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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생을 얻게 하는 십자가와 구원”
+ 본 문 : 요한복음 3장 16절 - 21절 (신약 146쪽)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믿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유교의 가르침에 충실해도 반듯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에는 영생을 얻게 하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나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함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갖게 하시어 하나님과 대화하고, 말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고, 우리 인간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우리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이런 우리 인간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십자가와 구원’ 은 우리가 사는 생명운동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 인간들이 짓는 모든 죄의 근원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그 어느 동물도 소유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사냥하고, 사냥해서 먹고 배부르면 힘들게 사냥한 것까지도 다 버립니다.
이처럼 짐승들에게 없는 죄의 근원인 소유욕이 고등 동물인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해야 할 우리 인간들은 배가 불러도 소유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돈 많은 부자를 보고 잘산다고 하며,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을 보고 못산다고 말합니다.
잘 산다 못 산다를 돈으로 판단하는 너무 잘못된 판단은 교회까지 들어와 말썽을 부립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자기 교회 목사님에게 ‘목사님, 내가 오늘 대어를 낚았습니다.’
하고 말을 하자, 목사님께서 ‘그래 집사님, 누굴 전도하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제가 오늘 외제차 타고 다니는 부자를 전도했습니다.‘ 하였답니다.
외제차 타고 다니는 사람 전도했다고 대어라면, 버스 타고 다니는 사람은 피라미입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도 소유가 많고 적음으로 잘살고 못사는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욕심이 만들어낸 인간의 소유로 잘 산다 못 산다를 판단하는 것은 참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짓게 하는 욕심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를 염려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신앙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게 하는 욕심에서 시작된 소유욕에서 해방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보고서 ‘아, 저 사람 잘 사는 사람’ 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어도 나누고 베풀지 못하면 ‘저 사람은 못사는 사람’ 이라고,
말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이 되려면,
우리 인간이 바뀌기 전에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됩니다. 모든 물질을 이용한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세상은 더욱 나빠지게 됩니다.
중동에서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후세인이 모래 속은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는,
착안을 하고 모래 속에 토치카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모래를 뚫는 미사일이 있어서, 먼저 그 미사일을 터뜨린 다음에,
미사일을 그 구멍에 쐈답니다. 그래서 후세인이 견딜 수 없어 손들고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과학의 능력을, 예전에는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린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날아다니는 새를 떨어뜨리는 일은 문제도 아닙니다.
달에서 새가 날아도 여기서 쏘아 잡을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능력은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능력이 발전해 나는 새는 떨어뜨려도, 떨어진 새를 날아가게는 못 합니다.
결국 인간이 과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은 못하며, 죽이는 일만 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짓고 있는 죄이며,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 인간이 지은 죄는 더해 갑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구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거듭나지도 못합니다.
제가 처음 성지순례를 갔을 때, 제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땐데, 돌아올 때 쯤 되어,
전화했더니 ‘아빠 언제 와?’ ‘내일 도착해. 너희들 줄려고 맛있는 쵸코렛 샀다.’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쵸코렛보다 더 맛있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종류별로 많이 샀습니다.
밤늦게 집에 도착했는데, 제 아이들이 반쯤 졸다가, 아빠가 왔다는 소리에 뛰어나오면서,
‘아빠! 엄마’ 하면서 뛰어나온 것이 아니라 ‘쵸코렛 쵸코렛’ 하면서 뛰어나왔습니다.
그래서 쵸코렛을 주었더니, 20일 만에 만난 엄마 아빠는 보다 쵸코렛부터 나꿔 챕디다.
그리고 서로 자기 몫을 챙기느라고 야단법석이더니, 한 녀석이 갑자기 ‘앙-’ 하고 웁니다.
그래서 왜 우냐고 물었더니, ‘색깔' 그럽니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색깔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웠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젯밤에 분배받은 쵸코렛 개수가 맞는지 셉디다.
저는 그렇게 아이 셋을 기르면서 ‘저 철없는 아이들 속에도 아담과 하와가 심어놓은,
욕심이라는 원죄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욕심내라. 미워해라. 싸우라.” 하고 가르친 일이 없는데도, 원죄가 그렇게 만듭니다.
제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여러분들도 그렇고, 모든 인간들이 다 그 모양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에 아담과 하와가 심어놓은 욕심이라는 원죄로 가득 찬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 속에 있는 더러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느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문제도, 사회의 문제도, 나라와 국가의 문제도,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교회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죄 문제는, 우리 결심이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죄의 문제는, 때로 회개함으로,
해결되지만 거기엔 반드시 내가 회개한 죄에 대한, 용서가 따라야만 해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는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 지으면 꼭 피해자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죄를 아무리 회개하고 또 회개했어도,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지은 죄는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에는 반드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용서해야 해결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한 탕자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하고, 회개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기다리다, 사랑으로 끌어안고 울면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탕자가 새 생명을 얻고 구원받은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가 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버지가 기다리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용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돌아왔어도 아버지가 용서하고 받아주지 않았으면, 탕자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는 입술만의 회개로 내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아무리 입술로 회개하고 또 회개했어도,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지은 죄는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에는 반드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용서해야 해결됩니다.
결국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이 용서해 줄 것인가, 기다려 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죄 지었으면, 나는 회개할 뿐, 내가 지은 죄를 해결하는 열쇠는 나한테는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의 용서에 있고, 하나님의 용서함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은 죄는 용서받아야 되는데, 그가 나를 사랑해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내가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겠습니다."
사실 세 번만 용서해도 훌륭한 사람인대,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해서 용서를 세 번 했다면, 그 사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하겠다고 했으니, 그만하면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라."
여러분! 일흔 번씩 일곱 번씩 용서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전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아니 일곱 번은 물론 세 번만 용서해도 대단한데 일흔 번씩 일곱 번 어떻게 합니까?’
하고서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만, 저는 거듭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는 증거를 저는 우리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잘못해도 자식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하면, 부모는 다 용서합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절대로 나는 너를 용서 못 해.” 라고 해도 부모는 다 용서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달라는 자식에게 부모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다.’ 말합니다.
그렇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사랑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문제는 사랑하지 않으니까 용서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사랑으로만 해결됩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죄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생명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만 해결 받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진홍같이 붉고, 머리털보다도 더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은 수많은 죄들을 용서받으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하늘 땅,
바다보다도 더 깊고 넓어야, 진홍 같고 머리털보다도 더 많은 죄가 용서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하늘 땅 바다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이요, 말의 사랑이 아니라 생명과 삶으로 보이신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 - 처 - 럼 사랑하사" 하고 강조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사 -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게 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주 오래 전에, 일가족을 도끼로 죽인 살인범이었던 고재봉이라고 하는 분이,
예수님을 믿고 죽기 전에 감옥 안에서 2,000명을 전도하겠다는 소원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도 일가족을 도끼로 죽인 살인범처럼 했답니다. 사형수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죽기로 작정한 사람은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안 믿으면 죽어."
이런 식으로 전도했는데, 2,000명을 거의 전도하다가 몇 명 남겨놓고 사형집행이 됐습니다.
사형 전,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무얼 위해서 기도할까요?" 그럴 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2,000명을 전도하려고 작정을 했는데, 아직 몇 명이 더 남았습니다.
전도를 다 못 하고 죽게 됐는데, 나머지 사람은 목사님이 나 대신 전도해 주세요."
살인범이었지만, 예수님이 그를 사랑했기에 죄 용서함 받고 180도 달라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하나님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얼 배워서 되는 게 아니고, 무얼 수련해서, 무얼 행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 처 - 럼, 사랑 해주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저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하는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해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지신 사랑의 십자가를 붙들면 깨끗해진다는 확신을 100% 갖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지신 사랑의 십자가를 붙들면 구원 얻는 확신을 100% 갖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날 사랑하심을 믿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십자가로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율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뼈가 부러져 병원에 가면 엑스레이부터 찍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엑스레이와,
같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아, 이 부분에 죄가 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죄인인 줄 깨달았을 때,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예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잡으면, 모든 죄에서 사함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면, 우리 하나님의,
기억력이 갑자기 나빠지면서, 우리의 죄를 하나도 기억하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기억도 하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 은혜를 체험한 바울은 "나는 예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고,
고백했고 그 고백대로 “모든 것을 분토 같이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고백과 삶이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죄 지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설교의 내용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 이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함 받은 깨끗한 심령에 주님의 아름다운 일을 담는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목회자가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전 목회가 참 즐겁습니다.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는, 신생아 방문을 해서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를 제 품에 안고,
기도하는 순간인데, 새로운 인생을 만나는 감격이 얼마나 큰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하는 축복 기도는 ‘좋은 만남을 위한 기도’ 입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좋은 믿음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좋은 사람,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목사님을 비롯한 좋은 영적인 스승과 지도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비록 갓난아이지만, 사는 동안의 만남이 그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에도 축복된 좋은 만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만나는 축복도 중요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축복을 주는 좋은 사람으로 다가서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 만나기를 기도해야 하고, 내가 축복을 주는 좋은 사람 되기를 위해서,
‘하나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복 받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를 부모로 만난 내 자녀가 복 받는 좋은 부모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나를 자녀로 둔 내 부모가 복 받도록 좋은 자녀 되게 해주세요." 하고,
나와 자녀, 부님을 위해 기도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좋은 영적 지도자로 만나기 위해서 기도하고, 목회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 때문에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자녀 손들까지 복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여러분들은 저를 통해서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다른 성도들에게 축복을 주는 좋은 사람으로 만남이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는 참으로 멋진 기도이기에,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는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말씀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깨끗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없애야 합니다.
복음전도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앞장서서 말없이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남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의 만남 중에서 가장 축복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죄 용서함 받고, 영생을 얻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예수님과의 축복된 만남을 누리게 된,
우리가 또 다른 사람들과도 아름다운 축복된 만남을 주고 받는,
아름답고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