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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꽃바구니」(낭송 나희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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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접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욕탕 속의 나무들 - 나희덕
저 나무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늙은 왕버들 한 그루가 반쯤 물에 잠겨 있다
더운 김이 오르는 욕탕,
마을 어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우던 그녀가
오늘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이 더 검게 보인다
그 많던 잎사귀들은 다 어디에 두고
빈 가지만 남은 것일까
왕버들 곁으로 조금 덜 늙은 왕버들이 다가와
그녀의 등과 어깨를 천천히 밀어 준다
축 늘어진 배와 가슴도, 주름들도,
주름들 사이에 낀 어둠까지도 환해 진다
나무 껍질 벗기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두 왕버들 곁으로 걸어 간다
냉탕에서 놀던 어린 버들이 뛰어오고
왕버들 4代
나란히 푸른 물속에 들어가 앉는다
큰 굽쇠를 향해 점점 작아지는 굽쇠들처럼
나는 당신에게서 나왔다고 말하는 몸들,
물이 찰랑찰랑 흘러 넘친다
오래 전 왕버들의 새순이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 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흔들리는 것들 /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찬비 내리고 /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돼지머리들처럼 / 나희덕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 끝을 집어올린다.
자, 웃어야지, 살이 굳어버리기 전에.
새벽 자갈치시장, 돼지머리들을
찜통에서 꺼내 진열대 위에 앉힌 주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웃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지, 김이 가시기 전에.
몸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머리들.
그렇게 탐스럽게 웃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당히 벌어진 입과 콧구멍 속에
만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지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자,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긴다.
아―에―이―오―우―
그러나 얼굴을 괄약근처럼 쥐었다 폈다
숨죽여 불러보아도 흘러내린 피가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머리 하나.
실려가는 나무 / 나희덕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또다른 생(生)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끼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던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 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무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들 다시 읽을 수 없다
저 물방울들은 / 나희덕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힘껏 잠가도
물때 낀 낡은 씽크대 위로
똑, 똑, 똑, 똑, 똑 ……
쉴 새 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문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아, 저 물방울들은
나랑 살아주러 온 모양이다
물방울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물방울 속에서 수국이 피고
물방울 속에서 빨간 금붕어가 죽고
물방울 속에서 그릇이 깨지고
물방울 속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물방울 속에서 사과가 익고
물방울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물관을 타고 올라와
빈 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요람 속의 나를 흔들어준다
내 심장도 물방울을 닮아
역류하는 슬픔도 잊은 채 잠이 들곤 한다
똑, 똑, 똑, 똑, 똑, 똑 ……
빈혈의 시간 속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