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점초등학교 총동문회 주관 2012년 ‘자랑스런 동문상 수상’ 기념 강연
태백산, 태백인, 태백정신
김종성(동점초등학교 14회 졸업)
하느님이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 에덴동산에서 쫒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땅 위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농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땅을 일구며 사는 농민들은 수천 년에 걸쳐 자기네가 생산한 잉여 농산물을 지배자 집단에게 넘겨 주어야만 하는 숙명을 지녀왔습니다. 에릭 R. 울프라는 학자는『농민』이라는 책에서 농민들은 자기의 필요와 지배자 집단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균형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제물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회전하여 자본주의 사회가 되자, 농업은 불리한 산업이 되었습니다. 농민이 생산한 농축산물과 자본가들이 생산한 공산품은 아예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농산물 가격정책을 통한 농업 보호와 농민의 소득 보장에 힘써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저임금정책과 수출 주도형 정책의 수행을 위해 농민들을 희생시키는 저곡가 정책을 펼쳐왔습니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공장지대로, 탄광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땅 위에서 밭을 갈던 농민들은 광부가 되어 두겹 하늘을 이고 수백 미터 땅 밑에서 막장을 갈게 되었습니다.농민들이 땅 위의 경작자라면 광부들은 땅 밑의 경작자들입니다.
태백산 일대에서 석탄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일본인 광산기사 시라키 다쿠치(素木卓工)에 의해 석탄 광맥이 발견되면서부터입니다. 시라키 다쿠치가 석탄 광맥을 발견한 곳은 '먹돌백이' 라는 곳으로, 지금의 강원도 태백시 금천마을입니다. 그 당시 상장면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던 장씨라는 사람이 먹돌백이에서 까만 돌덩어리를 주워와, 면장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는데, 마침 그곳에 들렀던 시라키 다쿠치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까만 돌덩어리를 실험해본 결과, 7천 칼로리가 넘는 괴탄 덩어리임이 밝혀졌습니다. 1927년 일본인들은 먹돌백이 일대에서 시험적으로 석탄을 캐보았으며, 1933년에는 시라키 다쿠치가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제2차 석탄 탐사를 실시했습니다. 마침내 1936년 일본인들이 삼척개발주식회사라는 석탄개발회사를 만들고, 한국의 석탄을 도둑질해가기 위해 삼척철도주식회사가 강원도 철암에서 동해안의 묵호까지 56. 2킬로미터의 철도를 놓는 사업을 펼쳐, 석탄수송 철도인 철암선이 1939년 12월 개통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을 펼쳐갔습니다. 이 정책은 에너지 수요의 급격한 확대를 불러왔습니다. 정부는 석탄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탄광 개발을 서둘렀습니다. 이 법은 석탄 자본가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법인세, 소득세를 면제시키는 등 각종 특혜를 베풀어 석탄 생산을 독려했습니다. 그리하여 태백산 일대에 크고 작은 규모의 민영탄광들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8개에 불과하던 민영탄광이 1980년대에는 38개로 늘어났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태백산 일대로 몰려왔습니다.
태백 지역은 시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강원도 삼척군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금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상장(上長)이라 하고, 북쪽은 하장(下長)으로 불렀습니다. 1920년 삼척군 상장면이 설치되어 황지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습니다. 탄광의 개발로 장성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상장면사무소를 장성으로 옮겼습니다. 1960년 1월 1일 상장면이 장성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73년 7월 1일 황지 지역이 민영탄광 개발로 인구가 늘어나자, 황지읍으로 독립해, 장성읍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1981년 삼척군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로 승격되었습니다. 태백시는 12만 명의 인구를 가진 탄광도시가 된 것이었습니다.
탄광은 크게 국영탄광과 민영탄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국영탄광은 글자 그대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탄광으로 대한석탄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석공은 그 출발부터가 정부로부터 산업진흥, 에너지 정책사업의 추진, 기술 개발, 석탄 생산 및 수출·수입, 수급 조절 등의 기능을 부여받았습니다. 민영탄광은 개인이 운영하는 탄광으로 강원탄광, 삼척탄좌, 동원탄좌, 함태탄광 등이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삼표에너지, 강남도시가스, 삼표상사 등으로 구성되어 한때 재계 순위 3, 40위 권에 오르내리던 강원산업그룹은 석탄을 황금으로 바꾼 재벌로,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과 철암동 일원에 자리잡고 있던 강원탄광에서 출발했습니다. 1980년 4월 발생한 사북광부항쟁의 근원지 사북광업소를 운영하던 석탄자본가는 1960년대에 동원탄좌를 개발, 석탄을 캐내 번 돈으로 동원전자 등 10여 개 방계기업으로 구성된 동원그룹을 세웠습니다. 탄광을 기반으로 해서 기업을 재벌그룹의 규모까지 키운 업체는 강원산업과 동원그룹 이외에 대성산업, 봉명에너지, 삼천리산업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석탄자본가들은 마구잡이식으로 탄광을 개발하여 자본주의 탐욕의 극치를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탄자본가들은 태백산 일대의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제대로 복구조차 안하고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사업 지원금을 챙겨 태백을 떠났습니다. 석탄자본가들이 태백에 남겨주고 간 것은 석탄자본가들의 탐욕의 찌꺼기인 폐탄장(버력산)과 ‘개집’이라 불리던 광부사택과 진폐증으로 고통받는 광부들과 그 가족들뿐입니다. 석탄자본가들이 석탄을 황금으로 바꿔 떠나가고 남은 태백에는 탄광을 대체하는 산업체 하나 없습니다.
광부들이 도급제, 검수제와 같은 전근대적인 임금구조 속에서 최저 생계비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막장에서 일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석탄자본가들의 탐욕과 석탄자본가들의 앞잡이인 어용노조 그리고 한국정부의 저곡가(低穀價), 저탄가(低炭價)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정부가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고 수출 전선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쌀 값을 싸게 하고, 노동자들이 따뜻하게 자고 밥을 끓여 먹는데 필수적인 연탄을 싸게 공급하기 위해 저곡가, 저탄가 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데는 무엇보다도 농민과 광부들의 피땀 어린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석탄산업은 정부가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을 쓰느냐,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을 쓰느냐에 따라 부침해오다가, 급격한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의 실시로 석탄산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역 경제를 이끌던 탄광들이 대부분 문을 닫은 후 태백시는 1987년 당시 12만여 명의 인구가 2008년 5만여 명으로 줄어드는 등 시세(市勢)가 급락하고, 지역경제가 활기를 잃고 있습니다. 특히 태백시 외곽 지역인 철암동과 동점동 지역은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의 폭탄을 집중적으로 맞아, 마을의 공동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철암동 지역은 1981년 당시 1만 4천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2008년 3천 4백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점동 지역은 1981년 당시 7천 2백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동점동 북부지역의 돌꾸지 강원탄광 사택촌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등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한편 전성기에 2천 400명(1981년 기준)의 학생이 재학 중이던 철암초등학교는 128명(2010년 기준)의 학생이 재학 중이고, 전성기에 1천 명(1980년대 중반 기준)의 학생이 재학 중이던 동점초등학교는 현재 38명(2010년 기준)의 학생이 재학 중입니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자,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수많은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태백을 떠나, 안산, 고양, 서울, 구리, 시흥, 인천, 김포, 부산 등지로 가버려 이제 태백시는 5만 인구를 가진 소도시로 남아 '고원관광(高原觀光)'이라는 새로운 광구(鑛區)를 개척하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태백인들이 고원관광으로 먹고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문닫은 광업소들이 내팽개치고 간 폐갱구(廢坑口)와 폐탄장(廢炭場)에서 야기되는 환경오염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악한 태백시 재정으로 폐갱구와 폐탄장에 환경오염 방지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앙정부는 태백시에 내팽개쳐진 폐갱구와 폐탄장에 하루 빨리 근본적인 환경오염방지시설을 해야 합니다.뿐만 아니라, 상동폐재댐, 아연광산 광미처리장(鑛尾處理場), 석회석 광산의 산림환경파괴, 아연제련소 문제가 산재해 있는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발원지인 태백산 일원의 환경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4대강을 이야기하고, 청계천을 이야기하고, 굴포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 해결에 있어서 우선 순서가 뒤바뀐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발 650 ∼ 750미터에 자리잡은 태백시(太白市)는 그 이름을 태백산(太白山)에서 따왔습니다. 태백산이라는 이름은 '크게 밝은 뫼' 라는 뜻으로 단군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일성이사금 5년 10월에 왕이 친히 북쪽으로 거둥하여 태백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백산은 " 크게 밝은 산"으로 성스러운 땅이었습니다. 한국의 산업화 공업화의 일등 공신은 태백산이었습니다. 태백산이 석탄, 석회석, 아연 그리고 텡스텐을 품고 있다가, 한국인들에게 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한국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태백시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연화산 허리에는 산업전사위령비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광산에서 일하다 죽어간 광부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점초등학교 뒷산, 태백인들이 비석산이라고 부르는 산봉우리(나팔등)에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광부위령비가 서 있습니다. 그 광부위령비의 벽면에 붉은 글씨로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 대부분이 탄갱 속에서 일하다 죽어간 우리 부모 형제인 광부들임을 생각할 때, 우리 태백인들은 문득문득 긴장하게 됩니다. 두겹 하늘을 이고 팔과 다리로 치열한 삶을 살아갔던 그들은, 살아 있는 우리 태백인들로 하여금, 열심히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에 태백정신의 출발점이 있는 것입니다. 지하 수백 미터 채탄 막장에서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지열을 온몸으로 막으며 석탄을 캐던 정신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탄광도시 태백시가 환경생태도시로 거듭날 때, 태백산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다시 자리매김 될 것이고, 태백시는 고원관광도시로 거듭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태백인들은 태백정신의 고향 태백산이 민족의 성산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태백시가 고원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근대산업화 시기의 탄광문화유산들을 지키고 보존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선 태백인들은 강원탄광이 태백인들에게 남겨주고 간 광부위령비, 우리의 부모 형제인 광부들의 이름이 붉은 피로 새겨져 있는 광부위령비, 석탄자본가의 두 얼굴을 기억하게 하는 광부위령비를 태백의 탄광문화유산으로 보호하는 운동을 펼쳐 탄갱에서 유명을 달리한 우리 부모 형제인 광부들의 혼이 영원히 태백산, 태백인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김종성 : 1952년 평창 출생, 태백에서 성장. 소설가. 고려대 인문대학 교양교직과 조교수. 고려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석사과정 및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6년 동서문학 제1회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2008년 제1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탄(炭)』, 『마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 『금지된 문』, 『말없는 놀이꾼들』
논저 『한국 환경생태소설 연구』, 『글쓰기의 발견』(공저) 등.
첫댓글 동점초등학교 총동문회 주관 2012년 자랑스런 동문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태백산, 태백인, 태백정신' 원고 고맙습니다.
누가 태백 역사를 물으면 이 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글 읽다가 장인 어른께 전화드렸습니다.
싸리재 동고광업소부터 시작해서 삼척탄좌 선산부(사께야마)로 오래 일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