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과 권세로 애굽의 바로 왕 밑에서 구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종이란 본래 한번 종이 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벗어나게 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소원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이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이루려고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를 넘겨다보다가 쫓겨난 하나님의 원수 마귀가 사람을 유혹하고 속여서 자기 종을 삼아버림으로 사람들은 영원히 마귀와 함께 사는 마귀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사람을 종삼은 마귀를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을 모세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사람을 종으로 삼은 마귀의 머리를 발로 밟아 멸하고 내가 지은 사람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유혹하여 종을 삼은 마귀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고 그에게 속은 사람에게도 상당한 값을 치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 되게 해 주시기 위하여 미리 보여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세는 창세기 3장 2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아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이심으로 마귀를 발로 밟아 멸하고 그 여자의 후손을 옷 입고 살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자들이 말하는 원시 복음입니다. 이 원시 복음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신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구하여 내셔서 그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언약이 두 가지입니다. 그 두 언약 중에 첫 번째 언약이 바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여 시내광야로 인도하셔서 시내산 밑에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운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가지고 계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돌판에 친히 쓰셔서 모세에게 주시면서 백성들에게 가서 가르쳐 알게 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맺는 언약서인 십계명 돌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그 마음과 뜻으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주신 십계명을 모세를 통하여 또는 제사장들이나 지도자들을 통하여 가르침 받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애쓰면서 살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만 행하며 살았습니다. 가르침 받은 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힘쓰고 애써서 노력했는데도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십년이 지난 후에 모세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씀을 모세는 신명기 29장 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아멘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돌판에 친히 써 주셨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었고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었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살 수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듣고 배워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애써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없으면 그 말씀을 알기는 하지만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후서 3장 6절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아멘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를 쉬운 성경에서는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는 반면,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자로 된 말씀은 지킬 수 없어서 죽이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살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으로는 우리가 순종하며 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성령으로 듣고 배울 때만 성령께서 행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으로 행하며 사는 사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록 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부터 듣고 배워서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행하며 사는 사람 즉 하나님 나라를 사는 복을 다 누리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