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회복하는 새해
마태복음 2:1-12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2025년 새해가 구렁이 담 넘듯 슬그머니 우리를 찾아왔다. 그래서 올해는 뱀띠 해인 을사년(乙巳年)이다.
희망으로 새 시간을 맞이하셨는가? 새해 덕담은 예언자의 말처럼 미래완료형으로 한다. 성경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언어풍속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
새해를 맞아 여러 가지 결심을 했을 것이다. 목숨을 걸만큼 소중한 결심이라면 반드시 지킬 것이다. 꼭 그렇게 하기를 응원한다. 나는 새해 결심 중 벌써 포기한 것도 있다. 작심삼일이었다.
1970년대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삶의 질’이라는 연설에서 프랑스의 중산층에 대해 말했다. 다섯 가지 조건인데 ‘외국어 하나, 악기 하나, 스포츠 하나 즐길 수 있는 능력, 자랑할 만한 요리법, 남을 돕는 봉사활동’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중산층 조건은 무엇일까? 온통 숫자로 따지는 우리 나라 중산층의 기준을 말하면 속이 상한다. 프랑스인들은 짬을 내고 평소 노력을 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웬만한 능력자 아니면 중산층이 되기 힘들다.
지금 행복으로 가는 길을 잃은 우리 사회는 조금씩 새 길을 찾는 소중한 기회를 맞고 있다. 당장은 탄핵정국과 항공기 참사로 혼돈을 겪지만, 우리 사회는 모두가 합의하고 공감할 만한 빛을 찾을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 공동체가 희망의 등불을 들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따듯한 평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신앙의 중산층도 있다. 언제나 하나님과 소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하며, 세상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구할 것은 부요함이다. 영적인 충만, 물질의 여유, 삶의 평화, 두루두루 하나님 안에서 누릴 기쁨이다.
새해는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다. 다시 출발하는 새 시간은 그래서 희망이 있다.
1)
오늘은 성탄 후 제2주일이다. 오늘 본문은 동방박사 이야기다. 본문에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그 빛을 따라 베들레헴을 찾아왔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찾아 경배하러 왔다고 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2).
성경에서 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한 수단으로 비유되었다. 하나님은 장막에 있던 아브라함을 캄캄한 밖으로 불러내신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별이 보이지 않았다’고 표현하였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이처럼 별은 그 시대에서 나침반 구실을 하였다. 별자리는 인생의 여정을 살펴보는 과학적 방법이었다.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런 말을 하였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아기 예수의 탄생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동방박사 세 사람의 등장이다. 마태가 쓴 예수님의 탄생 기록에서 주요 등장인물은 헤롯 왕과 세 명의 멀리 페르시아 땅에서 온 박사들이다.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밤하늘의 별빛은 아주 오랜 시간 빛의 여행을 통해 그들을 이끌고 있다. 고대에는 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미래의 이상적인 통치자에 대한 기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이 본 길잡이별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온 빛이며, 희망을 의미한다.
색동교회 성탄절 배너를 보라. 그 주인공도 동방박사 세 사람이다. 검은 종이로 오려 붙였는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복음서 첫머리에 동방박사들의 등장은 흥미진진하다. 예고 없이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2)고 한 페르시아에서 온 박사들의 물음은 ‘오실 왕’과 ‘현재의 왕’ 사이에 필연적인 갈등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새로 나신 왕을 찾기 위해 자연스레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왔다. 왕이 태어난다면 예루살렘이 아니고 다른 곳을 상상하기 어렵다. 동방박사들은 바벨론 포로 시기 다니엘의 예언과 메시아사상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방 민족의 대표들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 덕분에 새로운 징조를 깨달았고, 결국 갓난 아기를 왕으로 경배하기 위하여 먼 곳으로부터 온다.
동방박사 이야기에는 복음서의 핵심 주제가 등장한다. 즉 이방 민족들이 복음을 듣고, 환영한 반면에 유대인들은 불신.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2)
동방박사의 소문을 듣고 가장 긴장한 사람은 당시 현직 유대인의 왕인 헤롯이었다. 지금 왕이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어딜 감히!’ 새 왕을 경배한다는 말인가?
헤롯은 이미 나이 25세에 팔레스타인 전쟁에 공을 세워 갈릴리 지역의 총독을 역임했고, 곧 이어 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70살로 병사하기까지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치했다.
헤롯은 대왕으로 불렸는데, 당시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고, 질서를 세우는데 성공한 통치자였다. 그는 훌륭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의 평화에 불과했다.
권력의 절정에 있었던 헤롯에게 심각한 의심증이 있었다. 일단 반역자로 의심되면 즉각 상대방을 제거했다. 당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아들(huios)이 되기보다는 헤롯의 돼지(hus)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고 비꼬았다.
헤롯의 잔인하고 뒤틀린 성격에 비추어 보면 그가 유대인의 왕 ‘탄생 소문’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인지 짐작할 만하다. 우리 성경은 이를 ‘소동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타랏소’는 뒤흔들다, 당황하다는 뜻이다.
즉 한마디로 경악했다는 뜻이다. 헤롯과 예루살렘 성내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어전회의가 열리고, 많은 지혜자들이 의견을 모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도 현명한 이들이 있었다. 일찍이 선지자 미가가 말한 예언을 찾아냈다(미 5:2).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6).
헤롯은 상황을 살핀다. 짐짓 겸손하게 동방박사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별이 나타난 때를 묻고, 또 그의 경배 계획을 말한다. 실제로는 속으로 살해음모를 감추었다.
3)
동방박사들은 별이 가르쳐주는 현주소를 더듬더듬 찾았다. 별이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이고, 별이 멈추면 그들도 멈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를 찾았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
그들이 찾은 임금은 단 한마디의 대화도, 몸짓도 없는 아기였다. 아기 예수는 허영과 위선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새 왕이 가장 변두리 마을 베들레헴,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가난한 구유에서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이다. 이 아기 예수에 대해 초대교회는 이렇게 ‘자기 비움’(케노시스)을 고백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6-7).
동방박사들이 행한 경배는 페르시아 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이었다.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이 구유로 가져온 세 가지 예물은 바로 왕을 상징하는 ‘황금’, 제사장을 상징하는 ‘유향’ 그리고 죽은 자를 상징하는 ‘몰약’이었다.
종교 개혁자 장 칼뱅은 “이것은 아기 예수야말로 참된 왕이요, 최고의 제사장이며, 마침내 인간을 죽음에서 건지신 가장 높으신 구주가 되심을 예언한 것”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박사들은 헤롯 왕과 약속을 어기고, 그리하여 헤롯의 무서운 음모를 무산시킨 채, 다른 길로 동방으로 되돌아갔다.
“서양 사람들은 종교을 연구하기를 좋아하고(Study), 동양 사람들은 종교를 살기(Live) 를 더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별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길을 떠났고 그리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였다. 신앙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어떻게 별을 볼 수 있는가? 도시에서 별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너무 환하기 때문이다. 별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전등을 꺼야 한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자잘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둠을 탓하지 말고 별을 보라. 그 어둠 때문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별을 본다는 것은 바로 희망을 사는 것이다. 성탄절기는 오늘까지다. 그러나 내 마음의 성탄은 365일 계속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도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이야기인가?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의 말이 실감 난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다만 매 순간 기적에 의지하여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매 순간 여러분의 빛 되신 주님을 의지하라. 떼제 공동체 로제 수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별이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자력처럼 사람을 끌어준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 그런 믿음의 길잡이별을 통해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빛의 자녀로 살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는 빛의 자녀로 살라고 하신다. 내 삶의 어둠과 그늘, 두려움은 빛과 동행할 때 사라진다. 빛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실천은 제자됨의 길이다.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미 여러분이 잘하려고 기도하며, 노력해온 일이다. 새해에는 더욱 팔둘레를 넓히고, 지경을 확장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올해는 광복 80년이다. 광복(光復)은 빛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빛을 온전히 회복케 하시기를 소원한다.
바라기는 여전히 짙은 어둠의 세력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에게 안성맞춤의 길잡이별을 허락하셔서, 그 빛의 대로를 활짝 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이 걸어갈 2025년의 일상과 평생을 축복하시고,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