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호(Lake Baikal)와
기업가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바이칼 호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알론섬의 부르한 바위
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중남부에 있는 호수.
앙가라 지구대에 있으며
초승달 모양으로 남북으로 길다.
주위로부터 약 330개의 하천이 흘러들지만
흘러나가는 수로는 앙가라 강 뿐이다.
세계 7위의 담수호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세 번째로 크며,
수심이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깊다.
물이 맑은 것으로 유명하다.
몽골 어로 '신성한 바다'라는 뜻의
달라이노르(Dalai-nor)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전한(前漢)의 소무(蘇武)가
양을 방목하였다는
패가이(貝加爾) 호로,
이 호수를 백해(白海)로 기록하고 있다.
터키어로는 '풍요한 호수'라는 뜻의
바이쿨(Baikul)이며,
야쿠츠 어로는 '풍요한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의
바이쿨(Bai-kul)이다.
이는 이 호수에서
연어가 많이 잡히는 데서 연유한다.
바이칼 호는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이 지방의 기후를 온화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만,
12~5월 초까지 결빙한다.
이 호수에는 1,8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데
바이칼 바다표범, 해면도 있다.
시베리아의 관광 지대로
연안에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등이 있다.
바이칼 호
한민족의 원류적 본고장
바이칼호 위성사진
세계문화유산 비이칼 호
여름 바이칼 호
겨울 바이칼 호
오대호와 비교한 이미지
맨 왼쪽이 바이칼 호다.
바이칼 호(Ozero Baykal)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초대 회장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 보기나 했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한국인의 조상이
몽골 4촌들과 갈라졌다는 곳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앙가라 강으로 떨어진다.
호수의 출구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츠크츠 시가 조성되어 있다.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 박물관과
카잔 성모마리아 성당을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으며,
이르쿠츠크만의 특색 있는 문화와 건축,
예술과 역사를 즐기며
아름다운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목에서
또 다른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도시와
그 도시가 품은 세계 최고의 호수 바이칼 호를
함께 즐기는 여행.
러시아의 자연은 또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카잔 성모마리아 성당
Cathedral of the Kazan Icon
of the Mother of God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에게
입헌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을 주도했던 청년 장교
(데카브리스트,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데카브리' декабрь에서
기인한 것이다)들이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받고 와서
건설한 도시다.
그 부인들이 허허벌판의 유형지로
남편을 따라왔던 순애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대서사였다.
현대에 들어와 유명한 것은
호수 출구를 가로 막아 건설한
4㎞ 길이의 사력(砂礫)댐이다.
스탈린 시대 10년을 걸려
완공한 거대한 댐이다.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은
이 사력댐을 모델로 삼아
소양강 댐을 건설하였다.
본래 한일 국교정상화 후
일본의 경협자금으로 세운
큰 사업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서울 지하철 1호선이다.
여기에 소양강 댐을 추가할 수 있다.
소양강 댐 완성 전에는
장마철마다 한강이 범람하여
서울의 저지대가 물에 잠기는 게
연례행사였다.
소양호
그러한 만성적인 한강 홍수에
마침표를 찍는 토목공사였다.
1973년에 완공한 이 댐은
길이 530m,
높이 123m,
저수량이 29억 톤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다목적댐이다.
본래 소양강 댐은
일본 경협자금을 쓰기 때문에
일본의 도요엔지니어링에서
맡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소양댐 방류
그런데 현대건설의 전갑원 과장이
댐 건설 사례들을 조사하다가
바이칼 호의 사력댐을 공부하게 되었다.
사력댐이란 흙으로 짓는 것이다.
한가운데 찰흙을 메워 넣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그 양옆으로 돌, 모래와 흙을 쌓아서
댐을 완성하는 것이다.
※ 사력댐(砂礫, Rockfill Dam)
구조적 안정을 위해
댐 본체를 암석으로 사용한 댐
댐 본체의 주재료를
암석으로 하여
구조적으로 안정을 얻는 댐을 말한다.
댐에 이용되는 암석은
댐현장에서 구하여 사용되며,
종류는 상류면에 콘크리트,
철근콘크리트, 철판, 아스팔트 등으로
물을 가로막는 표면차수벽형과
제체 내부에 상질재료로 차수하는
내부차수벽형이 있으며,
이에는 경사 차수벽과
중앙 차수벽이 있다.
참조물용어APP(2011)
작성자: 부산대학교 추태호
경부고속도로를
1km당 1억 원의 저가로 완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정주영 회장은
전갑원 과장의 의견을 듣고,
바로 박 대통령에게
사력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박 대통령은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일본 도요엔지니어링 측과
현대건설 양자가 논쟁해보라고
자리를 마련하였다.
정주영
일본의 도요엔지니어링 회장은
엔지니어 중역들을 대동하여 참석하였고,
정주영 회장은 전 과장만 데리고 참석하였다.
먼저 일본 측 회장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정 회장의 학력이 어떤지를 물었다.
정 회장은 고향 통천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고 답하였다.
그랬더니 일본 회장은
여기 참석한 중역들은
모두 도쿄 제국대학 공학박사들로
수풍댐을 설계한 전문가도 있다고 말하고,
세계적인 추세는
수풍댐과 같이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튼튼하게 짓는 것이라며
소양감 댐도 그래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세계5위 진흙과 돌로 만들어진 사력댐
dnew.co.kr
이에 대해 정 회장을 수행한 전 과장이
바이칼 호 사력댐의 예를 들어
재원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국내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력댐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는
시멘트와 철근도 충분하지 않은 시기였다.
덧붙여서 소양강 댐은
휴전선에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북한군의 포격으로
콘크리트 댐이 붕괴하면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한강수계의 하류에 있는
서울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서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사력댐의 경우
포탄을 맞아도
댐 자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소양강 댐
회전문이 있는 청량사를 관광한 후
소양호 유람선을 타고
댐 우측 상부에서
둑길로 내려왔다.
포병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무릎을 치면서
사력댐으로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경위로 사력댐 건설을 위한
입찰 경쟁이 1967년
소양강 현장에서 시행되었다.
이명박 사장 일행이 입찰금액을 써내는데
매달려 있는 동안,
정주영 회장은 본사 비서실에 전화하였다.
“지금 당장 전 직원을 풀어서
서울시의 상습 침수지역에
버려진 땅들을 매입하라”고
지시하였다.
즉각 압구정동, 잠실, 풍납동 지역의
저지대 땅들을 사들였다.
지금도 그 지역에 아산병원을 비롯하여
현대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연유다.
88올림픽을 대비하여
한강 변의 잡초 무성한 둔치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강변 고속도로를 만든 것도
정주영의 아이디어였다.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한국은 경제난국을 벗어나야 했다.
정주영은 오일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중동진출에 앞장섰다. 1976년 2월에는 사우디 주베일 신항만 건설공사를 9억3천만 달러로 낙찰하였다. 20세기 최대의 건설공사로 불렸던 이 사업은 그해 우리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정주영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안 된다고 하는 직원들에게 “이봐 해봤어?”야 말로 도전정신의 압축표현이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비상하였다. 현대 조선소 건설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경제수석의 분석 보고로 중공업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조선산업 추진 필요성을 확인한 다음, 정주영 회장을 불러서 조선업을 시작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수십만 톤의 대규모 유조선을 짓는 것은 마치 맨땅에 박치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무엇이라도 도전하는 천하의 정주영도 경험이나 자금조달이 막연하여 난색을 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일을 맡지 않으면 감옥 갈 각오하라고 윽박질렀다. 정 회장이 출구를 못 찾을 정도로 혼비백산하여 청와대를 나와서 다음날 바로 런던으로 출국하였다.
‘A&P 애플도어’라는 금융회사의 롱바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벌써 4백 년 전에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라고 설득하여 자금 보증을 받아냈다.
그리스 선박 왕 이바노스와 극적으로 판매계약을 체결하여 드라이독(Dry Dock) 건설과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의 건조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 팔아먹는 것과도 흡사한 사업이었다. 1974년 6월 애틀란틱 배런호 진수
드디어 드라이독을 완성해서 물을 채우는 동시에 최초의 유조선이 바다로 진수하였다. 한국에서 만든 유조선이 바다에 뜨겠느냐고 견제하던 일본 쪽의 소리도 쏙 들어갔다. 기업인 정주영은 주도면밀하였다.
수만 명의 용접공을 단시간에 육성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심지어 1971년 시작한 반포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도 많은 용접공을 길러냈다. 이 아파트 난방시스템은 옛날의 스팀 식이 아니고 온수 식이었다. 방열 라디에이터에 온수를 순환시켜서 난방하는 것이다.
틈이 있으면 물이 새기 때문에 완벽한 용접이 중요했다. 용접공 교육장이 되었다. 현대뿐만 아니라, 대우, 삼성 중공업의 용접공은 이제 기술과 경험이 쌓여 특A급의 완벽한 기능인도 수천 명을 넘는다. 한국인의 손재주가 만개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이 1995년 건설한 방사광 가속기의 700미터 길이의 두꺼운 강철관의 용접도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급격한 기압변화에도 강철관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난도 용접 기술이 필요했다. 먼저 시작했던 인도보다도 한국이 앞서 완공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전 세계 6대 강국으로 진입하는데 초기 경제인들의 이러한 기업가정신 (entrepreneurship)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물론 전 국민의 피와 땀이 합쳐진 종합적 결과이지만,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등의 기업가정신이야 말로 정말로 값진 것이다.
그들의 기업가정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능가하지도 못 했고, 동남아국가들 조차도 앞지르지 못 했을 것이다. 동남아의 화상(華商)들이 회임기간(懷妊期間, 기업이 설비 투자를 했을 때, 주문한 설비가 생산되어 인도될 때까지의 기간)이 긴 장치산업에 투자를 기피하고
주로 서비스 산업에서 부를 축적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의 기업가들이 목숨을 걸듯이 도전하여 성공함으로써 엄청나게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 덕분에 그 혜택을 5천만 한국인이 지금 나누고 있다. 한국인의 소비수준을 받쳐주는 주요 원천이 기업들이 만들어낸 높은 부가가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정치지도자의 안목과 지도력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정신,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라는 주인의식이 국민을 통합하여 이끌었다. 그러한 지도력 없이는 국민이 깨어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전후 독립한 140여 개 다른 신생국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념 갈등으로 사회분열이 격화되고 젊은이의 도전정신이 위축되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이 시기에 비전과 용기를 가진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이민우 저 “정주영이 누구야” 참조 글쓴이: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옮겨온 글 편집 청산 노승렬 |
첫댓글 좋은글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