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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묵상글 (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 등잔의 기름. 등 )
*** 5:34,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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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등잔의 기름 <2023.09.01 05:29>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은 어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에 이어
오늘 열 처녀의 비유를 왜 또 드는 것일까?
두 비유 모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종말에
주님의 오심을 깨어있다가 맞이해야 한다는 가르침 면에서는 같은데,
그래서 다른 복음에는 이 비유가 없는데 왜 굳이 이 비유를 또 드는가?
불필요한 중복이 아닌가? 아니라면 무엇을 더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차이점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이 종과 처녀라는 점이고,
오실 주님이 주인과 신랑이라는 점인데 이 차이점을 굳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차이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라면
기다리는 우리는 주인의 종이나 일꾼이 아니라
신랑의 연인이라는 관점에서 오늘 비유를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나 일꾼이 주인과의 수직관계라면
연인은 위아래가 없이 동등한 수평관계라는 점도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다리는 대상이 신랑인 것은 분명한데
열 처녀가 신랑의 신부인지 아니면 혼이 잔치의 들러리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 처녀가 신랑의 연인 또는 신붓감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아직 신부가 아닌 신붓감이고 신랑을 사모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언제 신랑이 오든 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다 맞이하면
신랑의 신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부가 되지 못함은 물론
아예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출발점은 똑같고 공평합니다.
다 처녀이고 신랑을 사랑한다는 면에서 똑같고,
신랑은 열 처녀에게 신부가 될 수 있는 똑같은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인 신방에는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랑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처녀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제 생각에 등잔의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이고 갈망이고 열망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사랑하고 신부가 되고 싶은 처녀들이지만
그 사랑과 신부가 되고 싶은 갈망과 열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기름은 한 번에 왕창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채우는 것이고 조금씩 끊임없이 채우는 것입니다.
성가를 부를 때는 성가를 사랑과 열망과 갈망을 가지고 부르고,
기도할 때도 분심잡념 가운데 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어 바치고,
일할 때도 종이나 일꾼처럼 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에게 줄 목도리를 뜨고 손수건에 수를 놓는 연인처럼 사랑으로 함으로써
사랑을 자신 안에 조금씩 계속 채워가는 것이고 마침내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불이 뜨겁게 타오른 적이 한 번도 없는 미적지근한 사랑도 안 되겠지만
한때 불같이 사랑하고 이내 사그러드는 그런 사랑도 안 됩니다.
아무튼, 매일, 매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등잔에 기름을 채우는 것이며
사랑이라는 기름은 일생에 걸쳐 마련해야 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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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6)
앞 장(24장)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닥쳐올 큰 재난’(마태 24,15-26)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 24,29-31)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36-4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어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마태 45-51)를 통해, ‘충실함’과 ‘슬기로움’에 있음을 밝혀주셨고, 오늘 우리가 들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를 통해서 다시 ‘슬기로움’을, 그리고 내일은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를 통해서 ‘충실함’을 ‘깨어 준비하는’ 모습으로 거듭 밝혀주십니다.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처녀들은 어쩌면 밤에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등불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기름도 그릇에 따로 더 충실히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은 처녀들은 열 명인데 신랑은 단수(여섯 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혹 일부다처제일까요? 이는 신랑으로 표상되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 안에 뒤섞여 있는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에 대한 심판, 마치 ‘가라지의 비유’(마태 13,36-43)와 상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발의 등불”(시 119,105)이신 말씀이 저에게는 ‘등’이요, 말씀을 밝혀주는 성령이 ‘기름’이요, 성령의 기름으로 도유된 내 자신이 ‘기름 그릇’이라 알아들어 봅니다.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성령으로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롭고 충실한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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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기를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 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신부의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 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요 은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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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면서 때로 ‘황당’한 일을 경험하곤 합니다. 나의 뜻과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온 신부님들이 며칠 간 머무르겠다고 했습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트렁크에 짐을 옮기면서 황당한 일이 생겼습니다. 차는 약간 경사진 곳에 있었고, 짐을 옮기는 과정에 그만 카트가 경사면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워낙 운동 신경이 둔한 저는 미처 몰랐고, 카트는 내려가면서 하필이면 주차된 차에 부딪치면서 멈추었습니다. 차의 주인은 저보다 더 황당했을 것입니다. 급히 내려가서 차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원만하게 해결하면 될 수 있었는데 차 주인은 경찰을 불렀습니다. 경찰은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차량에 의한 사고가 아니기에 저의 운전 면허증이나, 보험은 상관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차량 주인에게 보험으로 차를 수리하고, 나중에 법원에 가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갔고, 저는 차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약간의 수리비용을 주면서 문제는 해결 되었습니다. 고정 장치가 있는 카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저보다 더 황당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기다렸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채웠던 슬기로운 처녀들을 기쁘게 신랑을 맞이했고, 혼인잔치에 참여했습니다. 등잔에 기름이 없었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고,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냥 기다린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등잔은 우리의 몸과 마음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우리의 ‘행동’입니다. 가난한 이, 불쌍한 이, 외로운 이를 따듯하게 돌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해 준 선행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나라에서는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해야 할 것을 알았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알았지만 하였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였고,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기름이 필요합니다. ‘선행, 회개, 겸손, 지혜’의 기름을 채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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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오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열 처녀의 예로 들려주십니다.
신랑은 한밤중에 왔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신랑이 왔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리라는 것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 이곳 갑곶 성지 봉안당 일을 보다 보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온다는 것을 매일 느낍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신랑이 오는데, 왜 기름이 중요할까요? 신랑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등만으로도 온 방을 밝힐 수 있을 것인데 왜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어달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왜 기름을 사러 갔을까요?
오늘 복음은 이런 뜻일 것입니다. 신랑이 오면 우리는 신랑 앞에 얼굴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이는 것은 각자가 해야 합니다.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신랑을 만날 때는 혼자 만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앞에 갔을 때도 우리는 홀로 가야 합니다.
기름은 우리들의 선함입니다. 우리의 얼굴을 밝게 비춰줄 선함입니다. 이 선함은 우리가 지금 준비해야 할 기름입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을 때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올 것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은 아니겠지. 내일을 아니겠지.’하며 생각하겠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날 우리는 선함의 기름을 등을 밝혀 우리의 얼굴을 주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말짱
얼마 전 직원분들과 외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당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렇게 시끄러운 가운데
유독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제 귀에
쩌렁쩌렁 들렸습니다.
나는 조금 있다가 미용실에 갈 거야
그리고 3시쯤 고추밭에 가서 말짱을 박아야 해
5시쯤 고추에 약을 줘야 하고….
말짱이란 단어를 몰라서 함께 식사하던 직원분들께 물었습니다.
말짱이 뭐지?
말짱이란 고추가 비나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세우는 지지대였습니다.
부디 그 할머니께서 무리하지 않고 말짱을 잘 세우셨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의 말짱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말짱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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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나에게 최고로 기분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열심히 응원하는 팀이 있어서 이 팀이 이기길 간절하게 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반대 팀을 응원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기분은 최악일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응원하는 팀의 승리가 모두에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분 나빠진 상대 팀 응원자와 말다툼할 수도 있고,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저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은 이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나만 바라보니 이웃을 볼 수도 없고 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니 자기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을 늘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있는데, 이 중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하지요. 어리석은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왔습니다. 문제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슬기로운 처녀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누구는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나눠줬으면 모두에게 좋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신부 측 들러리가 가지고 있는 등의 기름은 약 15분 정도만 태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나눠줬다가 이 결혼식 자체가 엉망이 될 수 있으므로 상인에게 가서 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기름을 나눠줬다가 모두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어리석은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가 나눠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혼식에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기억하고 가장 좋은 것을 실천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만족만을 위한 삶이 아닌, 모두를 위한 삶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깨어 준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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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너와 나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만날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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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날마다 깨어 준비하며 제책임을 다하는 삶-
9월 첫날 웬지 느낌이 좋습니다. 국내외 상황은 특히 국내 상황은 참 어둡고 실망스런 나날의 연장이지만 그래도 웬지 하느님은 잘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듭니다. 9월1일은 9월 순교자 성월 첫날이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10월4일까지 창조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창조시기에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를 자주 불러보고 싶습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후 재앙의 결과들이 이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 아니라 사랑의 삼중 계명을, 즉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 자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와 있는 듯 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기후 재난으로 병이 깊어지면 사람 역시 온전할 수 없습니다.
어제 8월31일부터 9월4일 까지 몽골을 향해 제43차 해외 사목 방문 여정에 오른 평화의 사도, 희망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번 사목방문의 모토인 “함께 희망하기(Hoping Together)”란 멋진 말마디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궁극의 희망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함께 희망의 여정을 살아갈 때 저절로 일치에 깨어 있는 삶일 것입니다. 교황의 몽골 방문을 앞둔 국무장관 파로린 추기경의 “교황은 온세계를 위해 희망의 순례자로서 몽골을 방문하는 것이다” 인터뷰 기사도 좋았습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에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 성월, 그대로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임을 실감합니다. 날로 익어가면서 마음 푸근하게, 넉넉하게 하는 가을의 열매 향기가 봄의 꽃향기보다 더 좋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압축할 때 인생사계중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요? 인생 가을이라면 사랑의 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참 많이 강론시 강조했던 삶의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사도 바오로를 통해 당대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불륜등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자들은 참으로 귀기울여 들어야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아내를 색욕의 대상으로 대하지 말고 인격으로 우애의 대상으로 대하라는 말씀인데 여성을 대하는 믿는 형제들의 마음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건전한 성도덕에 깨끗한 성생활을 할 때 거룩한 삶입니다. 이어지는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성령의 인도 따라 깨끗한 성생활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독신의 수도자건 결혼한 평신도이건 성령의 인도하에 거룩한 삶은 모두의 본질적 성소입니다. 모두가 성화의 여정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인지요? 어떻게 성공적 성화 여정의 삶이겠는지요?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한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오매불망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며 살 때 저절로 성욕도 자제될 것이요 정결도 잘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책임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깨어 준비하면 사는 거룩한 삶,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얼마전 나눈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바로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런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다섯 슬기로운 처녀들입니다. 평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하루하루 깨어 준비하며 살다가 갑작스럽게 도래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입니다. 준비가 부족했던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을 닫혔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 큰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삶의 기름은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루하루 주님의 뜻에 따라 선행의 삶을 통해 축적해 놨어야 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이미 닫힌 문은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청천벽력의 말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자기뜻대로 살았던 짝사랑의 어리석은 처녀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이, 친교가 참으로 빈약했던, 주님과 무관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에 속하는 지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 죽음이 올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 그 시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답은 단하나 우보천리(牛步千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제 책임을 다하며 성화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언젠가의 죽음도 반가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내 고유의 향기롭고 매력적인, 아름다운 명품(名品)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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