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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또롱 아래 무지개
김인기
도깨비라거나 봉황새라 하는 것들, 이들은 상상의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누가 이것들의 모습을 어디에 그려보라 하면 각자가 어떻게든 그린다. 비록 십인십색이지만, 남들도 그러려니 한다. 어떤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란다. 이것들이 원래 없는 것들인데, 우리들의 삶에는 존재하는 셈이다. 간밤에 용꿈이나 돼지꿈을 꿨다고 아침에 복권을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분명히 세상에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들의 인식에는 거의 없는 것들도 많다. 심해에도 숱한 생물들이 있다. 곳곳에 세균들도 있다. 이것들이 어떻게 생겼지? 이런 걸 제대로 아는 이들이 희귀하다. 대왕고래가 상상의 동물보다 더 존재감이 없다.
이러고도 누가 어떻게 현실을 들먹이는가? 부당하다. 이거야말로 황당 그 자체가 아닐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압도하는 시대라 해도, 이것들의 한계도 있다. 삼신할머니와 몽달귀신이 과학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망각해도 그만인가 하면, 그게 그렇지 않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나 어찌 대형참사로 몹시도 괴로운 유족들의 추모행사를 함부로 대하랴. 한때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엉뚱했으나 지금은 당연한 것들도 많다. 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나. 하기야 과거에는 지동설도 엉뚱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다.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데모크라시’란 말만 하더라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번역어를 찾느라 악전고투했다. ‘민(民)’과 ‘주(主)’는 관념상 공존할 수 없어서 ‘민주(民主)’라는 말이 어불성설이었다. ‘주권재민’이라니? 경을 칠 일이지. 민권이라는 개념이 없고, 언어마저 없으면, 의견조차 낼 수 없다. 무슨 문제가 있는 줄은 알아야 굿이라도 하지. 이게 일상에 정착하기까지는 또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한다.
온갖 견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침내 한 소식을 들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미진하다. 나 역시 법집(法執)은 싫다.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이 둘에 아무런 걸림이 없어야 중도(中道)가 아니랴. 그러나 이런 서술이 허망할 수 있다. 처음 수영을 배울 적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라. 훈수에 오류는 없다. 그러나 막상 물에 들어가서는 그만 겁을 집어먹고 허둥댄다. 이런 게 어디 한둘이냐. 말과 글이 없이 될 일도 별로 없지만, 이것들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중도 또한 체득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중생이다.
어쩌랴. 몸살기가 있으면, 일단 푹 쉬어야 한다. 꿀물이라도 마시거나. 이게 수상한 민간요법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상태를 짐작하고 나름대로 대처하는 거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다 같더냐. 객귀를 물린다며 식칼을 던지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정말 황당무계하다. ‘에이, 설마 요즘 누가 그러랴.’ 그러나 이게 웃을 일도 아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하자 지구촌 곳곳에서 이와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이야 잘 대처했지만, 이렇지 못한 곳에서는 당국자들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시대의 한계를 넘기는 고사하고 뻔한 거짓말에도 곧장 걸려 넘어진다. ‘식량이나 전력 또는 도로나 통신 등의 형편이 매우 어렵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들의 협조를 부탁합니다.’ 과거 집권자들이 이러지를 않고 ‘의식개혁운동’이니 ‘총궐기대회’니 하는 짓들을 획책했다. 그 수작에 나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용건은 간단히. 통화는 3분 안에.’ 이런 훈련에 길이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필름’을 아낀다.
과거를 돌아보는 게 꼭 현재나 미래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정관념이 해롭기도 하니까. 구시대의 유물도 있다. 그렇다고 과거 없이 현재가 있으며, 현재 없이 미래가 있나?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한 과거는 이미 과거가 아닌 현재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사뭇 다를 터이지만, 사람들의 본성은 더디게 변한다. 아예 변하지 않거나. 그래서 실수도 여전하다. 더러는 전진이 아니라 퇴보도 한다. 그래서 옛날옛적에 이미 출현한 미래를 애써 찾아본다.
“천지신명의 은덕도 있고, 부모님의 은공도 많으나, 역시 제 팔자 덕분이지요.”
열다섯 살 막내딸이 이러다가 쫓겨났다는 이 민담은 워낙 널리 퍼져서 한국인들이 거의 다 안다. 그렇더라도 재미로 다시 정리해보자. 예전에 어느 부부가 유복하게 살았는데, 딸 셋을 두었다. 한때 아비가 심심해서 딸들에게 물어봤다.
“애들아, 너희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잘 사느냐?”
첫째 은장아기가 응답했다.
“천지신명의 은덕도 있으나, 역시 부모님 덕분이지요.”
아비는 매우 흡족했다.
“옳거니! 효녀로고.”
둘째 놋장아기의 응답도 다르지 않았다.
“천지신명의 은덕도 있으나, 역시 부모님 덕분이지요.”
아비는 더욱 흡족했다.
“너도 효녀로고.”
막내 가믄장아기는 쫓겨났다. 이게 이상하다. 자기가 이뻐했다는 딸이 기껏 ‘제 팔자 덕분’이라 했다고, 그렇게나 야박하게 내치다니. 나이도 겨우 열다섯 살이라는데, 그게 그 정도로 큰 잘못인가? 아비가 괴팍한 거지. 그런데 ‘제 팔자 덕분’이라는 이 부분이 제주도의 무가(巫歌)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천지신명의 은덕도 있고, 부모님의 은공도 많으나, 역시 제 배또롱 아래 선그믓 덕분이지요.”
‘배또롱’과 ‘선그믓’은 방언이다. ‘배또롱’은 배꼽을 뜻하는데, ‘선그믓’은 무엇인가? 내가 그쪽 토박이는 아니어도 말귀가 심하게 어둡지는 않다. ‘선그믓’이 ‘그곳’이라는 말이거나 신체의 한 부분을 이르는 말일 터이다. 이게 달[月]과 연관이 있을까? 우리가 바라보는 초승달이나 그믐달은 대개 눕거나 엎드린 모양이다. 그러니까 ‘선그믓’은 ‘바로 선 그믐달’에서 온 게 아닐까? 혹은 접두사 ‘선’이 붙은 거뭇하다는 뜻이거나. 그야말로 문외한의 억측이다. 그러나 말의 유래야 어떻든 막내딸은 내쫓겼다. 아쉬워라, 아비가 크게 기뻐하며 이랬어야 했는데.
“요놈 참 깜찍하게 야무지네.”
아득한 고대와 달리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왕조만 하더라도 무당들의 신분은 비천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역할이 미미했던 건 아니다. 이른바 잘났다는 작자들의 주장이 서럽디서러운 민심을 당최 헤아리지 못한 거지. 그리하여 백성들은 우르르 무당이 벌인 굿판으로 몰려가 눈물과 콧물을 쏟았다. ‘그런 못된 소리나 해댄 딸년은 쫓겨날 만하다.’ 이런 증오와 억압에 무가는 저항하며 멀리멀리 내쳐진 딸년들을 위대한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가믄장아기로 빙의한 무당의 말씀을 한 줄로 줄여 선언하자면, 그게 바로 이러하다.
“내 선그믓은 거룩하다!”
‘팔자 덕분’과 ‘선그믓 덕분’이라는 둘 사이에는 서로 차이가 있는 만큼 삶의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 후자가 더 씩씩하다. 어쩌면 ‘선그믓’도 ‘보뎅이’의 대체어일지 모르나, ‘사타구니’의 방언이 ‘보뎅잇바위’라니, 언중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누군가 핵심어를 ‘팔자’로 바꾼 이유는 알 만하다. 말하자면 아이들이 주로 읽는 동화책에 그걸 곧이곧대로 수록하는 게 거북하다는 거지. 정작 아이들은 무심하다 하더라도 어른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험, 말세로다! 저것은 어찌하여 저리도 상스러우냐?”
현대인들 대다수도 은장아기나 놋장아기와 오십보백보로 흐리터분하다. 이러다가는 자멸하기 딱 좋다. 이게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냐? 이참에 내가 나서자 해도, 하아,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지. 당장 나부터가 무지하잖아. 용어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뭐라고 얼버무리자니, 이것도 구차스럽다. 에이, 그만 포기하자. 아니야. 그래도 거론조차 잡상스럽다며 외면하다가 곤경에 처하는 것보다는 다소 불편한 질문이더라도 던지는 게 더 나을 거야. 아마도 이게 누군가의 불행을 막는 힘이 될 터이니까.
여기서 잠깐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선그믓 자체가 궁금하지는 않다. 내게 엄연히 있는 콩팥이나 쓸개도 몰라라 하는 터에 있지도 않은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나? 심보가 이래. 내가 비뇨기과나 산부인과 전문의가 될 일도 없다. 갑돌이가 이러면 이런 줄 알고, 을순이가 저러면 저런 줄 안다. 이러나저러나 다 좋아. 그러나 선그믓을 둘러싼 주변의 풍경은 파란만장하다. 때로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하다.
초면이라 해도 상대가 민망스러워하면 나도 덩달아 머쓱해진다. 예전에 목욕탕에서 불이 나 여자들이 황급히 탈출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도 행인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주었다. 우선 알몸부터 가리시라. 이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왜 어떤 남자들은 여자의 국부를 공격하지? 방식도 다양하다. 물불 가리지 못할 정도로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의 소행이라면, 야만성에 치를 떨지언정 이해라도 하겠는데, 이건 그렇지도 않다. 아무개가 어쩌다 잘못 걷어찬 발길질도 아니다.
내 식견은 내가 안다. 그렇다고 침묵이 언제나 최선은 아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한 걸음 내디딘다. 나는 전모를 그려낼 수 있을까? 이거야 과욕이지. 문득 자신의 상태가 한탄스럽다. 착오도 피할 수 없으렷다. 그렇더라도 무지개를 잡으러 가자.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물러난다. 무지개는 이런 것이다. 또 한 걸음 다가가면, 또 한 걸음 물러나고. 그러나 배또롱 아래 무지개는 이와 다르지 않을까? 얽히고설킨 가시덤불을 헤치고 걸음걸음 가노라면 오솔길이 나겠지. 손 흔들고 가는 중에 행여 무지개가 잡히려나.
병이 깊으면 약도 독한 법이다. 말씀 또한 늘 우아할 수가 없어. 형편에 따라 고성과 욕설이 오간다. 왜 이래? 뭐, 연유를 알고자 애쓸 것도 없다. 내용이 뻔하니까. 기실은 짐승들과 다르지도 않다. 눈앞에 위험하거나 성가신 녀석이 나타나면, 더 절박한 쪽이 더 사납게 으르렁댄다. 아무도 물러나지 않으면 서로 뒤엉켜 물어뜯는 거고.
“이게 이럴 게 아니다. 모순을 해소하거나 적당히 타협하자.”
국면이 이렇게 달라지면, 공동번영론이 마치 밀물처럼 밀려들고.
“상호존중에 기초한 평화는 공동번영의 필수조건입니다.”
앗, 발언이 우습게도 각국 정상들의 공동성명과 흡사해지고 말았다. 이참에 싱거운 소리 조금 보태자면, ‘상호존중’과 ‘공동번영’이란 이 표현들조차 두통거리이다. 각자가 편의대로 해독한다. 혹자는 느닷없이 인류의 보편가치 인권이 어떻다고 한다. 이러다가 남의 전통문화에 무지한 내정간섭이라는 항의를 받고. 덤으로 이런 핀잔마저 듣는다.
“너희들이나 제대로 해라.”
또 ‘평화’란 건 뭐냐? 이렇게 물으면 사태는 자못 심각해진다. 왜 그러냐? 이게 자기들한테도 당면한 중대사여서 그래. 평화는 소중하고, 우리가 추구할 바이지만, 구현하기가 어렵다. 일방의 횡포로도 분쟁은 능히 발발하는 거지만, 평화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데, 상대도 못 믿고 자신도 못 믿는다. 비겁자들일수록 아이들이나 여자들한테 더욱 잔학하다. 내면이 허약하고 두려운 만큼 남 보란 듯이 반인륜범죄도 저지른다.
“나는 이렇게 미친놈이니까, 너희들은 알아서 해!”
죄질이 너무 나쁘다. 또 누구는 이들 뒤에 숨어서 갖은 술책을 다 쓴다. 이러니 아무런 변화가 없는 현상 유지가 곧 평화도 아니다. 독재자의 폭정에 떨며 마치 죽은 듯이 지내는 걸 두고 평화롭다고 하랴. 빈부격차가 심해 일어나는 갈등은 또 어떤가? 남들이 성장하는 게 바로 내 불행이라며 음모를 꾸미는 책략가들이 감히 평화를 들먹이기도 한다. 논거도 장려하다. ‘평화’란 귀한 말도 타락한다.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교섭하는가? 개인과 개인은 또 어떤가? 집단과 집단은 끼리끼리 무엇을 어떻게 배척하고 수용하는가? 신흥세력들이 재구성한 제도와 관습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네 삶에 영향을 끼치는가? 비록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약자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떠넘긴 사회가 감수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이래도 괜찮을까? 이런 질문들은 꼭 해볼 만하다. 적절한 해법도 궁구해야 할 테고. 이게 당연한 과정이다.
아마도 문제의식마저 없으면 변괴가 일어날 것이다. 내가 처음 거구귀(巨口鬼) 설화를 듣고 한 생각도 이런 거였다. 그러니까 놈이 ‘아가리가 엄청나게 큰 귀신’이라는 건 그렇다 하자. 육백여 년 전 사람들도 능히 상상했을 법하다. 정작 놀라운 점은 이 귀신이 비범한 인물을 만나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평소의 험악한 외양은 싹 사라지고 신통방통한 아이로 변해서는 그 사람에게 헌신한다고 해. 핵심은 ‘비범함’이다.
흉측한 귀신을 다스리는 방법이 명철함이라니. 이게 대단하다. 귀신마저도 막무가내로 날뛰는 무뢰배는 아니라는 거잖아. 더 강력한 귀신을 해결사로 모시자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 싫어할 부적을 붙이겠다는 것도 아니다. 떡이나 과일 따위를 바쳐서 어떻게 환심이라도 사자는 건 더욱 아니다. 나는 이게 참 놀랍다.
내 눈에 뜨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없는 게 아니다. 원래 없는 도깨비도 형상을 만들어 세우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도 안 보기로 작심하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하면 원래 다 그런 줄 알아서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수도 있다. 과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타산지석 삼아 잠시 살펴보자. 격동의 시대였다는 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요동을 쳤다는 뜻이고, 이건 한국의 현대사와 유사했다. 도덕주의와 엄숙주의가 판을 친 만큼 위선도 극심했는데, 이것도 물론 필요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과거 먼 나라의 참상은 내게로 전해지는데, 왜 오늘날 이 사회의 부조리는 전해지지 않을까? 한 처녀가 자기 선그믓에 꼬챙이를 넣어 낙태를 시도했다가 그만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물론 이런 일은 쉬쉬한다. 에이, 오늘날에야 그런 일이 있으랴. 아니지, 잠깐, 최근에도 누가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고는 버렸다잖아. 그렇다면 본인은 이전에 이미 어떻게든 낙태를 시도했을 것이다.
다 네 탓이다. 이것아, 임신은 왜 했어? 누가 이렇게 떠들어서 뭐가 나아질지 의문이다. 훈계는 효과가 없으니, 이참에 아이들한테 콘돔이나 넉넉히 지급하자. 그러나 이런 대처법은 임시방편이다. 밖이 좋아서 가출한 게 아니라 집이 싫어서 탈출했다. 뭐? 다만 극소수 불량소녀들의 일탈행위일 뿐이라고? 에라, 이런! 생명체는 생존이 어려우면 번식부터 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른바 ‘지능’이란 게 있어서 이런 본성마저 거슬러 번식을 중지하기도 한다. 이러고도 멀쩡할 수 없다.
선그믓 담론이 오로지 생물학이나 의학의 영역인 것만이 아니다. 이것들도 그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수학조차도 나라마다 발달하는 영역이 다르다. 비록 자신들이 인지하지 못할 수는 있으나, 각자가 직감으로 많은 것들을 안다. 심지어는 외국인의 이름을 듣고도 ‘남자 이름’인지 ‘여자 이름’인지 짐작한다. 여기에 무슨 기준이 있어? 그럼, 그 발음에 남녀의 특성을 반영했으니까. 이게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의견이다.
주위에는 구습에 얽힌 주장들이 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이러저러해서 천생연분이라나 뭐라나. 이게 근거가 허랑한 소리라고는 하나, 여기에도 숙고할 여지가 있어. 언어와 개념의 부재로 이해와 설명이 막힌다 해서 존재 자체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런 존재들이 다 유령이야, 유령! 비록 존재는 하나 이름이 없어 어떻게 불리지도 못하고 떠도는 것들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 명실상부하게 존재감을 뽐내는 것들도 영겁의 세월에서는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나는 가믄장아기가 육신은 물론이거니와 영혼의 동반자로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그러면 은장아기나 놋장아기와 같은 인물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아, 그것들이야 다 엉터리이니 알 것 없다. 이래도 괜찮을까? 아니지. 잘난 게 잘난 값을 하듯이 못난 게 못난 값을 한다. 마치 전생의 업보처럼 얽힌 것들이 당최 이견을 들을 줄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분란을 유발한다. 이런 사태를 두고 나는 뭐라고 할 것인가?
“저거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이건 두고두고 후회할 실언이다.
“실속도 없이 싸우기 싫다.”
이런 다짐도 번번이 실패한다.
“귀신은 뭐 하느라 저걸 잡아가지도 않나!”
혹자는 수십 년 동안 이렇게 탄식도 하더라만.
“이러다가 죽어서 지옥에서 다시 만날라.”
이러니 나 또한 득도는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저승이 있으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이승에서 알게 모르게 쌓은 죄업이 많다. 저승의 판관도 쩨쩨하게 굴지는 않겠지만, 아마 그럴 것이라 기대는 하지만, 그쪽 사정이 이쪽과 다를 수도 있겠고. 아, 걱정스럽네. 설마 내가 얼렁뚱땅 몰라라 외면한 것들까지 들먹이지는 않겠지. 혹시 거기는 공짜 쿠폰이 없을까? 몰래 뒷문으로 슬쩍 들어가거나. 업경대에 먹물이라도 뿌려야 하나. 바로 이런 인간들이 홧김에 기가 막힌 명언도 한다.
“우리 이러지 말고 한날한시에 손잡고 삼도천을 건너자.”
이보다 더 어이없는 ‘권유’도 드물다. 이승의 소란을 저승에까지 이어가려고 하다니. 그래서 귀신도 이들을 애써 피해 다녔는데, 아차, 실수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누가 먼저 죽었다. 이승의 사람들은 이 죽음을 두고 시원섭섭하다고 표현했다. 그럼, 대단히 시원하고 약간 섭섭하다고 해도, 아무개의 죽음을 쉽게 말할 수야 없지. 처신은 으레 이래야지. 그러면서 이들은 마치 중대한 과업이라도 완수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편히 지내겠구나. 한동안 고단했어.’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게 이럴 줄 알았다. 부부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상대가 영영 사라졌으니, 평화는 저절로 도래하리라.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적막과 결여가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게 웬일이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이게 무척이나 평범하거니와 심지어 감방의 광경마저도 판박이로 이와 같다. 그렇다면 내가 퍼부은 악담과 저주는 상대의 잘잘못과 무관하다. 이승에 남은 자가 이걸 바로 인식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다.
“저승에 먼저 간 그 인간이 문제였어.”
아니지, 적어도 절반은 틀렸다. 그러니, 재혼은 신중했어야지. 아차! 나중에 보니 돌고 돌아 원점이었다. 상대의 성격은 이전과 아주 달랐으나 본인이 도중에 역주행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몰랐던 거지.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괴롭다. 빵을 달라고 하면 빵을 주면 되고, 떡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면 된다. 그런데 저쪽이 빵을 달라고 해서 이쪽이 빵을 줬더니, 저쪽이 그게 사실은 떡을 달라고 한 것이었다고 하면, 이쪽은 혼란스럽다. 이쪽과 저쪽이 과거와는 다른 삶을 바라서 새로운 구상이란 걸 했는데, 습성은 그대로였다.
결국 대단히 조악한 형태로 망자가 환생한 셈이다. 이러고도 구관이 명관이었다고 하려나. 어렵다, 어려워.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도적의 눈에는 도적이 보인다. 이게 만고의 진리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개가 바라보는 바도 아무개의 됨됨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억측과 비약과 망상을 피하랴. 장님 코끼리 구경과 다를 게 없다. 다리를 만지고는 기둥을 떠올리고, 배를 만지고는 벽을 떠올린다. 이게 코끼리의 전모는 아니어도 코끼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다시 이야기를 곱씹어보자. 가믄장아기는 언니들과 뭐가 달랐던 것일까? ‘배또롱 아래 선그믓 덕분’이라는 응답이 틀렸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녀석이 ‘모범답안’을 거부한 건 분명하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그런 줄로 알자. 인생 뭐 별거 있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더라. 무난하게 사는 게 최고인 거라. 착하지, 착해. 그래, 그래. 그래야 뭐라도 생기는 거야. 아무렴, 부모님 은덕이라고 해야지. 요런 음흉한 수작에 가믄장아기는 대뜸 제 주장을 얹어버린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짓말도 좀 하지.”
이것도 세파에 시달려 때가 묻은 인간들의 발상이지, 아무나 이러는 거 아니다. 더구나 뭘 제대로 알고 이러기도 어렵다. 그러면 은장아기나 놋장아기는 어떨까?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거지. 그리고 이런 상태가 평생 이어진다. 작금의 주변에도 흔하디흔한 인간형이다. 이들의 나날을 가만히 살펴보자. 자신들의 필요와 생각은 몽땅 증발시켜버리고 정체 모를 것들을 추종하느라 오늘도 바쁘다.
‘왜 저럴까?’
이런 눈길도 괘씸하다. 나보다 못난 것들이 뭐라고 하다니!
“각자가 사는 인생이다. 남들은 내게 별반 관심도 없다. 이게 꼭 나쁘지도 않아. 그런데 뭘 그렇게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나?”
내가 어디서 이랬다가 비방도 들었다만, 이 비방조차 합리성이 없다. 아마도 그네들의 심기에 내 말이 거슬렸나 본데, 이의 원인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삶에 사랑과 믿음이 없다. 이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노는 친구들이다. 자신의 삶은 소중한데, 자신의 삶이 없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이런다고 내부의 권태와 증오가 저절로 사라지나. 남들의 평온마저 못마땅하다.
이들이 가끔 이렇게 재를 뿌린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나?”
답변은 아래와 같다.
“그런 게 왜 필요해?”
모모가 다시 이렇게 오금을 박는다.
“남들은 아무도 안 그런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검토할 게 있는데, 바로 ‘남들’이란 존재이다. 모모가 말한 그 ‘남들’이 누구일까?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아니지, 이건 사실과 너무 어긋나. 오늘날에도 가믄장아기들이 건재하다. 남들이라고 다 같지도 않다. 또 이런 걸 다수결로 하랴. 그러니까 아무개가 언급한 그 ‘남들’이란 결국 ‘실제로나 상상으로나 자기와 편히 공조하는 인간들’이라 정의해야 할 것이다. 이게 준거집단이다.
참 이상도 하지. 사람들은 왜 자기들의 판단기준을 돌아보지 않을까? 어물쩍 ‘남들’이라 얼버무리기 전에 유유상종의 결과도 살펴는 봐야 하지 않나? 그 ‘남들’ 역시 자기를 ‘남’으로 보고 판단할 것이다. 못난 작자들이 끼리끼리 서로서로 변명거리로 삼으려나.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단체들이 있다. 또 이런 것 없이 빈번히 어울리는 인연들도 있다. ‘고맙다. 영광이다.’ 이러면 다행이고 축복이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희망이 없다.’ 이러면 결정해야지. 그래도 내내 머물거나. 아예 영영 떠나거나.
“마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경의 이 구절이 여전히 새롭다. 그렇다고 차마 떠나지도 못하는 이들을 힐난하고 싶지도 않다. 잠시도 홀로 있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어느 편에 들려고 무지무지 애를 썼으나 끝끝내 좌절하는 이들도 있다. 남들이 더 안타깝다. 이들에게 필요한 게 힐난이 아니라 위로거나 응원일지도 모르니까. 생각이 또 『논어』의 한 구절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에 이르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과연 공자님의 말씀대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웃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 말하자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거지.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곁다리로 끼어들어 뭐라도 하나 챙길 건수가 없다.
“저 친구가 마음은 참 좋은데, 나머지는 영 신통찮아.”
“사람이 좋으면 충분하지, 또 뭘 바라나?”
덕을 앞세운 공자님이나 이를 떠받든 후인들이 고마운 거지. 그러나 위대한 분들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시절이 달라진 만큼 비판해야 한다는 주장이 옳지 않을까? 딴은 그래. 뭐가 좀 달라지긴 했다. 사실이 그렇다면야 의당 생각을 바꿔야지. 그러나 이것도 착각이 아닌가 싶어. 그나마 덕이 있어 보이고 형편이 넉넉한 이웃의 주변에는 온갖 잡것들이 들끓어 그 덕마저 위태롭다.
‘저 이웃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것부터가 몹시 걱정스럽다. 내가 귀한 이웃을 수호하자고 나서려면, 먼저 팔자에 없는 이전투구를 각오해야 한다. 흑심이 가득한 그 주변의 것들이 나를 적으로 볼 것이다. 그들한테는 내가 달갑잖을 테니까. 엎치락뒤치락 싸우다 보면 피차 몰골도 비슷해진다. 내 순수성도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이건 어째 기시감마저 드는 상황이다.
“아이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가 저 아수라장에 들어가나?”
비명이 절로 나온다.
“귀신도 울고 갈 저것들을 누가 어이 할꼬?”
저들은 권모술수의 대가들이다. 이대로 두고 보나? 아니지, 이럴 수는 없지. 누군가는 나선다. 성정은 용감하고, 의도는 훌륭하다. 성패는 알 바 아니고. 일을 도모하는 건 사람이나 이루는 건 하늘이라니까. 나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순욱(荀彧)에게 공감하는데, 그러고 보면 이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자기가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평생 헌신한 인물이 바로 조조(曹操)인데, 이 작자가 나중에 보니 흉악하기 짝이 없더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더러더러 있다.
“이, 이불이 절대로 아니야!”
하도 놀라서 아무개가 ‘이웃’을 그만 ‘이불’로 발음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새로 별명을 얻었는데, 이불과 사람[人]의 합성어인 ‘이불인’이 그것이다. 이게 또 어떻게 ‘이불인(異不忍)’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성(姓)은 ‘이(異)’요, 명(名)은 ‘불인(不忍)’이라. 이불인이란 남들과 달리 자기는 차마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형편이 순욱과는 좀 달라서 죽지는 않았다. 다만 현장에서 멀찍이 물러났을 뿐. 그러나 세상의 소란이 여기로도 달려왔다. 이불인이 어느 날은 이런 심경을 토로했다.
“남들이 헛소리는 제발 안 했으면 좋겠어.”
이것도 참 난감한 버르장머리이다. 누가 고칠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하다. 선정에 들어 문득 확철대오라도 한다면 모를까. 사안의 성격이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오감을 통해 뭔가를 습득하는데, 이의 결과로 얻는 관점이 있다. 이것도 부실하기 짝이 없으나, 이것이 주는 혜택도 있다. 그렇지, 아무도 경험과 논리의 힘을 경시할 수 없지. 그러나 부작용도 어마어마하다. 특히나 선무당이 사람을 확실히 잡는다.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이불인은 그나마 좀 나으나 확신에 찬 선무당은 경악스러운 재앙을 초래한다.
‘집단지성이라는 건 믿을 만한가?’
‘자정작용이라지만, 이게 곧 무책임이 아닐까?’
뭔가 불안하니까, 이런 의혹도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아는 게 없는가 보다.’
‘달동네 출신이라며?’
‘아무개는 과학기술에 무지하다.’
이렇게 살피고 저렇게 따진다. 여기에도 나름대로는 저마다의 진실이란 게 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다는 게 무엇일까? 한때는 외부를 바라보는 창문이었던 관념들이 이제는 시야를 일그러뜨리고 손발을 묶는다. 급기야 제 아집과 독선으로 남들을 터무니없이 숭배하거나 멋대로 경멸한다. 이게 갑돌이와 갑순이의 삶이다. 이불인도 대동소이하다. 나도 별로 다르지 않다. 돌아보면, 몹시도 부끄럽지, 꼴값도 많이 떨었고. 그나마 자신이 이런 줄은 알아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당신의 결론이 뭐요?”
“그런 걸 왜 제게 묻나요?”
이것도 대화가 아니다. 양자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석존께서 수십 년 동안 설법하셨고, 그 내용이 방대하게 경전으로 전해지건만, 정작 당신은 한 말씀도 하신 적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아, 설법이란 걸 우상으로 받들지 마라. 그게 그런 게 아니다. 무량겁 또 무량겁을 거듭하여 삼천대천세계마저 하염없이 생멸하는 이 법계에서 그 무엇이 네 가까이 머물러 있으랴. 인연들도 시시각각 흘러간다. 과연, 과연 한 말씀도 없었다는 이 말씀이 맞아.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또 한 말씀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 팔만대장경을 펼친다. 하늘과 땅이 온통 환해진다.
“영감님은 소원이 뭐요?”
“나는 며느리가 지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낮잠이나 자고자 하오.”
사바세계의 속인들에게 언어는 막강한 힘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명(名)과 실(實)의 어긋남이 골칫거리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니 ‘견강부회(牽强附會)’니 하는 게 다 이에 따른 궁여지책이다. 장미를 다르게 부른다 해도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천만의 말씀! 속물들은 그렇지 않다. 갈치나 조기를 물고기라고 한다. 멸치도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자기들이 고기라니? 이것들이 인간의 먹이가 되자고 나타난 생물은 아니다. 그러니 누구 말마따나 ‘물고기’를 ‘물살이’로 칭하는 게 온당하다. 호박꽃을 보라. 이게 넉넉한 인심을 느끼게 해도 이름 때문에 푸대접을 받는다.
“서방님은 하늘이고요, 저는 땅이라예.”
이런 우스갯소리도 그냥 넘길 게 아니다.
“와, 놀랍다. 요즘도 이러는 사람이 있다니!”
남성은 고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고, 이렇게만 들으면, 이런 세계관이나 인생관이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지옥과 극락이 따로 멀리 있지도 않다. 인구증가가 두려우면 여성들을 억누른다. 인구감소가 두려우면 여성들을 떠받들고. 그러고 보면 여성들이 오래오래 집안의 살림살이를 맡게 된 연유도 살펴는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그 위상과 권한도 확실히 보장해야지. 그분이 홀연히 판도를 전복하는 것도 의당 인정해야지.
“서방님은 높은 것들을 구하세요. 저는 낮은 것들을 살피겠어요.”
자기가 실권을 확실히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러므로 부엌은 여성으로 납신 조왕(竈王)의 공간인 만큼 남자들이 들락거리지 마라. 살림살이가 곤궁하면 이것도 멋쩍겠지만, 구도가 이렇다는 거다.
여기와 저기가 다르고, 오늘과 어제가 다르다. 그럼, 그렇긴 해. 그러나 이런 분별도 어느 누가 내내 확고하리라 장담하랴. 여전히 미완성이다. 그래도 달라진 게 전혀 없지는 않아. 이제는 하늘과 땅이 어떻다 하기 어렵잖아.
그래, 여자들이라고 꼭 집안에만 있으란 법이 있느냐. 양성평등은 철칙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대와 어긋나게 뭔가 자꾸만 망가지는 양상이다. 이게 벼락출세자 또는 벼락부자가 으레 겪는다는 그 부조화와 유사한 것일까? 내가 헛것이라도 보는가? 정말 어디에 모순이 있나? 이게 다 성장통일까? 나도 모르겠어.
하기야 목수가 문짝 하나 맞춰 다는 데도 삐거덕거리기는 한다. 아무리 실력 있는 악사들이라 하더라도 여럿이 한 무대에서 공연하자면, 몇 차례는 예행 연습을 해야 한다. 이래야 불협화음이 없다. 너무 긴장하면 소변이 마렵다. 이러면 저절로 급해진다. 날씨마저도 음질에 영향을 준다. 습성이 다른 남녀들이다. 이들이 갑자기 역할을 바꿔가며 뭘 함께 하자니, 이게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숨은 사연들이 워낙 많아서 나날의 삶이 더 고달프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대책도 없어. 앞길이 보이지 않아. 이래도 저마다 살자고 발버둥을 친다. 모두가 불안하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여성들한테로 쏟아지는 건 아닐까? 이게 익숙한 관성일 수도 있고, 또 타고난 조건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대를 거쳐왔다. 마침내 이 나라도 선진국이다. 그래서, 바로 그래서 얼룩을 무시하는 건 아닐까? 오로지 남의 일로만 알았던 것들이 갑작스레 내 일이 되었다. 여성들도 천사들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어. 더러는 간단히 나쁘다는 것만으로는 크게 부족한 짓도 마구 저지른다. 참, 어렵다!
“인생은 원래 이런 거야! 몰랐어?”
그러나 이건 달관이 아니라 망발이다. 상상력이 빈곤하거나 의지가 박약하거나. 인간이 못나면 이렇게도 옹졸해진다. 방도가 아예 없다는 거잖아. 자기가 원래 그런 줄은 어찌 알아? 이런 못된 것들! 그래도 이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나를 두고 한심하게 여기려나. 이들의 사연들도 구구하고 절절하다. 비명을 지를까, 한숨을 내쉴까. 인간사가 이래서 힘겹다. 이러니 다시 과거를 돌아보며 기적의 실마리를 찾아본다.
“저 화상이 죽고 나면, 내가 벌거벗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춤을 출 거다.”
요즘은 이런 전설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 시골에는 왈가닥 여자들이 있었다. 물론 ‘저 화상’이라 하는 분은 배우자이다. 남녀가 혼례를 치른다고 다 잉꼬부부가 되는 건 아니니까. 여론도 무덤덤했다. 남의 가정사에 굳이 뭐라 할 게 있나. 그저 그런가 보다 하지. 그래도 누구나 한바탕 웃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도 맥락을 따져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이미 죽은 자는 도리가 없다. 부인이 벌거벗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춤을 추거나 말거나. 여인의 그 발언도 이승의 남편을 상대로 한 것이다. 자기가 반드시 그러겠다기보다 엄포성 으름장이다. 부인이 진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지? 말썽꾼은 항복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부인의 반란이 가능하냐? 그럼. 그렇고말고. 거기는 유서 깊은 시골 마을이다. 아마도 판이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말릴 테니까. 부인도 내심 이런 걸 기대하고 소동을 일으킨 것이고.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인간사가 변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어째 조용하다? 이게 불안하다. 남자들은 변한 게 없잖아. 하기야 지지자도 없는 도시에서 누가 홀딱 벗고 나서봤자 소득도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이다. 거기서 기세가 등등했던 행동도 여기서는 볼품이 없다. 아무개도 그래서 ‘러브레터’는 팽개치고 ‘카뷰레터’에 골몰하나? 어, 내연기관 자동차는 곧 없어진다는데.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그 ‘라바콘’이라고, 마침 모양도 고깔과 비슷하니, 이거라도 하나 머리에 쓰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 봐? 뭔가 마뜩지가 않아. 이 고요가 자포자기의 한 측면이고, 자살률의 증가로 이어진 건 아닐까? 이게 공연한 노파심인가 싶기도 하고.
한때 시골의 그네들이 벌거벗고 어쩌겠다고 했다.
“그래서?”
누가 이렇게 더 채근하지는 않아.
‘차마 더는 말할 수 없다.’
이런 터부도 공연히 생긴 게 아니다. 그렇더라도 맥락은 살펴야 하지 않나?
“한때는 꼭 필요했으나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껏 관습일 뿐이다.”
실상이 이렇다면야 이러나저러나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게 그렇지 않다. 급기야 압박감이 생각마저 끊어버린다. 그러니 이참에 동네방네 어쩌고 한 이 문장의 함의를 밝혀보자.
“선그믓, 선그믓, 내 선그믓. 어여뻐라, 내 선그믓.”
아무리 물정 몰라도 그렇지. 이러다가는 미친년이라는 폭언과 함께 돌멩이가 무더기로 날아들라. 그런데도 나는 웃음부터 나온다. 이게 더 시원스럽다. 딱히 뭐라 할 건 없잖아. 선그믓을 그대로 보지라 바로 말해도 좋다. 그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게 천성에 더 가깝거니와 가믄장아기의 응답과도 상통한다. 마치 여름날 범나비가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처럼 아름다워. 이게 경이롭기마저 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지는 않는다. 거참!
가믄장아기가 그랬듯이 나도 낙인이 찍히려나. ‘저 녀석을 당장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 ‘아니다. 그러다가 역효과가 나타날라. 그러지 말고 곤장이나 서른 대 쳐라.’ 예전이었으면, 내가 형틀에 묶여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으려나. 그렇기로 나 어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일에 공감하랴. 그러므로 나는 무죄이다. 이게 다 ‘천기누설(天機漏洩)’이거나 ‘살신성인(殺身成仁)’이야. 이러다가 혹시 괘씸죄마저 얻었으려나. 운수가 사나웠으면 비명횡사했을지도 몰라.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유물이다. 한반도에는 유별나게도 이게 참 많다. 이건 그 시대의 무덤이고, 그때 사람들도 죽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숱한 죽음들이 다 예우를 받았을까? 글쎄. 유럽의 어느 늪에서 이 시대의 미라를 발견한 적이 있다. 밧줄로 목이 졸린 흔적이 역력하다. 열대엿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살해를 당해 던져진 것이다.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를 들고 몹시도 광분했구나. 배꼽 아래 그곳에 그날의 난도질 자국이 뚜렷하다.
갈등의 원인이 궁금하지는 않다. 그걸 알아서 뭐 하나? 내 정서가 이렇기도 하고. 시대상과 관련해서 보더라도 진상규명이 거의 불가능해서, 누가 어떻게 감당하기도 어렵다. 집단의 안녕을 위한답시고 공공연히 한 인간을 처단했을까? 개인들 사이 암투가 있었나? 연적이 직접 죽였나? 남들한테 시켰나? 어쩌면 남자가 그렇게 죽였을 수도 있다. 에이, 남자가 설마 거기를 손댔을까? 이것도 장담하기 어렵다.
곳곳에 유령들이 많이도 얼씬거린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렇다면 일단 숨부터 돌리고 찬찬히 따져보자.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좋으랴. 뭘 잘못 건드려 오히려 일을 망칠라. 언행도 신중히 하고. 괘씸죄는 반역죄보다 더 무겁다. 정말 불가피해서 억지를 부리더라도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도 이 과정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지름길부터 찾아? 이러다가 예전에 사라진 그 거구귀(巨口鬼)가 무시무시한 형태로 다시 나타날라.
“혹시 어디에 비방(祕方)은 없나요?”
실은 이게 바로 귀신을 부르는 주문이다. 어이쿠, 엄청나게 큰 아가리가 이미 다른 꼴로 변해서 주위에 있는지도 몰라. 뭐든 의심하기로 들면 끝이 없다. 그렇더라도 이걸 사나운 괴물이 아니라 다정한 청의동자(靑衣童子)로 만나야 한다. 그러자면 나도 명철해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확 달라질 수도 없고, 이것 참 큰일일세. 혹시 모를 기회가 와도 이래서는 의미 없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기본이 중요하다. 그래서 꼼수조차 아무나 써먹을 수 없다. 하물며 나 어찌 다소곳한 아이를 만나랴. 욕심도 지나치지.
그렇기로서니 함부로 단정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것 또한 최선은 아닐 것이다. 질문에도 맥락이 있다. 개념조차 흐릿하면 이것도 미궁에 빠진다. 그러나 누구나 처음은 다 이랬을 것이다. 또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어서 좋은 것도 있다. 여기서는 차마 하지 못할 질문도 저기서는 실컷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닥쳐보면 전혀 아닐지 모른다. 이런저런 의문점들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어디에 주인 없는 금덩이가 있는지나 물을까? 이런 거야, 뭐, 내가 직접 묻지 않아도 귀신이 그냥 알려 줘야지.
창밖에서 고양이가 울어도 저 녀석이 왜 저러나 하며 살펴본다. 하물며 사람이다. 설령 시신이라 하더라도 알몸이라면 뭔가로 덮어준다. 그러나 이런 정서와 어긋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 수십 년 세월이 지났으나, 나는 아직도 아연하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체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니. ‘아마도 녀석이 정신병자였나 보다.’ 처음엔 내가 이러면서 그저 별난 사건쯤으로 이해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왜? 어쩌다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과감하게 질문하지 못한다. 나는야 새가슴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튼실해 보이는 이들한테 의견을 들어볼까? 특히 당사자들이라 할 여성들한테 실상을 알아보자. 그러나 이것도 가시밭길이다. 한참 그 응답이라 할 ‘요즘 세상에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어쩌고 하는 걸 듣다 보면, 내가 마치 괴상한 물건인 듯하다. 정말 그래? 그렇다면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상사들은 다 뭐란 말인가? 이래저래 ‘배또롱 아래 무지개’는 외면하고 ‘배또롱 위의 무지개’를 우러를까! 나도 잘 모르니까, 뭐라 말할 수 없으나, 이게 영 찜찜하다.
이를테면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사실’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럼요,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니까요. 그러나 환자는 생활에 지장이 있다. 다리가 없으니까. 배또롱 아래 일들이라고 이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모종의 사건으로 싱그럽게 충만했던 뇌와 가슴과 선그믓의 앙상블이 허물어졌다. 심각하다. 혹시 산모가 아기를 안고 높은 데서 뛰어내린 것도 이 때문일까? 연구자들이 쥐[鼠]로 실험을 했다. 암컷들한테 특정한 호르몬을 주입하자, 이것들이 수컷들한테 달려드는데, 그 모습들이 인간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쥐순이가 쥐돌이한테 뒷다리를 활짝 벌리고는 유혹하는 행동도 거침없이 한다. 실험실의 관찰자가 탄복했다. 내가 큰소리를 쳐봤자 쥐와 별로 다를 게 없구나. 이러면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은 자괴감이다. 내가 무심코 엉덩이를 씰룩거린 것도 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러면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은 안도감 또는 해방감이다. 그렇다면 여성용 팬티의 디자인이 요란한 것도 이런 것과 연관이 있으려나. 나도 몰라. 그러나 이런 생각을 이제야 겨우 하니, 내가 둔한 게 분명하다.
역지사지해보자. 내가 여자였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보다 남자들이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구석구석이 험악하고 나날이 살벌하다. 흉흉한 소문도 끊이지 않는다. 비록 남자들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당수가 여자들을 마치 노예나 식민지처럼 대한다. 극악무도하게 선그믓을 모욕하는 작태에 전율도 한다. 저런 것들한테 사랑을 말해? 무슨 행복을 기대한다고? 어이가 없다.
전문가라고 해서 다 믿을 건 없어. 이들이야말로 정말 괴이한 바보들인지도 몰라. 그렇다고 이들의 학식을 무시하나? 이것도 바른 태도는 아니다. 그러니 각자는 먼저 진솔하게 자신의 감각으로 과제를 직관해보자. 도대체 남자들이 왜 저럴까? 아, 질문을 조금 바꾸자. 남자들 가운데 일부는 왜 저럴까? 나는 이걸 무명(無明) 또는 일종의 착란으로 여긴다.
한 번도 위계와 서열이 없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이들이 분리불안을 느껴서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닐까? 무시를 당하느니 겁이라도 주겠다나. 급기야 여자들도 그만 미쳐버렸다. 이쪽은 주먹질로 저쪽은 잔소리로 종종 술주정도 곁들여 저마다의 존엄을 기어이 확인하려 든다. 이러자 온갖 종류의 지옥들이 펼쳐진다. 각자가 바로 아수라인 줄도 모른다. 이러니까 오늘도 혼란의 장대한 드라마는 얼룩덜룩하게 진행 중이다.
‘다 때려치우자, 때려치워.’
‘아, 아니지, 아냐. 이럴 게 아니지.’
마음이 자꾸만 흔들린다. 우왕좌왕하다가 어디론가 내쫓길라. 이건 아니지. 먼저 결혼제도 안에서 살길을 궁리해보자. 하나보다는 둘이 더 낫지 않을까? 아기도 갖고 싶어. 그런데 배필은 어디서 구하지? 이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어휴, 인공지능 로봇이라도 서너 대 주문하게 어서 빨리 특이점이라도 왔으면 좋겠어. 에라, 나 혼자 살자. 결혼제도 밖에서 놀거나. 아니지, 이것도 좋지 않아. 일단 혼인은 하자. 이것도 불안해. 대책을 마련하자. 혹시 파탄이 나더라도 폭삭 망하지는 말아야 하니까.
‘어? 아기를 가지면 곤란하겠네.’
여기도 전장이다.
“‘낙태’라 하지 말고, ‘임신 중지’라 하자.”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공권력은 나서지 말라.”
규모가 더 커졌다.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가 고생시킬 것 없다.”
남자들 가운데 더러는 이러기도 한다.
“저 사람은 근본이 착하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야.”
과연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이리하여 소란도 여전하고. 탄식도 절로 나오고.
“개도 암컷과 수컷이 서로 물어뜯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아서라, 직언도 불순하게 들린다.
“뭐? 내가 개보다 못하다고?”
그러니 요렇게 물어보자.
“이봐요, 왜 그래요?”
그러나 당사자들은 귓구멍이 틀어막혔다. 정말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이 없는 건가? 다 알면서 애써 외면하느라 저러나? 이러나저러나 난점은 아무도 이런 싸움을 쉽사리 말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제발 좀 그만해라. 평생 그럴 거냐? 피차 괴롭다. 안 그럴 리 있나. 이러다가 이들이 잠시 잠잠하더니. 그만 맛이 많이 가버렸다.
“고향이 그립다.”
“아, 어머니······.”
‘고향’이나 ‘어머니’가 어떻다는 게 아니다. 고향에도 이웃이 없다. 다 떠났어. 어머니마저 없다. 설령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어디 좋기만 하랴. 이들이 새삼스레 ‘고향’이니 ‘어머니’이니 하는 건 자기들이 고달프다는 자백이다.
‘더는 못 견디겠어.’
회한도 있다. 한때는 그럴 만해서 그랬다 해도, 다시 돌아보니, 그게 다 똥찌그리하다. 여러 가지로 후유증이 남았다. 굳이 모질게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 그만 사람답지 못했구나. 심신도 상했다. 허튼소리에도 족보가 있나 보다. 나도 더러 이럴 때가 있다.
“이 친구야! 오밤중에 만취한 채로 이렇게 전화를 하면, 난들 어쩌란 말이냐? 벌써 두 시간도 더 지났다. 당장 고향으로 달려가 감자나 심자는데, 지금은 엄동설한이다. 땅이 꽁꽁 얼었어.”
이건 불치병에 가까운 난치병이다. 소금쟁이가 춤을 추고 가재가 뒷걸음을 치던 바로 그 개울이 갑자기 눈앞에 어른거리는 거라. 첫사랑이 어쩌고 하는 이들도 수상하다. 수십 년이나 지난 그것도 실상은 번뇌와 환상의 결정체이다. 여기에 연연할 것 없다. 실지로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범을 만났을 수도 있었어. 지금쯤이면 틀림없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거야.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진실도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게 지금은 해로워!’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겉으로 맞장구를 친다.
“암, 그렇고말고. 첫사랑은 눈부신 자산인 거지.”
그 상대가 기실은 못난이여도 무방하다.
‘이 친구가 많이도 외롭구나.’
이걸 잘 알면서 나 어찌 뜨거운 응원을 보내지 않으리. 착각과 오해는 변수라기보다 상수이다. 팔공산도 운주산도 한심한 인간들의 형편을 뻔히 알아서 말이 없는 거야. 낙동강도 그러하고. 이것도 다 이유가 있다니까. 차마 어쩌지 못하는 이들이 그만 산하를 닮았다. 이리하여 몸 성히 잘 지내라는 인사말도 살갑게 하지 못하고 버럭 이렇게 소리를 질러댄다.
“술 좀 작작 마셔라!”
저기 저 산도 저 강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혼자서 볼 때는 멀고, 여럿이 볼 때는 가깝다. 그래서 그런가. 저 산과 저 강이 각각 하나가 아니라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다. 와,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 더욱 놀라워라, 헛소리에도 일리가 있다니! 보편타당성도 봉황새와 같아. 그런 게 원래 없어. 아니야, 무슨 소리! 횡설수설에도 뼈가 있다니까. 모두가 갈팡질팡 이렇게나 혼미하나, 이들 또한 산야의 자귀나무들이다. 흠이 많아. 그래도 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린다. 꽃들이 와르르 피기라도 하면, 향기도 멀리멀리 퍼진다.
[2023.12.31.]
첫댓글 .
다음과 같은 분들이 읽으실 것.
1. 대단히 심심한 분.
2.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
이유/
별반 재미도 없으면서 너무 길다. 200자 원고지 116장.
"똥찌그리하다"는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눈 덮인 감나무의 홍시가 옛날에는 참 귀한 겨울 간식거리였는데 지금은 저렇게 자연 그대로 달려 있네요. 봄이 오면 다 떨어지겠지요. 가치라는 것은 인간이 매기는 것이지 자연에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그냥 살다가는 인생인데~
.
독자들도 뭐라고 할 말이 많을 듯한 글인데도
역시 대체로 잠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나가지는 말자.
이러면서
저는 나름대로 얼렁뚱땅 얼버무리기도 했는데.
배또롱?
사전을 찾아보니 배꼽~~~^^
제목이 신선한데 사투리 모르면 처음부터 막힌다
《배꼽 아래 무지개》 제목 하나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무 바빠서 다 읽으면 다시 느낌을 적겠습니다
김인기 편집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