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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낙타사파리
이영식
낙타의 몸속에는 지도가 숨어있다
어미젖 떼고 마신 첫물 냄새로 시작하여
사막 곳곳 샘터의 기억을 새겨 넣는다
肉峰
깊숙이 내장된 물의 지도,
낙타의 全生 출렁이며 발굽을 끌고
모래바다 위 좌표를 찍는다
낙타는 발자국을 지우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없는 타클라마칸 황사협곡
목숨처럼 찾아 마신 물의 유전자가
골수에 스며들 때쯤
쌍봉낙타 고개 들어 입 거품을 뿜어 날린다
사막의 정령은 그제야 생각난 듯 바람 놓아
발자국을 쓸어 덮는다
낙타는 알라에게 목을 꺾지 않는다
무릎 높고 보폭 좁은 걸음 도도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 세워놓은 아흔아홉 神宮 너머
카멜의 누각, 그 높은
정신을 향해 긴 눈썹이 열린다
깃털 같은 마지막 짐 하나에 넘어지면서도
그들의 별자리에 神聖을 모셔놓았다
낙타사파리를 떠나자
일상의 갈고리에 걸려 비루먹던 나날들
뚝, 떼어 던지고 사막으로 가자
낙타가 길 없는 길을 어떻게 제 몸피 속에 그려 넣는지
그리움 깊으면 십리 밖 물 냄새도 맡을 수 있는지
오래전 우리 꿈에서 빠져나간 몽고반점 같은
물의 지도를 따라가 보자
한입 베어 물고 싶은 날고기 같은 하늘 아래
사막의 시간은 산 채로 씹힐 것이다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만날 것이다.
----이영식, [낙타사파리]({현대시학}, 2007년 11월호) 전문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들은 대중으로서만 떳떳하며, 사적인 개인으로서는 거짓말을 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고 다닌다. 그들은 언제나 익명인이며, 그 익명인이라는 달팽이 껍질 속에다가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닌다. 대중들은 불쾌하고 위험한 일을 싫어하며,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들에게 책임전가하기를 더 좋아한다. 돈 많은 부자도 나쁜 사람이며, 명예와 명성이 하늘을 찌를듯이 드높은 유명 인사도 나쁜 사람이고, 모든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자도 나쁜 사람이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은 만물의 척도이며, 그 민주주의 이상을 통하여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그 모든 사람들을 단죄하게 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자유는 타인들의 자유를 짓밟게 되고, 만인평등은 최소한도의 위계질서마저도 무너뜨리며, 집단과 집단, 가정과 가정, 직장과 직장, 민족과 민족, 특정 종파와 종파 사이에서의 사랑은 그 반대 집단에게는 ‘밤의 척도’가 되기 쉬우며, 그 무엇보다도 증오와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현대사회의 대중들은 그 이념의 노예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들은 부자와 유명 인사와 지배계급의 인사들 앞에서는 만인평등을 요구하지만, 자기 자신의 호주머니 돈을 털어서 타인들을 돕는 일을 지독하게도 싫어하고, 그가 소속된 국가와 직장과 가정, 즉, 그 사회적 명령 앞에서는 언제나 한 사람의 자유인임을 강조하게 된다. 때때로 대중들은 그들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떼거지적인 사고법으로 불법 시위와 파업을 일삼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생활은 완벽한 범죄와 완벽한 허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기초생활질서를 하나도 지키지 않으며, 분식회계와 탈세를 일삼으며,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사행심과 통음난무를 즐기게 된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가짜의 이념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란 너무나도 무서운 말인데, 왜냐하면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임은 도덕적 명령이며, 그 도덕적 명령에는 사회적인 강제의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만인평등이란 말도 너무나도 무서운 말인데, 왜냐하면 만등평등 속에는 최소한도의 위계질서마저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짓는 동물들, 즉, 사회적 동물들의 국가는 이 모든 것이 위계서열적이며, 이 위계서열을 전면적으로 부정을 하게 되면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그 조직의 힘(기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이란 말도 너무나도 무서운 말인데,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만인평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차별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가 없고, 그 사랑에 의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가 싹이 트고, 그 혐오에 의해서 크고 작은 다툼과 그토록 잔인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 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이념은 완벽한 환상이며, 가짜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것은 병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이념들을 넘어서는 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난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대중들은 그 이념의 노예들이며,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역설하면서도 타인들의 자유를 짓밟고, 만인평등을 주창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의 특별한 권리와 특별한 특전을 요구하고, 또한, 전인류애적인 사랑을 역설하면서도 그가 소속된 가정과 학교와 정당과 민족만의 배타적인 사랑을 강조하게 된다. 그들은 흐느끼면서도 서로를 속이고, 사랑을 하면서도 서로를 속인다. 섹스를 하면서도 서로를 속이고, 낚시를 하면서도 서로를 속인다. 시민운동을 하면서도, 동업을 하면서도, 함께,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속이고, 동일한 정당에서도,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서로를 속인다. 이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기만적인 관계는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국회에서도, 청와대에서도, 군대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익명인에 불과하며,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다닌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본질)이 없는 익명인(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범죄와 완벽한 허위가 자라나는 이 세상은 불모지대의 사막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은 언제나 만족이 없는 삶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에서의 삶은 정답이 없는 삶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끊임없는 갈증 때문에 그처럼 오아시스(지상낙원)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영식 시인은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공갈빵이 먹고 싶다}와 {희망 온도}라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대쪽같은 장인 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쾌속 진군 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낙타사파리]는 그의 장인 정신의 걸작품이며, 그 장인 정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 즉, 지상낙원의 삶을 연출해내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역설적인 어법에 따른다면 문명인의 삶은 사막 속의 삶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인의 삶은 오아시스(지상낙원)의 삶이 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문명인의 삶은 완벽한 범죄와 완벽한 허위의 삶이기 때문이고, 자연인의 삶은 자연 그대로의 삶이기 때문이다. 문명인의 삶이 사막 속의 삶이고, 사막 속의 삶이 자연인의 삶이다. 사막이란 무엇이고, 오아시스란 무엇인가? 사막이란 다양한 동식물들이 살아가기가 매우 힘든 지역이고, 모든 육지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사막으로는 한랭사막과 중위도 사막, 그리고 열대사막이 있다. 한랭사막은 그 추위 때문에 식물들이 자라나지 못하는 지역으로 연평균 강우량이 125mm 이하인 지역을 말하고, 중위도 사막과 열대사막은 연평균 강우량이 250mm의 등우량선等雨量線과 일치하는 지역을 말한다. 사막의 종류로는 암석사막과 모래사막과 자갈사막이 있지만, 사막이란 기껏해야 아주 적은 풀과 작은 관목들이 드문 드문 자라나는 불모지대를 가리키게 된다. 오아시스란 사막과도 같은 건조한 지역에서 아주 드물게 물 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우리 인간들과 동식물들의 삶이 가능한 지역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에서의 오아시스는 샘 오아시스, 하천 오아시스, 신록 오아시스, 인공 오아시스, 그리고 한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온난 오아시스 등을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오아시스는 샘 오아시스를 가리키며, 이 샘 오아시스는 지하수가 솟아나와 웅덩이에 괸 것으로 그 규모가 매우 다양하다고 한다. 아무튼 오아시스는 지표면 아래의 풍부한 지하수가 분출되는 곳을 말하고, 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베두인족과도 같은 유목민이 정착을 하게 되고, 이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수많은 정치적,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오아시스는 사막 속의 지상낙원이며, 이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사막 속의 삶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영식 시인의 [낙타사파리]는 문명인의 탈을 벗어던지고, 이 자연인의 삶을 찾아 떠나가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사파리란 무엇인가? 사파리란 주로아프리카 동부에서 성행했던 수렵여행이었지만,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연의 공원에서 차를 타고 다니며 다양한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영식 시인의 [낙타사파리]는 그 구경꾼의 입장에서 낙타를 타고 다니며 낙타를 구경하거나 사막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낙타와 한몸이 된 인간을 그의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제시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 ‘낙타 인간’은 문명인의 탈을 벗어던진 인간이며,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미래의 인간은 ‘낙타 인간’이며, 그는 언제, 어디서나 오아시스를 찾아낼 수 있는 몸속의 지도를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미젖 떼고 마신 첫물 냄새로 시작하여/ 사막 곳곳 샘터의 기억을 새겨” 넣고 있기 때문이다. 낙타는 천부적인 사막 속의 동물인데, 왜냐하면 그 “肉峰” 속에는 “깊숙이 내장된 물의 지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타는 낙타과 낙타속의 동물이며, 몸길이는 약 3m, 어깨높이는 1,8m에서 2m가 된다고 한다. 낙타는 단봉낙타와 쌍봉낙타의 두 종류가 있으며, 그 등의 봉우리에는 물이 아닌 지방이 저장되어 있고, 여러 개로 나누어진 위장의 벽 속에는 몇 주일 동안이나 견딜 수 있는 물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낙타는 사막지대의 기후와 환경에 매우 잘 적응되어 있는 동물이며, 이 훌륭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그 사막의 열기와 갈증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고 320km나 되는 사막을 거뜬히 횡단할 수가 있다고 한다. 낙타의 발바닥은 접지면적이 넓기 때문에 모래땅을 걸어 다니기에 알맞고, 언제, 어느 때나 콧구멍을 막을 수가 있고, 귀 주위의 긴 털들이 모래 먼지를 막아준다. 또한 등의 혹은 때때로 비상시에는 영양분을 공급해주고, 수많은 위장의 벽 속의 물은 그의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 낙타는 사막 속의 주인공이며, 그의 후각은 수 킬로미터의 샘물도 정확하게 찾아낸다. 언제, 어디서나 물과 영양공급이 가능하고, 또한, 언제, 어디서나 오아시스를 찾아낼 수 있는 낙타에게는 불모지대의 사막이 바로 지상낙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막은 더 이상 불모지대가 아니며,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 언제, 어느 때나 가능해지고 있는 곳이다.
낙타는 발자국을 지우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없는 타클라마칸 황사협곡
목숨처럼 찾아 마신 물의 유전자가
골수에 스며들 때쯤
쌍봉낙타 고개 들어 입 거품을 뿜어 날린다
사막의 정령은 그제야 생각난 듯 바람 놓아
발자국을 쓸어 덮는다
이영식 시인의 낙타는 “풀 한 포기 없는 타클라마칸 황사협곡”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처럼 찾아 마신 물의 유전자가/ 골수에 스며”들어도 전혀 걱정을 하지도 않는다. “사막의 정령”이 그의 발자국을 쓸어 덮어도 전혀 두렵지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그의 몸속의 지도를 통하여 “길 없는 길”을 마치, 사통팔달의 대로처럼 도도하게 걸어가게 된다. 낙타는 알라신에게도 또한 목을 꺾지 않는다. 알라신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이며, 세계의 창조주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 알라신을 발밑으로 내려다 보며, “무릎 높고 보폭 좁은 걸음”을 도도하기 짝이 없게 옮겨 놓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 불모지대의 사막 속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낙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이며, 그의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은 천하무적의 유일신의 그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는 만인들 위에 군림하는 알라신이 그의 종이 되고, “인간이 세워놓은 아흔아홉 神宮”은 그 “카멜의 누각” 속에서 그 위풍당당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알라신이 우리 인간들에게 밥과 물을 가져다가 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알라신이 사막을 횡단하는 비법과 오아시tm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낙타는 알라신이라는 그의 종을 거느리고, “아흔아홉 神宮 너머”, 그 “카멜의 누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위대한 유일신으로 성화시켜 놓는다. 비록, 낙타는 그 유한성 때문에, “깃털 같은 마지막 짐 하나에 넘어”지고 있을지라도, 천하무적의 그 불굴의 정신을 통하여 낙타의 별자리에 그들의 “神聖을” 모셔 놓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대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니면서 그 익명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타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니는 그대들, 언제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면서도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니는 그대들, 상가집에서도, 결혼식장에서도,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니는 그대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도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니는 그대들, 법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군대에서도, 병원에서도, 자기 자신을 숨기고 다니는 그대들, 그 기만적인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과 타인들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벌벌벌 떨고 있는 그대들, 명예와 명성은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사소한 이익 때문에 전체의 이익을 훼손하고, 끝끝내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그대들----, 바로 그대들의 삶이 온갖 사기와 절도와 배임과 횡령과 치정과 강간과 강도와 약탈의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들의 삶은 익명인의 삶이며, 문명인의 화려한 독버섯과도 같은 삶이다. 니체는 그의 {서광}에서,
내가 나의 자기라는 샘으로부터 물이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늦어진다. 그래서 인내하기보다는 자주 오랫동안의 갈증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문에 나는 나의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 만인을 위한 물통으로부터는 마시지 않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생활하지, 나 나름대로 생활하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언제나 조금 지나면, 그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추방하고 나로부터 나의 혼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만인에게 악의를 품으며 만인을 두려워한다. 사막은 그때 내가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라고 역설한 바가 있고, 생 떽쥐베리는 그의 {어린 왕자}에서,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하고 어린 왕자가 말했습니다. 돌연 나는 모래가 어째서 그토록 신비스럽게 빛나고 있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무척 오래된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 집에는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아직 그 보물을 발견한 일도 없고 그것을 찾으려 했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집안 전체가 그 보물로 아름다운 마법에 걸려 있는 듯 했습니다.
라고 역설한 바도 있다. 시는, 예술은 자기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예술이며, 그 참된 자아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비법을 전해주는 예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영식 시인이 “낙타사파리를 떠나자”라고, 역설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낙타사파리를 떠난다”는 것은 “일상의 갈고리에 걸려 비루먹던 나날들”을 “뚝, 떼어 던지고 사막”으로 간다는 것이며, 그 사막으로 간다는 것은 “낙타가 길 없는 길을 어떻게 제 몸피 속에 그려 넣는지/ 그리움 깊으면 십리 밖 물 냄새도 맡을 수 있는지/ 오래 전 우리 꿈에서 빠져나간 몽고반점 같은/ 물의 지도를 따라가” 본다는 것이다. ‘비루먹다’라는 말은 개와 나귀와 말 따위의 짐승들의 피부가 헐고 털이 빠지는 것을 말하지만, 이 시에서 ‘비루먹은’ 것은 그 짐승들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문명인의 병은 익명인의 병이며, 그 익명인의 병은 완벽한 범죄와 완벽한 허위 속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이다. 문명사회는 병든 사회이고, 자연, 혹은 낙타의 삶은 건강한 삶이다. 인간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모르고, 낙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향유한다. 제 몸 속에다가 물의 지도를 그리고 ‘길 없는 길’의 지도를 갖고 있는 낙타는 전지전능한 신이며, 이 지상낙원의 창조주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먹고 살아갈 걱정이 없는 동물이며, 알라신이나 모래폭풍마저도 두려울 것이 없는 동물이며, 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과 알라신 따위는 거들떠 보지 않는 낙타가 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겠으며, 또한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오아시스를 짊어지고 다니고 있는 낙타가 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겠는가? 이영식 시인의 [낙타사파리]는 낙타의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을 배우고, 익명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되찾자는 노래이며, 우리 인간들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사막 속에 있다는 것을 아주 뛰어나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인들의 물통으로부터 물을 마시지 않고 자기 자신이라는 샘물로부터 물을 마신다는 것, 어딘가에 숨어 있는 오아시스를 찾아서 낙타처럼 지혜와 용기와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한입 베어 물고 싶은 날고기 같은 하늘 아래
사막의 시간은 산 채로 씹힐 것이다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만날 것이다.
사막은 그 ‘낙타 인간’이 살아가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다. 사막은 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다. 이영식 시인은 낙타 인간이며, 그의 [낙타사파리]는 그 어렵고 힘든 대모험 끝에 ‘낙타 인간’이라는 미래의 이상적인 인간형을 탄생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문명사회가 불모지대의사막이고, 불모지대의 사막이 지상낙원이다. 이영식 시인의 [낙타사파리]는 ‘낙타사파리’가 아니라, ‘문명인에서 자연인’으로, ‘익명인에서 인간’으로, 그 ‘인간’에서 ‘낙타 인간’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시이며, 끝끝내는 자기 자신을 ‘낙타 인간’으로 창조해놓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낙타 인간은 제 몸속의 지도를 통하여 ‘길 없는 길’을 갈 수 있는 인간이고, 또한 언제, 어디서나 오아시스를 찾아내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오아시스를 늘,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인간이다. ‘낙타 인간’의 삶의 비법은 불모지대인 사막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향유하는 비법이며, 언제, 어디서나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을 연출해놓을 수 있는 삶의 비법이다.
아아, 이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여, 부디 그 익명인이라는 탈을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거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오아시스를 짊어지고 다니는 낙타 인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혹독한 추위와 혹독한 모래폭풍이 불어와도 행복하고, 혹독한 더위와 타는듯한 갈증이 있어도 행복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어도 행복하고, 길이 없고 신기루만 있어도행복하다.
‘낙타 인간’, 자기 자신의 지상낙원을 언제, 어느 때나 짊어지고 다니는 인간, 그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
오오, 낙타 인간이여, 낙타 인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