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월 20일 주일 [(녹) 연중 제2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의 수난을 겪게 하시어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이 주일 잔치에서 거룩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주님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맺는 영원한 혼인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두고, 민족들이 그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그의 영광을 보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표징을 일으키신다(복음).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2,1-5 1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2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3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4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4-11 형제 여러분,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들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 영광이라 생각하지만, 참된 영광은 이미 주님에게서 받아 자신 안에 간직한 영광이 피 흘림을 통하여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는 ‘영광’이란 곧 ‘성령’을 말하는데, 성령을 받으면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자신의 뜻을 죽여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하는 모든 순종의 행위가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 흘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포도주가 피가 되는 주님께 참영광을 드릴 십자가 수난의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는데, 이로써 교회는 새로 태어나고 순결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오늘 복음의 포도주가 순결해지기 위한 “정결례” 용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동이가 여섯 개인 이유는, 창조 여섯째 날,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듯, 오늘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낳고 새 이름으로 부르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과 그 백성과의 혼인 관계를 이야기하며, 교회가 메시아의 “영광”을 보게 되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고 예언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신랑의 피 흘림,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을 통하여 탄생되고 순결하게 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상징하는 구원의 신비를 종합한 표징입니다.(전삼용 요셉 신부) |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확실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수도회 입회 전 청년 시절, 갑작스레 신앙의 불꽃이 확 타올라, 뭐든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3박 4일 일정의 성령묵상회에 참석했습니다. 강도 높은 과정을 이수하고 난 뒤, 참석자들이 둘러앉아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서로 나누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평소 엄청 과묵하셔서, 웬만하면 입 한번 안 여시던 할아버님께서 엄청 달라지신 것입니다. 얼굴도 환해지시고, 활기차게 말씀도 하시고, 기도도 일사천리로 술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혹시 할아버님께서 아침에 나오실 때, 실수로 할머님 틀니(^^)를 끼고 나오신 것은 아닐가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할아버님은 제대로 성령의 은사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말씀의 은사를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혹은 지식의 말씀이, 믿음이, 병을 고치는 은사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코린토 1서 12장 7~10절) 오늘 우리 각자는 과연 어떤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았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뭔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봉사할 특별한 은총, 재능, 장점, 강점을 선물로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아직 덜 뜨여서, 우리가 너무 둔감해서, 우리의 안테나가 너무 세상 쪽으로 치우쳐서, 그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지 못할 따름입니다. 중요한 것 한가지!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확실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걷고 있는 인생길에 늘 동반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현존하시지만, 깊은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현존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어디에 현존하시는 것입니까? 그 어디나! 때로 지금 내 손에 들린 영성 서적의 한 문장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들이 매일 아웅다웅하는 일터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 속에 현존하십니다. 인사이동철을 맞아 또 다시 한줄기 바람처럼, 그간 정들었던 소임지를 뒤로하고 홀연히 떠나가는 사목자, 수도자들의 눈부신 뒷모습에서 성령의 현존을 느낍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에 낯설고 두려운 길, 그러나 평생토록 갈구하고 기다려왔던 길이기에, 기쁨 가득찬 얼굴로 떠나가는 임종자들의 얼굴에서 성령의 현존을 느낍니다. 겸손하고 영성적이며, 품격있는 사목자, 수도자, 어른들의 깊은 배려로 양떼들이 주인이요 주체가 되고, 구성원들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난 본당 공동체, 수도 공동체, 가정 공동체의 모습에서 성령의 강한 손길을 느낍니다. 성령께서 자꾸만 외곽으로 밀려나고 우리들이 중심에 자리잡을 때, 우리 교회는 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우리들이 주인공이 될 때, 공동체는 그저 숙식만 함께 해결하는 기숙사나 여인숙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원리>
가족모임을 하면서 우리 형제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자신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가족이 전부가 되어갑니다. 이것에 비해 자라나는 조카들은 가족을 떠나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형은 만날 때마다 “나는 캠핑카 사서 여행이나 다니며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제주도에 집 사서 놀고먹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모임에서 형은 뒤에 한 마디를 덧 붙였습니다. 저는 참 기분이 좋았고 지금보다는 일이 잘 될 것임을 느꼈습니다.
“나는 캠핑카 사서 여행 다니며 살고 싶어. 엄마와...”
저희는 아직도 어머니를 엄마라 부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우리의 꿈이 그저 놀고 편히 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꿈은 하늘이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돈을 벌어 이러저러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라는 꿈을 가져야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내어주려는 사람에게 더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돈을 벌려고 하면 우울증과 화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물론 하는 일도 안 됩니다. 돈도 자신을 잘 사용해 줄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지도자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어린 아들 둘에게 “너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게.”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남을 도와주다가 학교도 안 가고, 남의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자신은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아들은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고 다른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내어주려는 사람에게 더 주시고, 가르치려는 사람에게 더 알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통로를 넓히는 일이어야 합니다. 통로가 막혀 물이 고여 썩어버리면 그 통로로 물을 다시 흘려보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막혀서 꼭 필요한 곳에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통로는 버려지고 맙니다.
저도 묵상을 매일 쓰지만 이 묵상을 쓰는 것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이 더 많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그리고 제 묵상을 받아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50명, 100명씩 보내신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만 읽고 마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보내주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아내가 자신만 돈을 쓰고 자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더 이상 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자신은 아끼고 자녀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때 남편은 일하는 것이 힘이 납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두고 멈추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못 받고 남에게도 내어줄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받은 것을 다 내어주려고 하는 마음을 영성적으로는 ‘가난(청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총이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가난의 모델이 나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술을 주실 수 있는 당신 아드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당신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청하는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렇더라도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하고 당신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연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인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이제 성모 마리아께서 받으셔야 하는 아내의 입장이고 예수님께서 주셔야 하는 남편의 입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자녀를 위해 남편에게 돈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은 남편의 피땀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위해 청하는 것이기에 당당하게 이렇게 응대하실 수 있으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러자 순종하는 하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순종하는 하인들은 교회의 성직자들입니다. 교회는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는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살과 피의 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입게 되어 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상징하는 카나의 혼인잔치는 가난한 한 여인 때문에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만큼만 있으면 살 수 있느냐?’가 가난의 척도입니다. 집도 있어야하고, 옷도 있어야하고, TV도 있어야하고, 여가생활도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것이 없어도, 길거리에 살아도, 굶어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가난해지면 돈도 부족해지지 않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거부들은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주커버그, 심지어 영화배우인 주윤발 씨 등은 가진 재산 거의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3만 원짜리 시계를 차고 값싼 옷을 입으며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고 비싼 차를 몰며 거들먹거립니다. 그들에겐 돈이 전부입니다.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는 7조원 정도의 재산이 있으나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루 1달러로 30일 동안 사는 연습을 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돈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이들이 투자하는 돈은 힘이 있습니다. 남의 돈을 빌려서 투자하는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큽니다. 갚아야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돈은 힘이 없습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게임에서 돈을 딸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게임에서건 두려움 없는 사람이 승리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의 돈을 빌려서 투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절대 보증을 서 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남을 도와주려다가 자신도 성공한 대표적인 성인입니다. 기차역에서 “목마르다.”는 행려자의 한 마디에 부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직을 때려치우고 가난한 이에게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줄 줄 아는 사람에게 돈이 몰리게 돼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를 통해 흘러간 돈의 액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의 정신을 따르는 수도회가 여전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어떻게 은총을 불러들일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얻으려면 반드시 내어주는 것을 좋아해야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다 잃고 아무 것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가 하루의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 되게 하고, 단식으로 굶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몸을 길들여야 하며, 매달 일정액을 좋은 일을 위해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
오늘의 성인
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로마의 평신도이던 성 파비아노는 236년 1월 10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선거를 실시하는 동안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신자들은 그 모습이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던 모습(마태 3,16)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교황 선출에 관한 하느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라 여겨 그 자리에서 안수를 통해 성 파비아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이단 문제로 인하여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역의 고대 지명)의 람베시스의 주교인 프리바투스(Privatus)를 단죄하였고, 로마의 칼리스투스 카타콤바 내에 주교들을 위한 묘역을 건설하였다.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성 파비아노 교황도 이때 순교하였다. 교황의 시신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 대성전으로 옮겨졌으며, 1915년에 그의 이름이 적힌 무덤이 발견되었다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288년경
같은이름 :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 태생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283년경에 로마에서 군인이 되었고,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6월 18일)와 성 마르쿠스(Marcus, 6월 18일) 부제를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했던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인 성 니코스트라투스(Nicostratus, 7월 7일)가 있었고, 그의 아내 성녀 조아(Zoa, 7월 5일)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성녀 조아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간수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7월 7일),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티우스(Chromatius)와 그의 아들 티부르티우스(Tiburtius) 등이 있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줄 몰랐다고 한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카스툴루스(Castulus, 3월 26일)의 미망인인 성녀 이레네(Irene)가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켰다. 그 후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는 화가 나서 그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도록 한 다음 로마의 하수구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에 던져 버렸다. 그의 죽음과 용기는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한편 순교한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로마에 사는 루치나(Lucina)라는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하수구에서 자신의 시신을 찾아서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이 있는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루치나 부인에 의해 아피아(Appia) 가도에 있는 지하묘지에 묻혔다. 그는 군인, 운동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가 전염병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680년 로마에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로마인들이 페스트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자 그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한다. 또 1575년에 밀라노(Milano), 1599년에는 리스본(Lisbon)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보호를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점차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전염병 희생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