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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주보 성인 : 성 임치백 요셉
성 임치백 요셉은 일명 군집으로 1803년경 서울 한강변의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30년 경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는데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천주교인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천주교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1846년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 아들이 갇혀있는 옹진수영을 찾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고 속이고 자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대건 신부를 만나 처음으로 교리에 대한 강론을 듣고 즉시 세례를 받고, 순교를 결심. 결국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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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임치백 요셉의 생애와 순교과정.
1. 이름. 출생, 성장과정 및 가정생활
임치백(林致百) 은1804년에 출생하여 1846년 9월20일 매를 맞고 옥중에서 순교하였다.(만 42세). 임 치백 요셉은 관변측(정부편) 기록에만 치백(致百)이라고 나올 뿐, 군집(君執)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는 1803년 또는 1804년1) 서울로부터 그리 멀지않은 한강변(마포)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으나 천성이 순량하고 정직하여 덕행을 쌓았다.2)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을 애지중지해서 엄하게 꾸짖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와같이 유약했음에도 불부하고 임치백은 본성이 유순하고 덕을 사랑해 천진하고 착한 소년으로 성장했다.3)
임치백은 12년 동안이나 글방에 다니며 문한을 배우고 활도 잘쏘며 시, 음악, 그림도 잘하여 친구가 많았다. 상업으로 생활하였다.4) 임치백은 10년 동안 꾸준히 서당으 다시며 한문을 배운 후 상업에 종사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면 그는 활쏘기와 그밖에 여러 가지 육체의 단련에도 열중했고 음악, 시, 미술 등 애호가로 친구가 많았으며, 그의 언행은 도무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고 한다.5)
1830년경, 결혼 후 그의 아내와 아들이 먼저 입교하여 그에게도 세례받기를 권했으나 그는 항상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하였다.6) 치백은 교우들을 깊이 신용하여 그들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무엇보다 즐겁게 여겨 몸 둘 곳이 없는 4-5명을 그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교우가 드나들었으므로 그도 신앙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835년 그의 친구 몇 명의 교우가 잡히게되니, 그는 다른 교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포교의 명단에 넣게 하였다. 즉 포졸이 되어 스스로 교우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7)
1835년(헌종 1년) 박해가 일어나 마을의 신자들이 체포되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여 모든 노력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스스로 포졸이 됨으로써 보다 열심히 그들을 도와 주었다. 그 후 요셉은 삼개(현 마포)마을로 이사하였는데, 신자들이 그의 집에 빈번히 왕래하였으므로 그도 신자라는 의심을 받고 외교인들로부터 갖은 모함과 욕설을 들었지만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8)
2. 체포과정.
1846년에 아들인 임성룡(林成龍)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를 따라서 연평도를 나갔다가 6월 5일 김 신부와 더불어 잡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치백은 곧 아들이 잡혔다는 마을로 가보니 이미 아들은 황해도 감영(監營)으로 넘겨졌으므로 그는 그 길로 다시 해주로 달려가서 아들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이때 황해감사는 치백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아무말 없이 그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며칠 뒤에는 서울로 압송하였다. 9)
이때 황해감사는 치백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그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너는 천주교를 믿고 있느냐?”하고 물었다. 이에 치백이“비록 오늘까지 실천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마음이 없겠습니까?”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소위 사학죄인 취급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며칠 후 그들 부자는 함께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그 동안에도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10)
(일부자료에는) 서울의 포졸들은 마포의 임 치백 집을 습격하고 남은 식구들은 붙잡아 가는 동시에 집과 가산을 완전히 몰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3. 김 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 세례를 받음
서울로 잡혀온 임 치백은11)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와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2) 임치백은 신덕에 불타는 신부의 말을 들으며 크게 감동되었다. 이리하여 어느 날 그는 같이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오늘부터 성교를 믿겠다.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다”라고 말하였다. 김 신부는 그에게 “당신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천주의 특별한 은혜이오니 감사와 지성으로써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에 임 치백은 그날부터 기도문을 배우고 며칠 후에는 신부의 손에 의하여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영세한 두 번째의 성인이며 그 첫 번째는 1839년에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김 아가다 성녀이다.13)
4, 증거하는 믿음
전에 그와 친하였던 임 치백 요셉의 친구들은 어떻게든지 그의 목숨을 구제하려고 그에게 배교하기를 거듭 권하였으나 그는 “나는 내 임금이시며 내 아버지이신 천주(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오. 왜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거요. 이 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며 그들의 말을 물리쳤다.
며칠 후에는 형리들이 그의 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배교를 권하였다14). “ 네 자식들을 보아라. 한 마디만 하면 자식들의 생명도 보장할 수 있고, 다 같이 나가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자식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도대체 무엇하러 저들을 본 체 만 체하며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너는 인정도 없고 상식도 없단 말이냐?” 이에 임치백이 대답하였다. “아니, 그러면 내 자식을 사랑하는 육정으로 우리의 아버지인 천주를 배반하란 말이오? 그건 결단코 할 수 없소” 15)
형리들은 노하여 그를 거꾸로 매달고 몹시 물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리들에게 “당신들은 송장을 때리고 있는 거요. 당신들이 아무리 때려도 딴 대답은 하지 않을 테니 헛수고 그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옥에 갇힌 지 3 개월 후 어느 날16) 그는 공판이 이루어져 곧 사형선고가 내리리라는 소식을 듣고 얼굴에 즐거운 빛을 보이면서 같이 있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법정에서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고 하오. 나는 아무 공도 없으나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당신들보다 먼저 죽어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해드릴 터이니 여러분은 특히 용기를 내시오”라고 말하였다.
잠시 후에 포장(捕將) 이 그를 불러내어 문초하였다. “너는 사실 천주교를 믿고 있느냐?” “예, 옥에 갇힌 뒤로부터 경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천주십계를 외워 보라.”“ 아직 다 외우지 못합니다.” “천주 십계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에 있는 이 마티아17)처럼 유식해야하느니라.”이에 요셉이 머리를 저으며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자식이 무식하면 효도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식들도 다른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에 대하여 모든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비록 무식할지라도 천주가 나의 아버지 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족한 것입니다. ”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어라. 배교한다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형에 처하겠다.”
“차라리 만 번 죽을지언정 천주는 배반할 수 없습니다.”
“너는 이 사건에 있어서 아무런 혐의도 받은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꼭 죽으려고만 드느냐? 거 참 괴인한 일이로다. 자, 그러면 배교는 하지말고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만 말해라. 그러면 너와 네 두 아들을 곧 놓아주마”
“저는 신부님과 같이 죽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포장은 어떻게든 임치백을 설득하여 내보낼 구실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임치백은 “김 신부님과 함께 주를 위해 죽기로 약속했습니다.”하는 대답으로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포장이 거짓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요량으로 말하였다.
“신부와 같이 죽기로 했다고? 그렇지만 신부는 죽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나라에서 그에게 벼슬을 줄 생각이다. 그래도 너 혼자서 죽고 싶단 말이냐?”18)
“나는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나리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호의와 계략이 임치백의 확고한 믿음 앞에 무력하게 되자 반대로 몹시 화가 난 포장은 고문하라 명하여 대꼬챙이로 그의 살을 찌르게 하고, 세 번이나 주리를 틀게 하였다.19) 이 때 임치백이 아파서 몇 마디 소리를 지르자, 포장은 “만일 네가 신음 소리를 내면그것으로써 배교행위라고 보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임치백은 신음 소리를 그쳤고 자세히 보자 까무러친 것 같았으므로 밖으로 끌어내었다.20)
이리하여 옥으로 돌아왔을 때 치백은 마치 유쾌한 산보로부터 돌아온 것처럼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형벌을 받았는지 모르리만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그는 태연히 흙바닥에 드러누었다. 조금 있다가 남경문 베드로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다가가서는 그의 상처를 돌봐주는 한편 그를 위로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문초를 당하고 형벌을 당했으나 임치백의 신앙과 용기는 한결같았다. 21)
5. 순 교
마침내 음력 7월 29일 그를 매질하여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그 다음날 음력 8월 1일(양력 9월20일)에는 정오 때부터 해질 때까지 옥리들이 그에게 물매질을 하였으나, 오히려 옥리들이 기진맥진하여도 요셉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옥리들이 그를 옥 안으로 끌고 들어가 목을 내어 죽였으니 그 때의 나이가 43세였다.22) 임 요셉이 큰 소리로, “오 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 숨을 거두었다.23)
그 다음 날에 임치백의 두 아들이 감옥으로 찾아와서 몹시 슬퍼함을 보고 옥지기(간수)와 다른 죄수들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리 슬퍼하지 마시오. 지난 밤에 이상한 빛이 당신 아버지의 시체를 감싸고 그 시체가 놓여있는 방을 가득 채웠다오.” 이 이상한 일을 목도하고 감동한 두 옥지기는 하늘까지도 존경하는 것 같은 이 수형자(受刑者)의 시신을 경건히 모셔다가, 감옥에서 약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 위에 매장하여 주었는데, 이러한 일은 조선 시대에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 날 또한 다른 6명의 신자들도 함께 교수(絞首)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한이형 라우렌시오(48세), 남경문 베드로(51세), 정철염 카타리나(30세), 이간난 아가다(33세), 김임이 데레사(36세), 우술임 수산나(44세) 등이었다. 이들의 처형과 죽음에 대하여 당시 조선 관청 기록인 <승정원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이형, 이녀 간난, 우녀 술임. 김녀 임이, 정녀 철염은 여러 차례 주뢰를 틀고 여러 가지 문초를 하였으나 목석과 같이 완악(頑惡)해 배교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게 할 수 없었기에 매로 쳐죽인 줄로 감히 아뢰나이다.
임치백과 남경문은 여러 해 전부터 사도(邪道)를 행한 자로 여러 번 주뢰를 틀었으나 죽기에 이르기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배교하기를 거절하는지라. 이보다 더 통탄할 일이 어디 있으리오. 그러므로 혹독한 매질을 해서 장하에 죽게하다.
(종합정리 : 주임신부 : 2009. 9. 16 )
<주요 참고 자료>
1.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下(분도출판사,1980),
2.유홍렬,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가톨릭 출판사, 1962(1984))
3. 아드리엥 로데, 폴테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전⌟(가톨릭 출판사, 1984(1995))
4.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성 바오로 딸, 1997(2005)),
5. 가톨릭 대사전 (교회사 연구소),
6. 김옥희 수녀의 ⌜103위 성인전⌟(도서출판 순교의 맥, 1991(2004))
< 주보 성인 주요 영성>
1. 진리추구정신 -. 신자가 되기 이전에 복음을 실천함- 진리를 추구하함..
2. 보편적 인류애와 가족애- 주변사람들을 잘 돌보아주고,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여 목숨을 걸음- 뛰어난 효심과 자녀사랑(가족애)
3. 순교정신- 옥중에서 늦게 세례 받았으나 이후 한번도 물러서지 않음- 진리를 지키고 인륜을 지키며 확고한 믿음으로 순교함
4. 천주께 대한 효심(孝心)- 하느님 아버지께 지극한 효심을 가지신 성인- 인륜에 대한 효심을 하느님께 대한 효심으로 발전시켜 결코 어긋나지 않음 - 십계명을 알지못하지만 하느님 아버지 섬기는 데는 죄를 짓지 않음
1)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는 1803년으로 나오나, 김옥희 수녀의 책에는 1804년(순조 4년)으로 나옴.
2) 유홍렬,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가톨릭 출판사, 1962(1984)), 488.쪽
3) 아드리엥 로데, 폴테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전⌟(가톨릭 출판사, 1984(1995)), 286.쪽.
4) 유홍렬, 같은 책, 488-489.
5) 아드리엥 로데, 폴테통베, 같은 책, 286.쪽
6) 김옥희 수녀의 ⌜103위 성인전⌟(도서출판 순교의 맥, 1991(2004)), 265.쪽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1830년 경에 이르러 나내와 자식들이 천주교에 입교한 후 요셉 자신도 이에 마음을 기울였으나, 즉시 친구들과 교제를 끊지 못하고 입교의 시기를 미루기만 하였다. 다만 신자들을 완전히 믿고 형제처럼 대하며, 곤란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중에서 4,5명을 집에 데려다 함께 생활하였다.
7) 이상의 내용은 위 두 가지 책이 거의 일치함.
8) 김옥희 수녀, ⌜103위 성인전⌟(도서출판 순교의 맥, 1991(2004)), 265-266.쪽
9) 이상의 내용은 위 두 가지 책 - 유홍렬 교회사와 아드리앵 로네의 103위전-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10) 김옥희, 같은 책, 266.쪽.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下(분도출판사,1980),131.쪽.
11) 샤를르 달레의 한국교회사에는 임군집으로 이름이 나온다. 달레, 위의책, 130-131.참조.
아드리앵 로데의 한국 순교자 103위전에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게 이 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즉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임치백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김대건 신부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이 청년(김대건)은 신앙과 정력이 넘쳐흐르고 어떠한 위엄을 갖추고 있어 외교인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으나 교우들은 그 권위에 복종함을 볼 때에 임치백은 매우 기이한 충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최후의 결심을 하고 함께 갇혀 있는 사람 앞에서 말했다. ”오늘부터 나도 천주교를 믿겠소. 나는 이 때까지 너무나 오래 기다렸소“
12) 김대건신부가 서울로 압송된 날짜는 5월 28일로 나타난다. <우포청> <일성록> 기록 참조. 달레, 위의 책, 106.쪽 각주 43 참조.
13) 기해박해(己亥迫害)조선 후기 1839년(기해년, 헌종 5년)에 발생한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앵베르(라우렌시오)샤스탕(야고보),모방(베드로)신부, 정 하상, 유 진길, 조 신철, 유 대철, 유 소사, 정 정혜, 등이 순교 함. 이때 정 하상은 상제상서(相制相書)를 지어 교회를 옹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순교 하였다.기해박해 순교자 67명이 103위 성인에 포함되었다. 김아기 마리아는 아는 것이 ‘예수 마리아’ 밖에 모른 다고 하며 순교한 학식은 없지만 신앙만큼은 단순하며 확고한 대표적 성녀이다.
14) 아들을 셋 두었다고 하는데, 아들 하나는 김대건 신부에게 배를 빌려주었다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임성룡 베드로이다.
15) 샤를르 달레, 같은 책, 131.쪽. 아드리앵 로네, 같은 책, 293-294.쪽 참조.
16) 감옥에 갇힌지 3 개월 후, 7월 27일 포장이 공판을 열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달레, 같은책, 131-132.쪽 참조.
17) 이승훈 베드로의 아들 이신규(李身逵) 마티아로 보인다. 그는 꽤 이름있는 학자였던데 1846년 김대건 신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순위도에서 체포될 때, 달아난 이가(李哥왜)가 이재용(李在容냐)으로 간주되었고, 또 이재용은 이신규의 조카였으므로 이런 연유로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신규 마티아는 임치백이 순교한 후 석방되었다가 1866년 병인박해때 순교하였다. . 샤를르 달레, 같은 책, 132.쪽 각주 32. 33.참조.
18) 이 때 포장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 김대건 신부가 옥에 잡혀있는 동안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이 세척의 군함을 이끌고 1846년 8월 9일 충청도의 외연도 근처에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김대건을 사신으로 만들어 프랑스 군함의 대장과 협상을 시키려는 움직임이 실제로 논의되어 구체적으로 진전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세실함대가 1839년에 순교한 세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항의하는 서한만 전달하고 곧 퇴각함으로써 무산되었고, 다시 김대건 신부에 대한 사형집행의 과정이 진행되게 되었다. (김대건신부서한집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성 바오로 딸, 1997(2005)), 132-134.쪽 참조). 한국 교회사 연구소,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 2 집(1996),297-299.쪽 각주 23 참조.
19) 유홍렬, 같은 책, 491.쪽.
20) 샤를르 달레, 같은 책, 133.쪽.
21) 아드리앵 로네, 같은 책, 295-296.쪽.
22) 일반적으로 임치백 요셉의 출생년도는 1803년으로, 순교할 때의 년도는 1846년으로 본다. 여기서 43세는 서양기준에 의하여 만으로 계산된 년도이다. 유홍렬, 같은 책, 491.쪽. 샤를르 달레, 같은책, 133.쪽 참조.
23) 페레올 고주교의 보고서 COREANA에 의하면 임군집은 참수치명을 원하였다. 샤를르 달레, 같은 책,133-134쪽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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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당의 주보성인의 영성에 대해 끊임없이 본당신자들에게 교육하시는 신부님의 사목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제의 몸짓과 마음 하나 하나가 많은 신자들에게 약이 되고 독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부담이자 무거운 십자가이나 그것이 하느님께 올리는 봉헌의 산제물이라 여기시길 바랍니다. 신부님 글을 읽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제들을 위한 기도 지금 즉시 쏘니 받으세요.. 쓔웅~~~
저도 함께 쏩니다~ 휘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