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에페소 2,19-22
요한 20,24-29
나의 보물 지도는 어디로 향하는가?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란 말이 있습니다.
보물 지도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하다 결국 그 보물 지도로 찾는 것은 빈 상자뿐임을 깨닫게 되는 영화도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할까요?
우리 인생에서도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헛고생만 하다 인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보물 지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로 각자는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로 누군가를 초대하기도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불교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성당 다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를 부르시더니 “꼭 성당 나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평생 불교가 참된 길인 줄 알았는데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의 복장이 왠지 절에서 온 것 같지 않고
성당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천사들을 보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우물에서 바가지에 물을 떠다 할머니에게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임종 대세를 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 가정이 모두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저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이 되려면 그 보물을 찾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하는 보물 지도는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지도를 가진 사람만이 참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빈 상자만 발견하게 될 지도들을 가지고 그것이 보물 지도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의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사도 중 믿음이 가장 약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유일한 사도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사도는 참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히 그 길을 알려준 분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보물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자신에게 더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끝까지 나머지 사도들 가운데서 머물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는 보물 지도를 가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지금 인도의 많은 가톨릭 전례가 토마스 사도의 독특한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이 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참 행복을 만나려고 했던 토마스 사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영화 ‘왓 어 걸 원츠’(2003)는 토마스처럼 참 행복의 지도를 가진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영국의 귀족 가문인 한 남자가 여행 중 팝 가수를 꿈꾸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품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의 가문은 여자를 조용히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혼녀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여자아이가 ‘다프네’입니다.
다프네는 17년간 아버지를 기다린 끝에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택으로 숨어들어 아빠를 만나고 자신이 딸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이미 자신의 상원의원 당선을 지지해주는 사람의 딸과 동거 중이었습니다.
다프네의 활달한 성격은 영국 사교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 환경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빠와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프네는 결국 아빠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아빠는 자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임을 딸의 순수한 모습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원의원 후보직을 사퇴한다고 하고 그렇게 아빠와 춤 한 번 춰보는 것이 소원인 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딸과 약혼녀를 만나 정식으로 혼인에 골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도를 지니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참다운 보물을 발견한 이는 자신의 방향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 행복을 원하는 방향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끌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참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임을 아는 사도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며 한 신앙고백이 우리가 모두 찾아야 하는 보물입니다.
나는 자녀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를 가졌나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올바른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도 그렇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따라오게 합니다.
나의 보물 지도의 끝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란 목적지가 아니라면 나도 나를 따르는 사람도 삶의 허무로 이끕니다.
우리의 방향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설정합시다.
그러면 나와 나를 따르는 많은 이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에페소 2,19-22
요한 20,24-29
주님 부활의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그동안 떠도는 소문에 대해 긴가민가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빵도 드시고 물고기도 드시는 모습을 뵌 사도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반대로 잠깐 다른 볼일 보러 나갔다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는 얼마나 아쉽고 답답하고 억울했겠습니까?
토마스 사도는 그 답답함과 억울함을 이렇게 하소연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 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복음 20장 25절)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아직 갈길이 많이 남아있던 토마스 사도였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거냐?’며 호통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자상하고 따뜻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복음 20장 27절)
복음서 내에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장 28절)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장 29절)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혹은 두세번 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사도 성 토마스 축일이다. 토마스라는 말은 본디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토마스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말로 보인다. 쌍둥이라는 것은 형제가 있는 쌍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마 사도는 페르시아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중,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에 성 토마스 성당을 지어, 지금 중앙 제대 아래 안장되어있다. 인도에서는 성 토마스가 인도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가 세례명으로 토마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매우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주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가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다. 왜 곧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그렇게 늦게 나타나셨을까? 그것은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듣고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믿게 될 준비를 하시느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이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토마스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하였다. 그분의 신성은 말씀이며, 그분의 육체를 만지고 말씀을 고백한 것이다. 즉 그분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으신 영광이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지급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며, 기꺼이 지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주님과 그분의 본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로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치실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얻으신 영광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새로운 태어남을 의미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태어남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토마스 사도께 도움을 청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