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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마르 3,22-30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구차스러운 현실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든 성령의 현존 속에 계셨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으며, 성령의 보살핌 아래 나자렛에서 30년 세월을 사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성령의 인도 아래 광야로 나가셔서 대피정을 하셨으며, 성령으로 충만해진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 앞에 펼쳐진 인류 구원사업을 위한 위대한 여정에는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향한 율법학자들의 발언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보십시오. 이보다 더 큰 신성 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혹독한 악담을 퍼붓습니다.
베엘제불은 마귀 중에서도 대 마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분, 가장 선하신 분 앞에 가장 사악하고 불경스러운 사람들이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엄청난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끼고 길길이 뛰고 발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이런 멋진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활기차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가장 첫째가는 비결은 성령의 현존과 동반에 대한 확고한 의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네 인생 여정에 항상 현존하시고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더 성숙해지고, 조금은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의 이 구차스러운 현실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을 매일 동반하시는데,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확실히 현존하시는데, 우리가 겪는 매일의 작고 소소한 사건 안에서 활동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거나, 믿지 않는다거나, 망각 속에 살아간다면, 꽤나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겨울 한 본당에 대림 특강을 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을 소상히 잘 파악하고 계시는 분들이 그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셔,
정말이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랍니다.
그래서 저를 보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낀답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숫기도 부족하고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배움도 부족했고 그럴만한 탈랜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 앞에 서서 발표를 한다거나, 공개 석상에 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이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로 완전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는데, 저도 요즘 저를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바뀌었지?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러면서 결국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한 인간 존재 안에 머무시면서, 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셔서 움직이게 하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틀렸어. 나는 늦었어. 지금 이 나이에 변화는 무슨 변화? 하는 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3,22-30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절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결국 성령의 선물을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도 원치 않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감기인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자분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입니다.
수액이라도 맞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서 놔달라고 했지만, 그분은 수액은 약을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나 맞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나 감기약은 그냥 내가 약국 가서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뒤에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끓었습니다.
열도 없고 몸살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미사를 할 때 목소리도 안 나고 콧물도 흐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 다시 병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사무원이 예약해주는 바람에 그 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매우 친절하게 다 해 주시고 미리 준비해놓으신 선물도 주셨습니다.
영양제와 방향제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이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난번에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 그분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삼위일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려준 처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약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병원에 갈 일도 처방전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들을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병을 고칠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약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없다면 처방전도, 의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의사를 만나게 되고 처방전도 받게 됩니다.
제가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죽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의로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서 기쁨과 평화를 원했습니다.
행복을 원한 것입니다.
성당을 다니며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읽으며 더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베푸시는 성령의 맛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러나 행복이 성령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겠습니까?
약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처방전을 주는 의사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사는 욕해도 약은 욕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는 산초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편지로 알돈자에게 전해줍니다.
알돈자는 사실 둘시네아, 곧 자기 나라의 공주란 내용입니다.
알돈자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초를 믿지 않더라도 그 편지 내용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편지를 보낸 돈키호테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편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온 산초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그 편지를 산초에게 보낸 돈키호테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하느님 아버지, 산초는 성자, 편지는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다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를 원합시다.
그러면 성령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령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시는 원천은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의미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전부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2-30: 성령을 거슬려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하느님의 은혜로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의 짓이라고 헐뜯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 하신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성령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진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은총에서 등을 돌릴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토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도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면 눈은 보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너무나 오래 거절한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게 되더라도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즉,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악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보다도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 3, 26)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길 위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창조는 일치와 협력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삶의 본질또한 일치와 협력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협력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갈라서면 언제나 참혹한 결과뿐이었음을 우리 역사는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망쳐버린 우리의 협력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나라와 가정과 개인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치의 근원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일치가 일치를 낳고 협력이 협력을 낳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모든 생명의 최상의 길이신 성령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이 망쳐버린 소중한 관계를
일치의 빛으로
치유하고 계십니다.
성령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4년 1월 22일 연중 제3주일 월요일
어느 정신과 전문의 고백을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문의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만나 상담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부 간 갈등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 마음의 병은 고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정말로 맞지 않는 관계일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면서 이혼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부부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부부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운전하고 자신은 보조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친구 아내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과속 방지턱을 지나갈 때 친구가 브레이크를 늦게 밟아서 차가 덜컹거린 것입니다. 뒷좌석의 친구 아내는 크지는 않지만 “아이쿠”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 친구가 아내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더랍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자신은 아내에게 “괜찮아?”라는 말 대신 평소에 “왜 놀라? 뭐 이런 걸 가지고 놀라? 이게 놀랄 일이야?”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로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판단적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감정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기감정만이 아닌 상대 감정을 존중하고 헤아리며 말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정작 감정을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감정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자주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즉, 제일 먼저 보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옳다는 기준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이렇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고, 자기감정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것을 이끌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정과 격려다(찰스 쉬압).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9)
'성령 모독죄!'
오늘 복음(마르3,22-30)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악담을 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22)
'베엘제불'은 '집의 주인', 혹은 '신들을 거느리는 이'란 뜻으로, '마귀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대피정 하실 때,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이신 예수님께 이런 악담을 퍼부을 수 있을까?
이런 악담을 퍼붓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8-29)
우리도 삶 속에서 종종 악담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느님의 사람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건설될 수 있도록 애쓰는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성직자들일 수 있고, 수도자들일 수 있고, 깨어있는 신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사람들은 누구의 이익과 불이익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나와 생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악담을 한 적은 없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 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마르 3, 2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