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65]아버지 세대의 ‘흑역사黑歷史’ 증빙자료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아시는가? 광무光武, 융희隆熙. 이 두 연호가 있을 뿐이다. 1897년 8월 17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가 광무 1년이며, 나라를 잃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는 융희 4년때 일이었다. 조선 500년 내내 우리의 독자 연호는 없었다.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명, 청 황제들이 사용하던 연호를 쓸 수 밖에 없은 것은, 우리가 중국의 변방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흑역사黑歷史의 한 단면斷面치고 잔인하다.
지난 주말, 집안을 대청소하다 아버지가 평생 보관한 자료 중 당신의 초등학교(당시의 명칭은 둔남공립심상소학교(분교)-둔남공립국민학교였다) 시절 때 받은 우등상장-통신부-졸업장을 발견하여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서류에 찍힌 연도(소화昭和)를 보면서, 우리의 연호를 생각해본 소이연所以然이다. 아버지는 일본 연호로 소화 2년생이다(자신들의 출생연도 등을 말할 때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말끝마다 ‘소화 몇 년’을 들먹이는 어르신들을 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흔히 ‘메이지유신明治維新’할 때의 ‘명치’는 메이지 일본왕의 연호로 1868년부터 1912년까지 사용됐다. 그후 타이쇼 일본왕의 ‘대정大正’ 연호가 1926년까지 이어졌고, 소화(쇼와)는 히로히토 일본왕의 연호로 1989년까지 사용됐다. 현재의 연호는 아키히토의 ‘평성平成(헤이세이. 1989-2919)’에 이어, 나루히토(덕인德仁. 126대 일본왕. 1960년생) 일본왕의 ‘영화令和(레이와), 그러니까 올해는 레이와 5년이다.
아무튼, 이 옛날 문건으로, 아버지가 여러 번 강조하던 5년내내 초등학교에서 우등상을 받았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소화 19년, 18살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 서기西紀로 1944년이다. 상장에 찍힌 이름을 보라. ‘송촌세태松村世泰’. 송촌은 최崔씨의 창씨개명 성姓이다. 공부 잘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는 오두엽 담임 이름은 ‘오원두엽吳元斗燁’, 이런 망할 놈의 일이 다 있는가. 일개 개인의 흑역사가 아니고, 나라의 아픈 역사를 방증傍證하는 것이다. 3,4,5학년 통신부 가운데 5학년치를 보니, 과목(수신, 국어, 국사, 지리, 산수, 이과, 체조, 무도武道, 음악, 습자習字, 도화, 공작, 직업과)도 많은데, 모조리 10점 아니면 9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등상이었으리라. 3, 4학년치도 대략 비슷하다. 당시의 국어國語는 조선어(한글)이 아닌 일본어였을 터이니, 이만한 흑역사가 어디 있을꼬?
정치 생각을 가능한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런 흑역사를 생각하니, 또다시 이 폭염의 날씨에 울화통이 터진다. ‘핵오염수 방출’은 무엇이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다케시마(죽도竹島)의 날’까지 정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당들은 또 누구인가? 이 땅의 ‘토착왜구’라는 신조어는 또 무슨 말인가? 문호文豪 조정래 작가는 <아리랑>에서 “일본인들의 죄는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피울음의 글을 썼건만. 도무지 모를 일이다. 아베 전총리가 암살이 되어도 정신을 못차리는 저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굽신외교’를 하는 듯한 이 나라의 대통령은 또 누구란 말인가? 아아-, 염천지하에 스트레스만 더할 뿐. 생각을 접자.
좌우지간,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문건들을 이제껏 버리지 않고 보관해 왔을까? 고향집에서 구십 평생 한번도 이사한 적이 없으니 가능했을 터이나, 원래부터 기록과 보관을 잘하신 분이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때 당신의 할아버지가 이동책방을 하며 판 외상장부나 부동산 매매증서까지 있을까? 민초民草들의 소소한 역사가 어찌 역사가 아닐 것인가. 이런 것이 역사인 것을.
당신은 다섯 살 때, 당신 아버지와의 작은 일화를 지금도 잊지 않고 얘기하신다. 무등을 태운 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활동사진(영화)을 보며 ‘또 역亦’자를 가르쳐줬다는 당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한량閑良이었던 것같다. ‘가방끈’이 아예 없는데도 치과 기술을 배운 ‘돌팔이 치과의사’였다고 한다. 나이 서른에 영영 가버리시다니, 해도 너무했다. 원래는 영민한 집안이었던 것같은데, 가계家系가 멸절될 정도로 망가진 집을 일으켜세우느라 평생 고군분투孤軍奮鬪하신 아버지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한번도 해보지 못한 ‘킬링타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라 쩔쩔매신다. 부디 안식하시길.
노년은 우리에게 어떻게 와닿는가? 우리는 어떻게 (나이를) 익어가야 하는가? 아버지의 ‘흑역사 유물’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맥없이 우울해진다. 어찌 매미소리조차 들리지 않은가. 오직 대지大地만이 불타 오르고 있다. 말복과 처서가 지나면 좀 괜찮아지려나? 긴 장마와 거센 폭염, 여름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