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천지 나들이
이 수 영
첫째 날이다. 금새 비가 쏟아 질 듯 날씨가 흐리다. 하지만 어제까지 열대야를 넘나들던 날씨가 한결 시원해 졌다.
도가니 같은 대도시의 열기를 벗어났음일까. 아니면 무궁화호 열차의 시원한 냉방 덕분일까.
차창 밖으로는 가끔씩 다니던 길에, 더러는 낯익은 풍경들을 지나치면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깐이다. 누군가 흔드는 기척에 눈을 떴다. 어느 덧 경주에 다 왔다.
서예교실 회원 5명이 오늘 가는 곳은 울진 백암에 있는 온천으로 어느 대기업이 그들의 사원 가족들을 위해 운영하는 일종의 연수원이다.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연고가 있어 가끔 가본 곳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1년 중 가장 번잡한 여름 휴가철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열차로 경주역에 가면 역 앞에는 온천으로 가는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경주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아침부터 찌뿌둥하던 하늘에서 조금씩 비가 내리고, 차창으로 보이는 동해 바다는 허연 갈기를 휘날리며 힘차게 내닫는 백마처럼 내게로 다가온다.
멋지다. 그리고 가슴이 탁 터진다.
겉으로 허연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말처럼 요란한 바다이지만, 서예를 한다고 먹물을 벗하는 사람들의 정중동(靜中動)과는 정반대의 바다이다.
그 깊은 곳 어느 곳에는 여전히 너른 바다의 고요함을 품고 있는 동중정(動中靜)이 있다. 빗발도 점점 거세어진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풍경이 몇 년 전에 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건물 내부도 방도 리모델링을 해서 깨끗하게 정비되고 편리해 졌다.
방을 배정 받았다. 온 여름 내내 열대야와 씨름하던 곳에서 갑자기 들어온 이곳은 별천지다. 건물 내부 전체가 냉방이 되어 방과 복도와 각종 편의시설이 모두 시원하다. 갑자기 한기가 돈다. 옷을 꺼내 입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긴 팔 옷이라도 가져올 것을…….
또 하나 달라진 풍경이 있다. 우리 일행이 이곳에 올 때는 늘 휴가철이 지난, 이를 테면 회사원이나 그들 자녀들의 휴가철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그들과 일정이 겹쳐져 있었다.
그 때문일까. 호텔 안은 온통 알뜰 피서를 온 젊은 회사원과 그들의 가족 일색이다. 보기가 좋다.
우선 그들은 여기서 숙박비를 내지 않는다. 식사도 한 끼에 3,000원이면 된다. 그리고 승용차로 30분 정도만 이동하면 바다가 있다. 싱싱한 회도 있고, 어시장 구경과 함께 동해의 청정한 바닷물에 해수욕도 즐길 수 있다. 저녁이면 따뜻한 온천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즐길 수가 있다. 이 얼마나 알뜰 휴가이고 알뜰 피서인가.
덕분에 온천탕은 그들 가족이 붐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면 비교적 조용해서 몇 안 되는 60~70대들이 한가롭게 즐길 수 있다. 밤에는 제법 두터운 이불을 덮고 잤다. 열대야와 싸우며 잠 못 이루던 대구와는 별천지다.
둘째 날이다. 새벽 산책을 나가려다 돌아섰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다.
시간에 맞추어 후포행 버스를 탔다. 후포항으로 오가는 길은 종일 비가 내렸다. 그저께까지 그렇게도 가물던 날씨가 오늘은 차창에 얼룩지는 세찬 빗방울이 언제 보았는가 싶게 낯설다. 도로 양쪽의 가로수는 베롱나무다. 꽃이 한창이다. 백일이 넘게 피고 지는 꽃이라서 백일홍이란 별명이 붙은 이 꽃은 분홍색에서 빨강색, 더러는 보라색과 흰색의 꽃이 곳곳에 섞여 이색적인 그림을 그려놓지만 빗속에서 보는 꽃길은 아름답다기 보다는 슬프다.
빗방울이 눈물이 되어 뚜닥뚜닥 꽃송이에서 흘러내린다. 그걸 바라보는 나그네도 그냥 꽃을 닮아간다. 고개를 들면 방파제 너머로 가없는 동해가 펼쳐지고 너울같은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남기며 바위에 부딪히고는 다시 물러간다.
생선회와 찌개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잠시 비가 멎은 사이에 후포항 방죽을 걸었다. 방죽 위 바다 쪽은 사람이 만들어 쌓아 놓은 테트라포드가 네 발을 버티고 서로 얽혀서 파도의 숨을 죽이고 있다. 너무 시원하다.
그런 중에도 한가하게 낛시를 드리우고 바다를 응시하는 낚시꾼을 만났다.
잡은 고기는 없다. 입질하느냐고 물어도 대답은 없고 고개만 흔든다. 그럼에도 얼굴은 담담하다. 진정 강태공의 후예일까?
잠시 머물며 찌를 바라본다. 바닷물에 일렁이는 찌가 외롭다. 왜 거기 그렇게 흔들리고 있어야 하는지 알고나 있을까.
멎었던 비가 다시 내린다. 빗발이 더욱 세어졌다. 종점에 내려서 대합실로 비를 피하는 짧은 순간에 우산은 제 구실을 못하고 바짓가랭이가 다 젖었다.
마지막 날, 새벽 온천탕, 아침식사, 그리고 아홉시 30분에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도 그쳤다. 동대구역에 도착했을 때, 일기 예보로는 대구의 기온이 30도를 조금 넘는다고 했지만, 아침까지 있었던 그곳의 날씨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제 또 더위와의 전쟁이다. 별천지 나들이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2017. 8. 19
첫댓글 무더운 날 좋은 곳으로 피서를 다녀오셨네요. 1박2일의 피서 일정을 흐르는 시각에 따라 선명하게 그린 글에서 저도 함께 한것 같이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더위를 피하여 멋진 피서를 하여 이번 여름은 한결 시원하게 보낼것 같습니다. 묵향의 선비님들 피서도 버스를 타고 알뜰 하게 한것 같습니다. 덕분에 좋은글 한편이 탄생하여 잘 읽었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바닷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군요! 마음에 맞는 서예 동호인들과 만났으니 더욱더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별천지 나들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열차 타고 버스타고 백암온천까지 여행 즐거웠겠습니다. 같은 여행이라도 별천지는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여행일 것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잠시 대프리카를 떠나 좋은 나들이를 하섰읍니다. 이 더위에 한기를 느껴 두터운
옷을 준비하지 않음을 후회하는 마음, 확실한 별천지 경험인것 같읍니다.
친구 아들 덕분에 몇번 가본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때는 한 더위 휴가철을 재외한 기간에 갔습니다.지글지글 지구가 타들어가는 듯한 더위때 여행하셨어 정말 별천지에 다녀 오셨습니다.짧았지만 행복하셨던 여행이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듯 합니다.
서예 회원님들과 함께 한 2박3일의 휴가... 알뜰하게 별천지 여행 잘 하셨습니다. 비가 내려 아쉽지만 비가 왔기에 더 인상적이었던 풍경도 글에 담아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함께 어울려 즐겁게 여행을 한다는 게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어울리며 즐겁게 산다는 것은 복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름의 이열치열식 온천도 괜찮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