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량자고(懸梁刺股)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른다는 뜻으로,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懸 : 매달 현(心/16)
梁 : 들보 량(木/7)
刺 : 찌를 자(刂/6)
股 : 다리 고(肉/4)
(유의어)
낭형조서(囊螢照書)
손강영설(孫康映雪)
영설독서(映雪讀書)
인추자고(引錐刺股)
자고현량(刺股懸梁)
차윤성형(車胤盛螢)
차윤취형(車胤聚螢)
차형손설(車螢孫雪)
착벽투광(鑿壁偸光)
천벽인광(穿壁引光)
추고지면(錐股之勉)
현두두서(懸頭讀書)
현두자고(懸頭刺股)
형설지공(螢雪之功)
형창설안(螢窓雪案)
옛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를 할 때 어떻게 했을까. 지금처럼 환경이 좋지 않았지만 반딧불과 겨울철 쌓인 눈빛으로(螢窓雪案 형창설안) 글을 보거나 벽에 구멍을 뚫어 이웃집에서 새어 나오는 촛불 빛을 훔쳐(鑿壁偸光 착벽투광)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고통을 주어가며 공부를 한 사람들이 있으니 졸음을 쫓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어두고(懸頭) 넓적다리를 송곳으로 찔러가며(刺股) 책을 읽었다.
오늘날은 이렇게 하지 않아도 효과적인 학습법으로 실력을 배양하지만 옛날의 이 방법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모두 큰 인물이 되었으니 열심히 공부하는 비유로 전한다. 대들보에 매달았다고 들보 량(梁)을 써서 현량자고(懸梁刺股)라고 한다.
이 성어는 두 사람의 고사에서 따와 합성했다. 송(宋)나라 이방(李昉)이 편찬한 백과사서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머리칼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송 태종이 1000권이 넘는 책을 1년에 걸쳐 읽었다고 하여 이름을 얻은 그 책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대학자인 손경(孫敬)과 전국시대에 종횡가(縱橫家)로 명성을 떨친 소진(蘇秦)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손경과 소진 두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합쳐진 것이다. 현두자고(懸頭刺股) 또는 자고현량(刺股懸梁)이라고도 한다.
현량(懸梁)이라는 말은 중국 한(漢)나라 때, 신도(信都; 지금의 하북성 기현)에 살고,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했던 학자 손경(孫敬)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손경은 자가 문보(問寶)이며, 그는 너무 가난해서 종이조차 구할 수 없자, 버들잎을 따서 그곳에 경전을 베껴가며 공부하였다. 또한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하여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주위 사람들은 그를 폐문(閉門)선생, 폐호(閉戶)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책을 읽다가 피곤하여 졸기라도 하면 그는 자신에게 무척 화를 냈고, 심지어 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아(以繩系頭, 懸屋梁) 머리를 고정시켰다. 졸다가 머리카락이 뽑힐 듯 아프면 다시 정신을 차려 책을 읽었던 것이다. 손경은 이러한 호학(好學) 정신으로 당시의 유명한 유학자가 되었다.
자고(刺股)라는 말은 소진(蘇秦)의 이야기이다. 유향(劉向)이 전국시대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은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편에 실려 있다.
소진(蘇秦)은 동주(東周)시기 낙양(洛陽) 사람으로 저명한 책략가이자 세객(說客)이다. 그는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초(楚), 제(齊) 등 육국(六國)을 연합시켜 진(秦)나라에 대항하고 스스로 육국의 재상이 된 인물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소진은 먼 동쪽의 제(齊)나라에서 스승을 모셨는데 후에는 병법과 유세술에 뛰어난 대학자 귀곡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제후들을 설득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학문을 배웠다. 제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소진은 가족들에게 천하를 돌며 유세(遊說)로 출세하겠다며 호언장담한 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훌쩍 떠났다.
그러나 생각만큼 순탄치 못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진(秦)나라였다. 당시 진나라는 변법을 시행한 상앙이 반대파에 의해 처형당한 직후라 정세가 몹시 불안했다. 새로 즉위한 진혜왕에게 찾아가 천하통일의 묘안을 제안했지만 소진이 어떤 인물인지 들은바 있는 혜왕은 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소진은 포기하지 않고 조(趙)나라로 갔다. 그러나 조나라의 국상이었던 봉양군도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허비하고 빈털터리가 된 소진은 남루한 옷만 걸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허름한 모습에 가족들도 반겨주지 않았다.
소진은 그 날 이후 귀곡선생이 주신 태공음부편(太公陰符篇)을 밤낮으로 공부하게 된다. 밤이 깊어 잠이 오면 송곳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찌르면서 공부하였고, 그의 다리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곤 하였다(引錐自刺其股, 血流至足).
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태공음부편의 이치를 터득하고 각국의 형세를 고찰한 후 소진은 이와 같이 말했다. “내가 이만한 공부로써 실력을 발휘한다면 어느 임금이고 간에 금옥(金玉)과 비단과 상경 자리와 정승 자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소진은 이후 조나라 숙후를 다시 찾아가 6국이 연합해서 진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책을 내놓으며 종약장으로 활약하여 각국을 돌아다니며 연합을 성사시킨다. 훗날 전국시대의 종횡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6국 재상이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다.
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하여, 현량자고(懸梁刺股)는 고통을 감수하고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한다. 옛 선현들의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돋보이며, 학업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볼 수 있는 구절이다.
현자들의 평생공부법
독서가 나와 사회의 격과 질을 결정한다
진시황(秦始皇)의 공부도 상당했던 것 같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탄생시킨 그는 제국을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각종 시스템을 창안하고, 의식주 등 거의 모든 방면에 이른바 통일이라는 표준을 제시했다. 이를 점검하기 위해 그는 하루에 검토해야 할 문서의 양을 저울로 달아 정해놓고 이를 다 검토하지 못하면 잠도 자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과로는 진시황의 건강을 해쳐 결국 그의 수명을 단축시켰고, 나아가 통일 제국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그의 공부법 일화에서는 진시황의 성격은 물론 한 나라의 명운까지 유추할 수 있다. 진시황은 무슨 일이든 극한 상황, 달리 말하면 완벽, 완전, 완성에 이르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완벽주의자 내지 시스템 맹신자 진시황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확인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무엇에 비하랴!
공부법의 원조 격인 공자(孔子)의 공부는 많은 점에서 시사적이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공자의 말씀은 공부와 관련한 역대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주자학(朱子學)을 탄생시킨 송(宋)나라 때 사상가 주희(朱熹)의 공부법은 단계적이고 계통적이었다. 대단히 치밀하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마치 수도승의 수련을 방불케 한다. 진지한 공부와 깊이 있는 학문을 원한다면 충분히 따를 만하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하라(讀書萬卷 行萬里路)는 천고의 명언을 남긴 고염무(顧炎武)는 공부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하고, 모든 공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고염무의 공부와 실천은 세상 구원을 외치는 사이비들을 가려내는 지표가 된다.
중국 현대문학을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은 노신(魯迅)의 공부법은 그의 치열한 독서 편력과 달리 한결 간결하고 명료했다. 모든 공부가 궁극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요약되고, 이것이 작품이나 실천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노신의 공부에서 새삼 확인하게 된다.
혁명가 모택동(毛澤東)의 독서 편력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독서와 공부 덕분에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끝내 장개석(蔣介石)을 대륙에서 내쫓고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부와 관련한 고사성어도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일중독자 진시황으로 인해 ‘문서를 저울로 달다’라는 뜻의 고사성어 형석양서(衡石量書)가 탄생했다.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따르면 대학자 동중서(董仲舒)는 강학을 할 때 실내의 장막을 다 내리고 문을 걸어 잠갔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동안 동중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여기서 장막을 치고 공부한다는 뜻의 하유독서(下帷讀書)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이 밖에 공자세가(孔子世家)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은 잘 알려진 고사성어다.
중국 현자들의 공부법 특징과 공통점
진정 책을 좋아하는 사람, 독서인은 책을 그냥 읽기만 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독서(讀書)는 기본이다. 읽고 싶은 책은 돈을 모아 사서 읽는다. 이것이 매서(買書)다. 돈이 없거나 살 수 없으면 빌려서라도 읽는다. 차서(借書)라 한다. 누군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갖고 있는데, 살 수도 빌릴 수도 없으면 그 사람을 찾아가 기어이 보고 온다. 이를 방서(訪書)라 한다. 원하는 책을 간직하는 장서(藏書)도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폭넓고 깊은 독서 편력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하는 저서(著書)의 단계로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독서, 매서, 차서, 방서, 장서, 저서, 이상 독서와 관련한 여섯 조항이자 단계는 독서인의 가장 기본적 특징이다. 이를 편한 대로 육서(六書)라 부를 수 있다. 여기에다 보고 싶거나 사고 싶은 책을 보지도 사지도 못할 때 방서하여 베껴 오는 초서(抄書)를 포함하면 칠서(七書)가 된다. 독서인의 특징은 이런 것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
중국의 저명한 근대 문학가이자 역사가인 정일매(鄭逸梅)는 독서의 정취에 관한 좋은 글을 많이 남겼는데, 다음은 독서와 관련해 그가 남긴 시 중 하나다.
바람 좋고 상쾌한 날 나가 놀지 않음은 천시(天時)를 거스르는 일이요,
깨끗이 닦은 창을 내다보며 책 읽지 않음은 지리(地利)를 거스르는 일이며,
좋은 친구 집 가득 메웠는데 술 마시지 않음은 인화(人和)를 해치는 일이다.
정일매는 또 ‘사람의 밉고 곱고 여부는 잘생겼느냐 못생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책을 읽었느냐, 즉 뱃속에 시서(詩書)의 기운이 가득 차 있느냐에 있다’는 말도 남겼다. 책의 향기, 서향(書香)이 한껏 묻어나는 격조 높은 말이다. 책과 독서는 사람의 품격을 다르게 만든다.
육서 또는 칠서로 대변되는, 책을 사랑하는 독서인의 기본적 특징을 염두에 두고 중국 역대 현자들의 공부법(독서법)을 요모조모 검토한 결과 아래와 같이 여덟 가지 특징이자 공통점을 추출했다.
언제 어디서든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럴 것이다. 송(宋)나라 때의 유명한 문장가 구양수(歐陽修)는 자신이 평생 지은 문장 상당수를 말 위에서, 베개맡에서, 화장실에서 구상했다고 했다. 같은 송나라 때 사람 동분(董棻)은 한연상담(閑燕常談)이란 책에서 이를 두고 삼상(三上), 즉 마상(馬上; 말 위에서), 침상(枕上; 잠자리에서), 측상(厠上; 화장실에서)이라고 했다.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긴 하지만 구양수라는 걸출한 문학가가 얼마나 시간을 아껴가며 독서했는지 넉넉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말 위, 수레 안, 잠자리, 전쟁터, 화장실 등 틈만 나면 어디서든 공부나 독서를 했다.
구양수와 같은 북송 때의 문학가이자 장서가로 유명한 전유연(錢惟演)은 화장실 독서 예찬론자라 할 정도였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책을 끼고 갔는데, 화장실에서 책 읽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 경학자이자 희곡 이론가인 초순(焦循)은 옷을 입을 때나 길을 갈 때도 책을 읽었고, 목욕을 하거나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런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독서는 문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삼국지(三國志)의 명장 관우(關羽)가 춘추시대 역사서 춘추(春秋)를 즐겨 읽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趙匡胤)도 무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독서광이었다.
조광윤은 정변을 통해 곤룡포를 걸친 무인이지만 비교적 깨어 있는 정치의식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해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는데, 행군을 하거나 전투를 치르면서도 틈만 나면 공부했다. 어디에 귀한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서 모아야 직성이 풀렸다. 장수들은 대체로 전투가 끝나면 금은보화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는 오로지 각종 서적을 수집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언젠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시영(柴榮)을 따라 회남(淮南)으로 출정했을 때의 일이다. 조광윤이 크고 작은 상자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본 누군가가 세종에게 조광윤이 재물을 약탈했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곧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보물이라고는 단 한 점도 발견하지 못한 반면 큰 상자에서 책이 잔뜩 나왔다.
세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조광윤을 불러, “너는 나의 중요한 장수로서 군사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고 영토를 넓혀 공을 쌓아야 하거늘 그렇게 많은 책을 어디다 쓰려 하느냐”고 물었다. 조광윤은 “뛰어난 지략으로 폐하를 돕지도 못했는데 무거운 임무를 맡아 늘 마음에 걸렸다”면서, 책을 많이 구해 식견을 넓혀서 보다 큰 공을 세우려 했다고 대답했다.
조광윤은 군주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지 다른 사람의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독서를 통해 사색하고, 실천을 통해 몸소 경험하며 깨달았기 때문에 비교적 깨우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죽는 날까지 독서하는 습관을 지킨다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모든 습관이 그렇듯 독서도 어릴 때부터 습관으로 단단히 자리 잡지 않으면 평생 가기는 힘들 것이다.
송나라 때의 학자 정초(鄭樵)는 역사학 방면에서 통사를 중시해 3,000년 통사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司馬遷)을 각별히 존경했다. 정초는 태어나 말을 시작하면서 바로 책을 읽고 싶어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책 좋아하는 성품과 독서 습관은 평생을 갔다.
송나라 때의 문학가이자 장서가 엽몽득(葉夢得)은 50세까지 매년 5월부터 8월 15일까지를 책 읽는 하과(夏課)로 정해놓고 하루에 육경(六經)을 한 권씩 읽었는데 20년 넘게 이 습관을 유지했다. 50세 이후에도 독서 습관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이와 건강 때문에 육경을 1년에 한 번씩 읽었다. 만년에는 노환으로 시력이 따라주지 않자 제자 둘을 곁에 두고서 돌아가며 책을 읽게 하여 들었다.
어릴 때부터 나가 놀기보다 책을 끼고 산 명나라 때의 장서가 기승선(祁承㸁)은 과도한 독서 때문에 병이 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또 초기에 모은 책을 화재로 다 잃고도 만년에 다시 책 수집에 나서 10만 권 이상을 모았을 정도로 책을 좋아한 사람이다.
청나라 때 역사학자이자 경학가로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 같은 명저를 남긴 왕명성(王鳴盛)은 4~5세 때부터 하루에 수백 자씩 글자를 익힐 정도로 총명했다. 32세 때 모친상을 당한 후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30년 가까이 책만 읽으며 살았는데, 68세 때 과도한 독서 때문에 두 눈의 시력을 다 잃었다. 그 뒤 가까스로 시력을 다소 회복했지만 여전히 죽는 날까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책을 아끼고, 좋은 책은 몇 번이고 읽으며 평생 소장한다
독서인은 책을 아끼고, 아끼는 책은 평생 소장한다. 따라서 자신이 구한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청나라 때 이름난 장서가 황비열(黃丕烈)은 기이한 책을 구할 때마다 화가를 초빙해 책을 얻게 된 사연을 담은 그림, 즉 득서도(得書圖)를 한 폭씩 그리게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이 모여 책으로 엮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좋은 책을 평생 소장하는 장서는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명, 청 교체기의 혁신적 사상가 황종희(黃宗羲)는 장서의 어려움에 대해 “독서도 어렵지만 장서는 더 어렵다.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고 했다.
남송 때 문학가이자 광적인 장서가로 명성이 자자한 육유(陸游)는 밥을 먹을 때도, 병에 걸려 끙끙 앓으면서도, 비탄에 잠겨 있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한평생 살면서 온갖 병이 찾아들지만 책에 미치면 의사가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만년에 늙고 병들어서도 독서만큼은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런 독서 편력을 시로 남겼다. 육유는 또 자신의 서재를 서소(書巢), 즉 책둥지라 불렀는데 훗날 많은 독서인에게 영감을 준 이름이다.
명나라 때 저명한 장서가로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장서각을 소유한 범흠(范欽)은 자신의 장서를 절대 남에게 빌려주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자손일지라도 공부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만 마지못해 장서각에 들어가 책을 읽게 했다.
보고 싶은 책은 빌려서, 찾아서, 구해서, 베껴서, 사서 반드시 본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책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유난히 너그러운 편이다.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단순히 좋아하는 선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청나라 때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원매(袁枚)는 열두세 살 무렵부터 책을 목숨만큼 사랑했다고 고백하면서, 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돈이 없어 못 사면 꿈에서라도 기어이 사서 돌아왔다고 할 정도로 책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남송 때의 저명한 장서가이자 목록학자인 진진손(陳振孫)은 책 수집에 일가견을 보였는데, 귀한 책이 어디에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기어이 찾아가 사거나 빌려서 베꼈고, 그렇게 해서 모은 책이 무려 5만 1,180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도서관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앞서 잠깐 소개한 정초는 장서가를 만나면 그 집에 머무르며 모든 책을 기어이 다 읽고서야 떠났다고 한다.
명나라 때 희곡 이론가이자 장서가 왕세정(王世貞)은 양한서(兩漢書; 한서와 후한서)의 송나라 때 판본을 사려고 집 한 채를 들였는데, 훗날 엽창치(葉昌熾)가 이를 두고 “기이한 책 하나를 얻을 때마다 집 한 채를 잃는구나”라는 시를 남겼다.
100만 자가 넘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이란 의학사의 명저를 남긴 명나라 때의 걸출한 의학가 이시진(李時珍)은 10년 동안 공부하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형왕부와 태의원에서 근무한 몇 년 동안 읽은 서적이 3,800종이 넘었다.
명나라 사람 장박(張博)의 독서 습관은 대단히 특이했는데, 그는 좋은 책을 구하면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베껴서 다 읽은 다음 그걸 태워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베껴서 읽고 태우기를 반복했는데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했다. 그래서 그의 독서 습관을 초(抄; 베끼고), 독(讀; 읽고), 소(燒; 태우고)라 불렀다. 그는 또 자신의 서재에 칠분재(七焚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의 삼위일체
읽기가 제대로 되면 쓰기는 대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간단한 메모는 물론이고 의문 사항이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독후감이 대표적인 글쓰기 형태다. 우리 교육에서 독후감은 학습자의 고통이라고 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존재지만 이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함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서로의 느낌과 감상을 나누다 보면 독후감 쓰기는 저절로 실천하게 되고, 책을 멀리하던 아이들도 점점 책과 친해질 것이다.
현자 중에는 독후감을 일기처럼 쓴 사람이 많았다. 바로 독서 일기라는 것이다. 옷을 입으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목욕을 하면서도, 화장실에서도 책을 읽었다는 초순은 독서 일기를 30년 가까이 썼는데, 그 두께가 오늘날 단위로 60센티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얇은 한지의 두께를 고려한다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읽는 것 못지않게 쓰는 것을 중시한 독서인으로 모택동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필기 없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책을 읽는 방법은 눈으로 읽는 것 한 가지만이 아니다. 입으로 읽는 낭독(朗讀)이 있고, 손으로 써보는 필기(筆記)가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독서는 눈과 입 그리고 손을 함께 동원해야 한다. 옛사람들은 이와 관련해 삼도(三到)니 사도(四到)니 하는 표현을 만들어냈다.
삼도(三到)란 수도(手到; 손이 간다는 뜻으로 책을 잡는다는 말이다), 목도(目到; 눈이 간다는 뜻으로 눈으로 읽는 단계를 말한다), 심도(心到; 마음이 간다는 뜻으로 읽고 이해하고 깨닫는 단계를 말한다)를 뜻한다. 사도(司徒)는 여기에 족도(足到; 책을 발로 찾아간다는 뜻)가 더 들어가고, 오도(五到)라 하면 사도에 이도(耳到; 귀로 듣는 것을 말한다)가 포함되는데, 실은 구도(口到; 입으로 낭독하는 것을 말한다)까지 포함해 모두 육도(六到)가 되어야 한다.
말더듬이 왕의 증상을 낭독을 통해 고쳐나가는 영화도 있듯이, 낭독은 눈으로 읽는 목독(目讀) 못지않게 중요하다. 서재를 세상에 둘도 없는 신성불가침 장소로 여긴 근대 인물 장묵생(張黙生)은 어려서 말을 더듬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책을 큰 소리로 낭독함으로써 병을 고쳤다. 그는 또 만년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압박으로 인한 정신적 부담도 독서를 통해 극복했다.
옛 책과 새로운 책을 같이 중시한다
지식은 축적의 산물이다. 경험이든 선험이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쌓이고 덧쌓인 것이 지식이고,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여 바르게 활용하면 지혜로 한 차원 승화된다. 책은 인류의 이런 지혜가 고도로 농축된 유산이다. 아마도 인류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독서는 옛것과 새것을 동시에 아울러야 한다. 마치 세대가 교감하듯 과거의 지혜와 현재의 지식을 고루 섭취해야 한다. 영양 섭취에서 편식이 금물이듯 독서에서도 편독(偏讀)은 금물이다.
선인들은 이런 점을 잘 알아서 늘 과거의 지혜와 현재의 지식을 조화시켜 새로운 것을 창출하라고 말한다. 옛것(고전)을 충분히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내라는 공자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과거의 지혜가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아주 적절하게 지적한 말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때 고금(古今)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과거를 중시할 것인가, 현재를 중시할 것인가에 대한 사상 노선의 대논쟁이었는데,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박고후금(薄古厚今)과 과거를 중시해야 한다는 후고박금(厚古薄今)이 대립했다. 사상 노선을 둘러싼 내부 진통이었지만 결과는 고대 문화에 대한 심각한 박해로 이어져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파괴되었다.
학문과 공부에 옛날과 지금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옛것이라고 해서 낡고 쓸모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눈으로 옛 책을 보면 옛 책이 모두 새로운 책으로 보인다. 반대로 낡은 눈으로 새 책을 보면 새 책 역시 낡은 책이 된다. 청대 말기의 문인 손보선(孫寶瑄)의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독서인에게는 이런 눈이 필요하다.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은 자신이 역사서를 쓰게 된 궁극적 목적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설을 이루고자 하는 데 있다고 했다.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는 작업이 바로 역사 서술이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절대 역사서 사기(史記)다.
그는 또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세의 스승이라고 했고,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볼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모두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어떤 의미인지 강조한 말이다. 책도 다르지 않다.
읽는 데 머무르지 않고 깊은 사색을 강조하고, 깊은 사색을 통한 문제 제기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독서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 책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 말씀처럼 여기는 태도다. 또 하나는 비판적 태도로 현실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익하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취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독서를 그저 편리하게 자신을 치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다. 제대로 된 독서인이라면, 특히 젊은이라면 당연히 두 번째 태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생각하고 비판하는 태도야말로 독서의 단계와 경지를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독서는 책을 읽어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읽어서 습득한 지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의문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고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발견과 발명 그리고 창조가 바로 의문을 품는 데서 비롯되었다. 창조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공이 깊은 독서인치고 생각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마천은 배우길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면 마음으로 그 뜻을 알게 된다(好學深思 心知其意)는 명언을 남겼다. 공자는 공부와 생각을 연관지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한유(韓愈)는 생각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하여 배움과 생각 그리고 실천에 이르는 공부의 심화 단계를 절묘하게 지적했다.
근대의 경학자 요평삼(廖平三)은 공부는 여러 번 제대로 변화를 겪어야 한다면서 3년을 공부하고도 변화가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고, 10년이 지나도록 변화가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부 경험에 비추어 공부에 생각이 따라야 크게 변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오래 의심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말로 공부와 생각 그리고 의문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남송 시대 학자 진선(陳善)은 독서는 시작 단계에서는 책에 빠져야 하지만 마냥 빠져 있지 말고 그 책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를 출입 독서법이라 할 수 있는데,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고인의 정신과 실질적 의미를 체득해야지 글자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는 살아 있는 독서와 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모름지기 나가고 들어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곳을 찾아야 하고 마지막에는 나오는 곳을 찾아야 한다. 보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입서법(入書法)이라 하고, 활용한 다음 뛰어넘고 벗어나는 것을 출서법(出書法)이라 한다. 그 책에 들어가지 못하면 옛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없고, 그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 글 밑에 깔려 죽는다. 들고 나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독서법이다.”
공부와 독서에서 의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한 사람은 송나라 때 철학가이자 교육가인 육구연(陸九淵)이다. 육구연은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의리(義理)와 공사(公私)를 가릴 줄 아는 변지(辨志)를 강조하면서, 단정함을 공부와 학문의 자세와 동기로 삼았다. 학자가 자립하여 도를 알면 육경이 모두 발아래 있다고 했다.
육구연은 공부법과 관련해 공부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 매달리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다음 문장이나 다른 대목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던 대목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는 의미다.
공부와 의문의 관계에 대해 그가 남긴 공부하는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의문을 품으면 진보한다는 말이나 작게 의심하면 작게 진보하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한다는 말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뛸 정도로 공부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여행이나 현장 학습을 함께 중시한다
독서만권(讀書萬卷) 행만리로(行萬里路)라는 말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하라는 뜻으로 청나라 학자 고염무(顧炎武)가 한 말이다. 진정한 공부는 책상에만 붙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책을 통한 지식은 여행이나 현장 확인을 통해 심화하는 과정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책 속의 글자가 말 그대로 활자(活字)가 된다. 일본 속담에선 자식을 사랑한다면 여행을 보내라 했고, 서양에는 여행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말이 있다. 인생 경험 중에서 여행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이다.
일가를 이룬 지식인이나 독서인치고 여행과 현장 경험을 권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앞서 소개한 의학자 이시진도 10년을 두문불출하며 책읽기에 매달렸지만 그렇다고 책상머리에만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종래의 의학서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다녔고, 민간의 처방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약초 표본을 관찰하고 수집하기 위해 천하를 누볐다. 수천 종의 책을 읽고, 수만 리를 다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난 결과물이 바로 100만 자가 넘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이다.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은 이 본초강목을 가리켜 중국 고대의 백과사전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출간된 대표적 고사성어 관련 사전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인용한 고사성어가 가장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기의 고사성어 중 상당수가 현장감 넘치는 살아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마천의 여행과 무관하지 않다.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의 기록 고조본기(高祖本紀)를 보면 재미있게도 유방이 젊은 날 자주 들른 주모 이름을 딴 주막이 두 군데 나온다. 사마천이 유방의 고향인 강소성 패현 일대를 샅샅이 다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방이 이 술집에서 벌인 일화가 사마천이 발품을 팔아 알아낸 주막 이름을 통해 한결 생동감 넘치게 펼쳐질 뿐 아니라 고조본기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평생 여행한 경험을 글로 남겨 유기(游記)라는 문학 장르를 개척한 사람도 있다. 서하객유기(徐霞客游記)로 명성을 떨친 서홍조(徐弘祖)는 스물두 살 때 여행을 시작해 30년 넘게 중국 전역을 돌아다닌 전문 여행가였다. 하객은 새벽안개를 지고 길을 떠났다가 저녁안개를 지고 돌아오는 나그네라는 뜻으로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다.
그 결과물이 서하객유기라는 여행기인데, 중국 역사상 100대 사건 중 하나 또는 천고기서(千古奇書)로 꼽힐 정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그는 약 3만 리(1만 2,000킬로미터)를 여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인생의 10퍼센트 가까이 병마와 싸우며 여행하고 답사했으니 그 불굴의 의지가 정말이지 대단하다.
서하객의 방랑벽을 일찍부터 인지한 그의 어머니 왕유인은 아들의 뜻을 꺾지 않기 위해 사나이가 천하에 뜻을 두어야지 우리에 갇힌 닭과 수레를 끄는 말처럼 집이나 뜰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며 아들을 격려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아들이 오랜 여행길에서 돌아와 밤늦게 사립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치마끈을 반대로 묶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달려 나와 아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여기서 반속요군 도타혜(反束腰裙倒扡鞋)란 고사가 나왔다.
이런 여행이나 현장 학습, 나아가 사회 체험을 글자 없는 책이란 뜻에서 무자서(無字書)라 하는데, 청나라 때 문학가 요연(寥燕)은 글자 없는 무자서란 천지만물을 말한다고 했다. 책벌레식 공부법을 죽은 독서, 죽은 책 읽기라며 반대한 것이다.
실질적 경험을 통해 인간사와 만물의 이치를 깨우치고 나아가 자연계와 사회에 존재하는 실제 지식을 체득하라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생활이야말로 가장 풍부한 책인 셈이다. 흔히 글자가 있는 유자서(有字書)는 중시하면서 이런 무자서는 등한시하는 현상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이상 중국 현자들의 공부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과 공통점을 여덟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물론 이 밖에도 많을 것이다. 진정한 독서인은 공부를 위한 독서나 출세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독서가 곧 공부요, 공부가 곧 독서였다. 지금 우리처럼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부의 한 방편으로 책을 읽는 얼치기 독서가 아니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란 베이컨의 말도 실은 제대로 된 독서가 자기 발전과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힘의 원천이 된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책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이끄는 데 가장 필요하고 유용한, 인류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다. 독서는 인간의 다양한 문화 행위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다. 독서가 습관이 되어 오랜 세월 축적되면 지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성까지 성숙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행위인 셈이다.
독서는 축적될 때 의미를 갖는다. 인간만큼 더디게 성장하고 성숙하는 동물은 없다. 독서가 인간의 성숙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은 둘 다 오랜 시간을 통해 축적되어야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부나 독서는 벼락치기로는 안 된다. 강요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며 20년 넘게 성장한다. 반면 인간의 두뇌는 죽는 순간까지 개발되고 계발할 수 있다. 정신적 성숙도 마찬가지다. 육체와 두뇌의 성장은 정신적 성장과 성숙의 기초가 되고, 여기에 꾸준한 독서는 인간적 성숙을 담보한다.
강요에 의한 공부와 타율적 독서는 아이를 일찍 피어서 일찍 지는 꽃처럼 만든다. 당장 싹을 틔우고 다른 어떤 식물보다 일찍 꽃을 피우면 보기에는 아름답고 화려할 수 있지만 이내 시들어 버린다. 발묘조장(拔苗助長)이란 중국의 고사성어가 이를 대변한다. 지나치게 거름을 많이 주면서 빨리 자라라고 뿌리와 줄기를 잡아당기면 얼마 가지 않아 시들고 만다.
인생은 긴 승부다. 조금 더디게 피더라도 오래 피어 있는 꽃이 되도록 공부하고 독서하게 해야 한다. 진정한 독서의 의미와 의의도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데 있다. 역대 현자들의 독서법이 한결같이 그랬다. 끝으로 책을 좋아한 사람 대부분이 장수했다는 사실도 여담으로 밝혀둔다.
소진의 단계적 심화 공부와 장의의 벤치마킹 공부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초에 걸친 전국시대 말기는 초강대국 진(秦)과 그에 맞선 나머지 6국의 극한 경쟁 시대였다. 말 그대로 생존을 건 사생결단에 국가의 모든 정책이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진과 6국의 대외 정책이 각각 어떤 방향으로 설정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을 돌며 자신의 주장과 능력을 설파하는 소위 유세가(遊說家)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데,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라는 대표적 두 유세가의 열전을 장편으로 마련해 놓았다.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 권70 장의열전(張儀列傳)과 기타 많은 유세가의 기록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이들 유세가에게는 무엇보다 천하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다시 말해 대세를 간파하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하는 능력에 따라 우열이 갈린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유세가들은 각국의 지도자를 대상으로 자신의 식견과 주장을 설파해야 했기 때문에 언변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유세가의 언변술 공부에는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오늘날 심리학과 유사한 공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변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상대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소진과 장의도 주로 이 분야에 대해 공부했다. 기록에 따르면 젊어서 제나라로 유학 간 두 사람은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귀곡자(鬼谷子)에게 유세술을 배웠다.
귀곡자는 그 정체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신비에 싸인 인물이지만 사마천은 그를 실존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귀곡이란 곳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했기 때문에 귀곡자라 불렀고, 중국 사상사에서는 유세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인 종횡가(縱橫家)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소진과 장의를 비롯해 손빈(孫臏), 방연(龐涓) 등 당대 최고의 인재를 길러낸 것으로 전한다. 말하자면 귀곡서당 같은 학원을 차려 맞춤형 교육을 했는데 주로 교육한 과목은 유세, 병법, 음양, 술법 등이고, 그 자신 귀곡자(鬼谷子)라는 책략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소진이 귀곡자에게 받은 교육도 유세를 비롯해 책략과 관계된 학문이었던 것 같다. 귀곡서당에서 공부를 마친 소진은 자신이 배운 바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고향 낙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소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의 수도 낙양에서 태어난 그는 조국이 주위 열강에 둘러싸여 껍데기만 남은 채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천하 정세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 천자국의 체면을 회복하려 했다. 훗날 그가 당시 초강국인 진나라에 맞서 나머지 6국이 동맹을 맺어 대항하자는 합종책(合縱策)을 제안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소진이 다음 단계 공부를 위해 택한 텍스트는 음부(陰符)라는 책이었다. 음부는 그의 조국 주나라 책으로 전국책(戰國策)에 따르면 강태공(姜太公)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음부를 태공병법(太公兵法)으로 보기도 한다. 한서(漢書)에 음부경(陰符經)이란 책 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책인 듯하다. 책은 전하지 않지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로 은밀한 계책을 다룬 책략서의 일종으로 보인다.
소진은 이 음부(陰符)를 1년 정도 공부했는데 요즘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책에 머리를 파묻고 집중 연구했다. 전국책(戰國策)에 따르면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잠을 쫓았는데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른다는 뜻의 추자고(錐刺股)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왔고, 소진 공부법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소진은 이 밖에 두현량(頭懸樑)이란 공부법도 남겼는데, 졸음을 쫓기 위한 방법으로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매달았다는 뜻이다. 훗날 소진의 이 공부법을 합쳐 추자고 두현량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량자고(懸粱刺股), 자고현량(刺股懸粱) 등으로 변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지독하게 공부한 끝에 소진은 그 성과를 췌마(揣摩)로 정리했다. 췌마란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해 거기에 맞춘다는 뜻이다. 소진이 이루어낸 췌마술은 유세가가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기로 정착했고, 혹자에 따르면 췌마라는 책으로 엮기도 했다고 한다. 소진은 이런 독특하고 독한 공부법을 통해 당대 최고 유세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소진은 귀곡자 밑에서 유세술을 배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소진은 음부를 집중 분석해 그 나름의 췌마술로 종합 정리하는 심화 학습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추자고 두현량이라는 지독한 공부법을 남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진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시종 유세술의 핵심을 움켜쥐고 파고든 것이다. 요컨대 그의 단계적 심화 학습은 목표 집중이라는 정확한 방향 설정 덕분에 불과 1년 만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소진이 단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췌마술을 터득하고도 몇 차례 유세에 실패했다. 심지어 그의 조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소진의 공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몇 차례 유세에 실패한 끝에 소진은 마침내 천하 정세에 대해 정확히 인식해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이어 자신의 유세 상대를 선택해 합종책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6국의 공동 재상이 되어 천하를 누비는 당대 최고 유세가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소진의 도장은 6국 공동 재상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육각으로 제작했고, 그의 무덤에 세운 비석도 육각이었다고 한다.
소진과 동문수학한 장의는 소진에 이어 천하를 주름잡은 유세가였다. 그의 공부법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유세가로서 그의 철두철미한 직업의식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전한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하던 장의는 초나라 재상의 식객으로 있다가 도둑으로 몰려 흠씬 두들겨 맞는 일을 겪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장의를 본 아내는 “아이고! 당신이 쓸데없이 책만 읽고 유세만 일삼지 않았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오!”라며 한탄했다. 이에 장의는 뭐라 대꾸하는 대신 입을 크게 벌려 혀를 쑥 내밀더니 “내 혀가 아직 그대로 붙어 있나 보시오”라고 말했다. 아내가 “아직 그대로 있네”라고 하자 장의는 싱긋 웃으며 “그럼 됐소”라고 답했다.
유세가는 다른 건 몰라도 혀만 살아 있으면 된다는 것을 이 일화는 아주 생생하게 전해준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혀는 아직 붙어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설상재(舌尙在)가 탄생했다. 유세가 장의의 철저한 직업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책만 읽었다는 아내의 말에서 장의도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소진의 경우를 미루어보면 장의 역시 유세술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세의 유일무이한 수단인 혀를 지극히 중시한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 장의 역시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위한 실제적 공부, 즉 유세술 공부에 집중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장의의 일생을 차분히 추적하다 보면 그의 공부법과 관련해 흥미로운 점을 유추해낼 수 있다. 유세가로서 출세는 소진이 빨랐다. 조금 늦게 시작한 장의는 초기에 소진이 그랬던 것처럼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심지어 동문수학한 친구 소진에게조차 인격적으로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홀대를 당했다. 장의는 설움을 삼키고 당시 최강국 진나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장의는 주막에서 만난 귀인 덕분에 편하게 진나라로 갈 수 있었고, 또 그 사람의 주선으로 진나라 왕을 만나 유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친구 소진의 안배였다. 사실을 안 장의는 자신은 소진에게 한참 못 미친다며 소진이 죽기 전에는 그의 합종책을 건드리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소진이 죽자 장의는 소진이 공들여 구축한 6국 합종책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기 시작하는데, 그가 진나라를 위해 수립한 대외 책략은 연횡책(連橫策)이었다. 남북 6국이 종(세로, 남북)으로 연합해 강국 진에 맞서는 합종에 대응해 진은 횡(가로, 동서)으로 6국과 각각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여기에 각국의 내분을 조장하는 첩보술을 가미해 각개격파 하는 연횡을 내세운 것이다. 이 연횡책은 얼마 뒤 범수(范睢)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과 연계해 진나라 외교 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장의의 이 연횡책은 소진의 합종책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장의는 소진이 수립한 전략을 반대로 천하 정세에 적용해 연횡책을 구상해낸 것이다. 오늘날 용어를 빌리자면 장의는 소진으로부터 벤치마킹 내지 아웃소싱을 한 셈이다.
장의는 자신의 능력이 소진에게 못 미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소진의 뒤를 따르되 그가 고안해낸 전략이나 책략과는 정반대되는 책략을 구사하기로 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이 장의의 공부법이었다. 소진의 식견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장의로서는 어찌 보면 이것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이었는지 모른다. 탁월한 일인자에게 정면으로 맞서거나 일인자가 내세운 논리나 상품과 똑같은 것을 들고 나와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결과가 말해주듯 아주 정확했다.
소진이든 장의든 그들의 현란한 언변과 유세술을 분석해보면 그들의 공부가 얼마나 깊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세 치 혀에만 의존해 출세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젊어서부터 단계적으로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창출하기 위해 더욱 깊이 공부에 매달렸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천하 정세에 대한 정보 분석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람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제 정세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최고 전문가였던 셈이다. 다만 두 사람은 그 분석 자료를 가지고 각국의 지도자를 만나 구체적인 정책 수립에 대해 조언하고, 그를 통해 고위직을 얻어서 출세한 정객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남다른 말솜씨 덕분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깊은 공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눈길을 주어야 한다.
▶ 懸(현)은 형성문자로 县(현)의 본자(本字), 悬(현)은 통자(通字), 悬(현)은 간자(簡字), 縣(현)은 고자(古字)이다. 心(심; 마음)과 음(音)을 나타내며 동시에 걸다의 뜻을 가지는 縣(현)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에 걸리다의 뜻으로 본디 縣(현)과 똑같이 쓰이다가 나중에 縣(현)이 군(郡)이나 현(縣)의 뜻으로 사용되자 오로지 걸다의 뜻만 나타나게 되었다. 懸(현)은 달다, 매달다, 달아매다, 매달리다, 늘어지다, 상을 걸다, 현격하다, 멀다, 멀리 떨어지다, 동떨어지다, 헛되다, 빚, 헛되이, 멀리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해결이 안 되어 걸려 있는 안건을 현안(懸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상금을 걸고 찾거나 모집함을 현상(懸賞), 글자나 그림을 새기어서 문 위에 다는 널조각을 현판(懸板), 사물의 차이가 뚜렷하거나 두드러진 상태를 현격(懸隔), 한문에 토를 다는 일을 현토(懸吐), 죄인을 죽여 높이 걸어 놓은 머리를 현수(懸首), 장부 따위 문서에 적혀 있음을 현재(懸在), 아래로 꼿꼿하게 달려 드리워짐을 현수(懸垂), 현상으로 내건 돈을 현금(懸金),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은 변설이라는 현하지변(懸河之辯), 상투를 천장에 달아매고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찔러서 잠을 깨운다는 현두자고(懸頭刺股),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서 후방의 본진과 연락도 없고 후원군도 없이 외롭게 싸운다는 현군고투(懸軍孤鬪) 등에 쓰인다.
▶ 梁(량)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삼수변(氵=水,氺; 물)部,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건너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刅(창)으로 이루어졌다. 물 위에 놓는 다리, 전(轉)하여 들보, 또 漁(어)와 통하여 물고기를 잡는 발담(어량魚梁)의 뜻이다. 梁(량)은 들보, 대들보, 나무다리, 교량, 징검다리, 제방, 둑, 어량(물고기를 잡는 장치), 활 모양, 노략질하다, 다리를 놓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리 교(橋)이다. 용례로는 강이나 내 등을 사람이나 차량이 건널 수 있게 만든, 비교적 큰 규모의 다리를 교량(橋梁), 등골뼈를 척량(脊梁), 함부로 날뜀을 도량(跳梁), 외나무 다리를 독량(獨梁), 산골짜기를 건너지른 다리를 산량(山梁), 건물의 중심에 세우는 기둥에 앞뒤로 마주 끼어 걸린 들보를 상량(相梁), 어지러이 달림이나 마음대로 날뜀을 육량(陸梁), 둘 이상의 재목을 합쳐서 만든 들보를 합량(合梁), 하천에 놓은 작은 다리를 하량(河梁), 가마가 지날 수 있는 나무다리를 여량(輿梁), 어량을 쳐 놓은 못을 택량(澤梁), 마룻대와 들보 또는 기둥이 될 만한 인물을 동량(棟梁),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라는 양상군자(梁上君子), 들보 위에 회를 바른다는 양상도회(梁上塗灰) 등에 쓰인다.
▶ 刺(자)는 형성문자로 刾(자)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朿(자; 나무에 가시가 있는 모양)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刺(자)는 찔러 죽이다, 찌르다, 끊다, 절단하다, 나무라다, 헐뜯다, 꾸짖다, 비난하다, 책망하다, 간하다, 충고하다, 묻다, 알아보다, 문의하다, 배를 젓다, 삿대질하다, 취하다, 마땅한 것으로 골라 가지다, 바느질하다, 가시, 침, 창끝, 바늘, 명함 등의 뜻과 칼로 찌르다(척), 베어 버리다, 덜어 없애다(척), 살피다, 알아보다(척), 정탐하다(척), 잔소리하다, 말이 많다(척) 등의 뜻과, 비난하다, 꾸짖다(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찌를 차(箚), 찌를 충(衝)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현상이 촉진되도록 충동함을 자극(刺戟), 몰래 사람을 찔러 죽이는 사람을 자객(刺客), 옷감이나 헝겊 등에 여러 가지의 색실로 그림이나 글자 또는 무늬 등을 수놓아 나타내는 일을 자수(刺繡), 칼 같은 물건에 찔린 상처를 자상(刺傷), 자극을 받아 크게 흔들림을 자격(刺激), 찔러 죽이는 칼을 자도(刺刀), 바늘이나 꼬챙이 또는 칼 따위의 날카로운 것에 찔린 상처를 자창(刺創), 세상일에 얽매어서 몹시 바쁨을 자촉(刺促), 찌름을 자충(刺衝), 찔린 듯이 따끔하게 아픔을 자통(刺痛), 죄를 들춰내어 자세히 심문함을 자심(刺審), 칼 따위로 찔러 죽임을 척살(刺殺), 원수를 칼로 찌름을 척수(刺讎), 허벅다리를 찌르고 머리털을 대들보에 묶는다는 자고현량(刺股懸梁), 풀을 베는 천한 사람이라는 자초지신(刺草之臣), 자객과 간사한 사람이라는 자객간인(刺客奸人) 등에 쓰인다.
▶ 股(고)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殳(수, 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股(고)는 넓적다리, 정강이, 직각 삼각형의 직각을 이룬 긴 부분, 가닥, 가지, 끝, 가닥이 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몹시 두려워서 다리가 벌벌 떨림을 고전(股戰), 두려워서 다리가 떨림을 고율(股慄), 기린을 달리 이르는 말 고고(股股), 넓적다리의 힘줄을 고근(股筋), 남자의 홑바지를 고의(股衣), 여자 속옷의 한 가지를 고장(股藏), 남자가 입는 저고리를 고첩(股褶), 두 다리의 사이를 고간(股間), 여러 사람이 공동하여 사업을 경영할 때에 일정한 방법으로 각각 내는 밑천을 고본(股本), 넓적다리의 살을 고육(股肉), 사타구니와 손바닥을 고장(股掌), 사타구니와 장딴지를 고비(股腓),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고굉지신(股肱之臣), 다리와 손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고장지신(股掌之臣), 다리와 팔의 힘이라는 고굉지력(股肱之力)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