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로 ‘대 데레사’를 모시는 이 본당은 왕림본당의 공소로부터 분할되어 1900년 현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에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설정되었다.
이곳의 처음 성당은 1893년에 교우들의 협력으로 초가 10간을 지어 공소강당으로 써온 곳인데,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지은 사제관과 함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기증한 종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기 때문이다.
청계산(淸溪山)과 광교산맥(光敎山脈)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km, 안양에서 16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산과 자연의 계곡, 거기에 울창한 수림은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는 교우들에게는 다행한 곳이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험준한 이 산골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유년(辛酉年), 병오년(丙午年) 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義一, 지금의 鶴日里) 마을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 잡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일이 있고, 그 뒤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1845년 9월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되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가 묘론리(卯論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우촌의 생업이던 옹기 굽던 도요지(陶窯地)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8년 왕림본당이 설정되자, 하우현은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그 뒤 왕림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는데, 한국 풍습에 동화되지 못했던 탓인지 교우들과 불화가 잦아 1906년 귀국하고 말았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교세가 크게 신장되어 1953년 안양본당이 설정되면서 하우현본당은 또 폐쇄되어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1973년에는 새로 설정된 군포본당의 공소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구성당 건물이 허술하므로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그는 1980년에 하우현에 부임하여 다시 본당을 부활시키고 사회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이 본당의 신자총수는 174명, 전국의 본당 중에서 가장 적은 곳이지만 신앙의 요람지요, 누대(累代)가 살아온 교우촌이라는 데서 교회사적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우현 성당은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앙인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894년 하우현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다.
1900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1975년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7년 하우현>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7월과 2005년 6월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몸체는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 김기호(金起浩) 회장
김기호(1824~1903, 요한) 전교회장은 황해도 수안군 남면 무송동에서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났다. 25세 경 중병을 잃고 난 뒤부터 사상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여 고민하던 끝에 1854년 이마두와 홍봉주에게《성세추요(盛世추堯)》와 성서를 빌어 읽고 이해 8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베르뇌 주교를 보좌하며 전국으로 전교 여행을 다녔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경기도 청계산의 하우현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강원도 금강산, 양양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1876년 블랑 주교,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 등을 맞아들였고 1881년부터 평안도에서 전교하였다. 1891년 일선 전교 활동에서 은퇴하고 하우현에 거주하면서 하우현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을 창설 한 후 1903년 12월 28일 사망하여 청계산에 안장되었다. 김기호가 남긴 저술로는 1903년 명동 성당 준공의 기쁨을 노래한 〈성당가(聖堂歌)〉 등 천주가사와 《구령 요의(球靈 要義)》, 《소원신종(遡源愼終)》, 그리고 40여 년간의 전교 활동을 회고한 《봉교자술(奉敎自述)》 등이 있다. 서울대교구의 김운회(루카) 주교가 그의 후손이다.
■ 순교자
◆ 한덕운 토마스 (1752∼1801) <하느님의 종 124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800년 10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그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오시는 길
첫댓글 사순시기에 한국성지에-가보다---3.1절 기념으로 들려 본- 전국에서 가장 작은 본당 소개 합니다.
근대사도 공부해보면서---
좋습니다 ㅎ ㅎ
광복 70년을 되돌아보는 이 시점에서 미국은 대단한 충격을 주네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