다. 이날 골목 안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한 걸음 다가선 ‘25번지의 공연’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았다.
<주간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