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중령!
이원우
<졸저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 26사단 사령부에 갔다. 주임원사와 병력 몇 명을 지원받고 싶어서였다. 17년 7월초였다. 50년 전에 내가 왔다갔다 하던 정훈공보참모실 앞에서 옛추억에 잠겨 있는데, 감찰참모와 정훈공보참모가 가까이 오는 게 아닌가? 나란히 서서 찰깍! 내가 하사로 복무할 때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내 소설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母部隊 장병들의 모습이다.>
분명 정상은 아니다. 군인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 자신의 요즘 생활상 말이다. 그들을 빼고선 내 삶의 의미가 없다. 내 문학도 노래도, 군으로 말미암아 그 값어치가 달라진다. 좀 지나치다는 편견조차 자신에게 내린다.
더 큰 문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숙이 거기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자나 깨나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승을 마감할 때쯤, 내 모부대(母部隊) 울타리 근처에서 숨을 거두면 참으로 행복하리라.
오늘 난 그 많은 전우 중에서, 중령(中領)들과의 인연을 들먹여 보고 싶다. 여기서 잠깐! 한 번 중령은 영원한(?) 중령이다. 물론 대령을 거쳐 장군이 되는 중령도 있지만, 어떤 중령도 ‘중령’ 시절을 잊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따라서 오늘 내가 펼쳐 나가는 ‘아, 중령!’은 현역에 한해서 하는 거다. 그 외연을 예비역까지 넓히기에는 여건이 불여의(不如意)하고말고.
<사단 전 주임원사와 현 주임원사 및 인사처 병사들이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 있다.>
내 군 복무 당시‘중령’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65년 초반부터 67년 후반까지 나는 26사단 부관참모부에서 모필병(毛筆兵)으로 복무했는데, 그때의 참모가 김성원 중령/ 이정우 중령이었다. 워낙 사단장 문중섭 장군이 표창을 좋아해서, 나는 붓을 잡고 참모실에서 거의 대기하다시피 했었다. 가끔 직할 중대장 등이 와서 우리 참모에게 올려붙이는 거수경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공격! 수색중대장 이부영 대위, 참모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순간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소위만 달아도 하느님만큼 높아 보이는데, 선임하사 최종학 상사와 함께 한 방에서 참모를 모심으로써 대위와 중령의 차이를 늘 보았다? 인생 공부 참 많이 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강산이 다섯 번 바뀐 뒤에 나는 그 26사단을 찾는다. 머릴 깎은 채로…. 양병희 사단장에게 부대 복귀 신고를 하러 올라가면서 부관부에서 완전 군복 차림을 했다. 사단장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옹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난 반세기 이야기를 그에게 쏟아내었다. 한데 장병들이 쑥덕거리는 이야기 속에 26사단이 없어진다는 정보(?)가 내 귀에 잡히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르랴. 후문에 의하면, 모부대가 곧 어느 사단과의 통합된단다. 병사들도 다 안다더라. 부관부가 인사처에 흡수되는 것도 나는 보았다.
어쨌든 난 73여단 본부와 12* 기보대대/ 12* 기보대대/ 5* 전차대대 등에서 안보 강사를 무료로 하게 되었으니, 행복감에 젖어들밖에. 마침내 직할 중대까지. 그렇게 총 서른 시간을 넘겼다. 그 다리를 놓아 준 사람이 앞서 들먹인 어느 대대의 김** 중령이었다. 그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최전방 1사단 연대장으로 있다. 그가 지난해 나를 다시 불러 주었다. 그 12* 기보대대장 후임 정** 중령도 이내 대령으로 계급장을 바꿔 달게 된다. 그는 25년 3월1일 현재 少將으로 진급하여 군의 요직을 맡고 있다.
<쟈니리 가요계 선배를 나는 형님이라 부른다. 그와는 두 번째 共演을 했다.>
가끔은 사단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열시부터 열두시까지 강의를 마치도록 조정한다 치자. 여단장 지프를 타고 사령부까지 와서 하사 모자를 쓰고 식당에 들어선다. 부사단장 둘과 참모장은 대령. 이하 중령 ‧ 소령의 무궁화이파리(실은 대나무꽃)를 단 베레모가 나를 맞는다. 그게 나의 정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반세기 전 같으면 그 모자만 봐도 내가 주눅이 들었을 거다. 한데 50년 세월 뒤, 그 높은 계급의 주인들로부터 깍듯이 선배 대접을 받지 않은가? 꿈인 듯 생신 듯 몽롱한 기분이라 강변하자. 그들과 나 사이에 계급이 없는 것이다. 7년 가까운 세월이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한들 누가 과언이라 하랴. 그동안 그렇게 만난 ‘중령’이 연(延) 수십 명이 되리라. 마침내 여군 인사참모(중령)와도 조우했다.
중령으로 있다가 타 부대로, 소령이더니 진급하여 일선 사단 정훈 참모로 가는 전우도 보았다. 위‘진급 코스’의 대대장 원** 중령은 사령부 교훈 참모로 왔다. 5* 전차대대장으로 있다가 교훈 참모로 옮기기까지 자주 연락이 오갔던 전우, 자기 방에서 가끔은 차 한 잔을 건네주던 전*휘 중령도 못 잊는다. 그 전우는 합참으로 자릴 옮겼다. 전 인사참모 황** 중령에게서 방금 전화가 왔다. 이윽고 좋은 소식 있으리란 예감을 던져 주더라. 난 언젠가는 나로 하여금 애국가 선창을 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날 출판기념회는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행사였다. 저자가 사회, 진행, 노래까지 했으니까. 애국가 선창 및 지휘도 내 몫이었다. 내빈 소개 대신 모두가 일어나 그 자리에 서서 서로 경례라는 걸로 대신했으니 그 또한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리라.>
근래 내가 해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전우는 육사 군악대장 이** 중령이다. 첫 만남 때 누가 먼저 운을 뗐는가를 따지지 말자. 다만 우리는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내가 군악대 반주에 맞춰‘가곡’등을 부르는 데에까지. 난 26사단 군악대에서는 국방 TV‘우리는 전우’ 출연으로 그쳤었다. 한데 몇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 더 높은‘군부대 군악대’ 무대에 서게 된 거다.
난 지금 선곡에 매달려 있다. ‘비목’은 뺄 수 없다.‘전우야 잘 자라’등 진중가요도 의미가 있다.‘Oh Danny Boy’도 특별한 존재감으로 다가오고말고. 군 발전을 위한 하나의 초석, 그 드러나지 않는 형상을 허공에 그리며 난 예비역 일반 하사로서의 긍지를 다진다. 그리고 외친다, 아 중령!
첫댓글
환영!
장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