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序詩/라이너마리아 릴케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 되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 바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 대로 지쳐, 닮고 닮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구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침묵 속에서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
20세기 최고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며 독일 현대시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말테의 수기』 『두이노이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 뛰어난 많은 작품』
<시 읽기 1> 서시序詩/라이너마리아 릴케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방향이다.
시인은 단호히 저녁은 세계 하나를 만들 시간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당신이 누구라도 저녁이 되면 익숙한 것들로 꽉 찬 방에서 나와 당신의 집을 먼 곳의 마지막 집처럼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에 대한 바라보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다가 한 구루 ‘나무’를 심으라고 속삭인다. 소유하지 않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기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방향으로 삼을 때, 그 세계는 크게 울린다.
―박형준 엮음, 『당신에게 그 어떤 위로보다』, 사흘,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