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59
4월13일[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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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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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0c_edAfRQ (우석제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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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부활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 비해 열두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에 이어 예수님은 다시 한번 사도단 앞에 발현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주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바 있지만, 아직도 스승님의 부활에 대한 큰 의구심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후 그들의 불신과 의구심에 대해 벼락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자네들 보자 보자 하니 참으로 한심하고 너무하네. 내가 공생활 기간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내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자네들은 하나같이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가? 제발 정신들 좀 차리게!”
그러나 예수님께서든 절대 호통을 치시거나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따뜻한 목소리로 제자들의 안부를 물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
이어서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향해, 정 그렇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라며 못 자국이 아직도 선연한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승님의 손과 발에 남은 뚜렷한 못 자국을 확인한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확고한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손수 발라 드셨습니다.
아직 식사 시간도 아니고,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아있는 불신과 의혹을 떨치도록 도와주기 위해 생선 한 토막을 맛있게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강조하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진실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시처럼, 유령처럼 발현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이 없다면 수난도, 죽음도 빛을 바랩니다. 주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부활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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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IIfnovFo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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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경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드디어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도들은 많은 이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또 음식도 먹어 보이십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대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몸소 증명하시기 위해 사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 말씀엔 무엇이 쓰여있을까요? 하느님께 순종하면 부활의 영광을 누린다는 말씀이 써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당신 스스로 이루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로소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곧, 하느님께 순종하면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스스로 증명해내면 그 사람의 말은 성경이 됩니다. 말에 권위가 입혀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말에 권위가 없는 이유는 그 말 속에 담긴 죽음과 부활을 몸소 증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튜브에서 동기부여 강사 중에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연설이 있습니다. 바로 레스 브라운(Les Brown)입니다. 그는 사업가에다 백만장자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동기부여 강사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가 자기 생애를 바탕으로 한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스 브라운은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5학년 때 지적 장애 판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4학년으로 유급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습니다. 그는 대학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자신의 삶을 바꿔줄 선생님을 만납니다.
그는 레스 브라운에게 칠판에 자신이 말하는 것을 쓰라고 합니다. 레스는 자신이 선생님의 학생도 아니고 자신은 정신지체자이기 때문에 교육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은 다시 하지 말게. 누군가의 의견이 자네의 현실이 될 필요는 없는 거라네.”
레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말합니다. “레스 브라운, 삶에서 가치 있는 어떤 것을 하고 싶으면 굶주려야 해!” 레스는 그 말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워싱턴 선생님, 저는 DJ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DJ가 되는 걸 매일 연습해라!”
지금은 가진 것이 없고 직업도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능력이 없는 것보다 기회가 오기 전에 능력을 키우는 게 낫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자신을 패배자로 여겼고 교육 불가로 여겼던 레스 브라운의 삶은 이 순간부터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계발하면서 마이애미 해변의 WNB에 DJ로 지원하였습니다. 밀튼 버터볼이란 간부를 찾아갔지만 당연히 그를 거절하였습니다. 방송 일도 해본 적이 없고 대본을 써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워싱턴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대부분 사람은 부정적이어서 승낙하기 전에 일곱 번은 거절할 거야. 다시 돌아가게.” 그래서 그다음 날도 찾아갔습니다. 정직당하거나 해고당한 직원이 있을까 봐 찾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 버터볼 씨는 브라운을 미친 사람 취급하였습니다. 물론 그다음 날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버터볼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됐네. 저기 있는 커피나 가져오게!”
그렇게 취직이 되었고 조금씩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굶주리세요. 자기 내면의 위대함을 알기 시작하면, 여러분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이 축복받고 있다고 여기고, 목표에 도달하는 걸 좋아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여러분 중 한 명이라도 ‘당신은 위대하고 그 위대함을 드러낼 책임이 있다’라는 말의 본질을 파악했다면 당신은 부모님과 학교를 자랑스럽게 만들 수 있으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세상은 예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새로운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죠. 멈추지 마세요. 멈추지 마세요.”
그의 강연은 마치 성경 말씀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말대로 굶주렸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성경은 모조리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그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에 능력과 권능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의 말이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의 내용이 담긴 성경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우리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도 권위가 있으려면 말씀을 믿고 굶주리고 결국엔 배부른 부활의 삶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말도 성경 가르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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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넷플렉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를 방영하였습니다. 내용이 다소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시간을 내서 보았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이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4가지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창시자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유교는 공자,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기독교는 예수님입니다. 창시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통의 문제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창시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종교가 됩니다. 둘째는 경전입니다. 불교는 불경, 유교는 사서삼경, 이슬람교는 쿠란, 기독교는 성경입니다. 경전은 대부분 창시자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경전은 내비게이션과 같아서 삶의 길에 이정표가 됩니다. 셋째는 사회성입니다.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불교는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극락왕생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인의예지를 이야기합니다. 충과 효를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는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넷째는 죽음이후의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는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사이비 종교는 기존 종교의 ‘틀’을 가져와서 나름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갈증을 채워주었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가져와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예배와 행사는 화려했습니다. 이적을 체험하기도 하였고, 기쁨을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과 계명에 충실했던 것처럼 교리에 충실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체험을 기꺼이 나누었고,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에는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자리에 교주가 있었습니다. 그런 교주에게는 겸손과 헌신이 없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갈증을 성과 재물로 채우려 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사랑이 아닌 엄격한 규율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이탈한 신자들에게 대한 폭력이 있었습니다. 교주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신자들에 대한 폭력이 있었습니다. 노동력의 착취도 있었습니다. 방송국에 난입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셋째는 익명성에 숨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략선교라는 말을 하면서 거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교주의 말이라면 사회의 공동선에 위배되는 일도 하는 맹목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하려고 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서품을 받은 사목자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합리화 하고, 뉘우침이 없다면 서원을 한 수도자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에 허물이 없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이적과 표징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평화입니다. 욕망을 채우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비우면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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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호승 시인은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만 집을 짓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위태롭게 보이는 둥지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았어도, 새들은 바람이 없는 날에 편하게 집을 지으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둥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고치에 있는 나비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밖에서 고치를 열어주면 나비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고치를 열고 나와야만 날개에 힘이 생겨서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엉덩이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다리의 근육도, 팔의 근육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려면 그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는 엉덩이가 아팠는데 어느덧 아픈 줄 모르고 타게 되었습니다. 다리와 팔이 아파서 경치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쁜 꽃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이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짓듯이, 삶은 폭풍우 속에서도 항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잔잔한 파도는 결코 강한 항해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들도 모두 지난겨울 눈보라를 맞으면서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108배’와 같은 고행이 있습니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 구원받으려는 염원입니다.
묵주기도에 ‘고통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수고(受苦)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세상의 것들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의 부활을 애써 외면하고 감추려했던 율법학자와 대사제의 삶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면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와 같은 삶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베드로 사도처럼 변화된 삶이 아니라면 타인을 위한 수고의 삶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기쁨의 삶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찾으려는 열망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처럼 가슴 벅찬 감동의 삶이 아니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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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35-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하였다. 부활은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셨다.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신다.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하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제자들의 사명을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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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6-43)
이 이야기를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우리는 처음에는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에게 만져 보라고 하셨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 분명히 그분은 유령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혹시 사도들이 예수님의 유령을 보았을 뿐인데도,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의심에 대한 반박이기도 합니다.
또 세속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강하게 희망하고 염원하다가 어떤 심리적인(영적인) 현상을 겪은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안 믿을 이유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는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다.” 라고 증언했고, 자신들의 증언이 진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는 ‘사도들의 심리 상태’를 보면, 또는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기쁨’이 아니라 ‘놀라움’과 ‘어리둥절함’입니다. <사도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때는 ‘예수님 부활 직후’가 아니라, ‘예수님 승천 후’입니다.(루카 24,52) “참으로 기뻐하게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또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는,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무서워했다.”입니다. 사도들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긴 했는데, 아직 부활은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서워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라고 해도, 유령으로 나타나면 무서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별의 아픔과 슬픔이 너무 커서 유령이라도 보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서 나타나는 것과 유령으로 나타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만져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바로 그 예수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것도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부활의 성격을 배우게 됩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시고, 수난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부활하셨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으로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이 육체가 있는 분이시다.
3) 그러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즉 인간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문이 잠겨 있는데도 갑자기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다가 금방 사라지시고, 예루살렘에 나타나셨다가 엠마오에도 나타나시는 등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라는 말을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성경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 신앙’으로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부활 신앙 없이 읽으면 그냥 옛날이야기 책이 될 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덕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이해하고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사도들의 경우에는 반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먼저 있었고, 그 만남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자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달음과 신앙에 도달한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셨는데, 그냥 임무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그 힘을 주셨습니다.(사도 2,4)
<예수님은 일을 시키기만 하고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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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서 루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발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24,35 참조)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면서 어제와 오늘 복음의 연속성은 강조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열한 제자와 동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겪었던 두 제자의 부활 체험도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열한 제자와 동료들 안에는 아직 여러 의혹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의혹”으로 옮긴 그리스 말 ‘디아로기스모이’는 부활을 거부하는 비판적이거나 반대적인 생각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구약 성경과 연결지어 설명하십니다. 이에 따르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 성경에서 예고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특별히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을 위한 필연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으로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의 증언과 선포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열한 제자와 동료들은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우리 또한 부활 증언을 전해 듣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의 현존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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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
오늘 복음의 대목은 어제 우리가 들었던 엠마오 제자들의 일화 뒤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오시어 평화를 베푸십니다.
지난 며칠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보다 더 두렵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고 예수님은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영육으로 평화를 되찾아 새 시대에 걸맞는 새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평화를 말씀하시지요. 평화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심어주신 자기다움을 가장 충만히 누릴 때 존재적으로 느끼는 행복일 테니까요.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복음 24장 39절)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 몸을 만져보라고까지 하십니다. 이 접촉은 지금 그들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이 실제 현존하심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분과 제자들의 거리를 좁혀 줍니다. 스승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내면의 심정적 죄의식도 녹여 주는 배려가 될 터이지요.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 정말로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셔서 먹을 것을 요청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스승과 제자가 동고동락한 세월 동안 그들이 가장 빈번히, 허물없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나누었던 행위가 바로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경계심과 의혹, 두려움과 죄책감을 덜어주시려 여러 모로 애쓰시는 듯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복음 24장 45절) 예수님은 생전에 누차 말씀하셨어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메시아의 소명을 깨닫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인간적 지식과 욕망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신비니까요. 스승의 부활까지 체험한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제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복음 24장 48절) 비로소 제자들은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그분 존재와 가르침, 행적과 부활의 영광까지 맛보고 누리고 체험한 진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인"은 세상 사건의 증인과 사뭇 다른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증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체험한 바를 객관적 입장에서 진술하고 증거하는 역할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전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라 사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사명까지 부여받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만납니다.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행전 3장 15절) 굳이 반복할 필요없이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치유 능력이나 언변이 아니라, 모든 일이 성경에 근거해 이루어이진 것이며 자신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증인은 그저 증인일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증인입니다. 곧 그분의 판박이, 따라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증인은 말과 행동, 선포와 능력 등 자기 존재를 총동원해 주님의 영광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무수한 증인들, 증거자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상승과 추락과 충돌의 충격으로 온 존재가 들썩이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주님 사랑의 증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빕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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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베드로 사도는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가 치유한 불구자가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머물고 있고 군중은 불구였던 사람이 걷는 것을 보며 감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는 곳으로 몰려옵니다.
사도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문을 엽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사도행전 3장 12절) 그리고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15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사람들의 무지의 탓도 있지만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려진 ‘수난 받는 메시아’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도는 이제라도 그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당부하며 이런 말을 이어서 이런 말로 마무리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 26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드디어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복음 24장 38절-39절)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손과 발의 상처를 보고서야 주님이신 것을 믿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1) 잡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하시던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그제야 하나 둘 스승의 부활을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 시편에 이르기까지 수난 받는 메시아와 부활에 대한 대목을 설명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반가움보다 먼저 두려움이 앞섭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대로만 산 사람이 귀신을 만난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소문으로만 스승의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죽었던 분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낯설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도 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 앞에 스승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상처들을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시고 식사를 청해서 생선을 잡수기도 하신 것입니다.
서서히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복음 24장 47절-48절)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당신에 관한 성경의 대목들을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끝날 것 같았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제 부활이라는 새로운 출발로 제자들에게 등장합니다.
슬픔에 싸였던 제자들은 기쁨과 희망을 갖게 되었고 또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쁨소식으로 전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 부활을 못 받아들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잡수시는 사랑은 우리 마음도 따뜻하게 만드십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흩어지고 도망치던 그 마음도 한 켠에서는 부끄러움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주님께서는 지난 일들은 침묵하시고 일상생활에서 부활 전이나 후에도 그 사랑에는 변함없으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스승을 만나 뵙는다는 것만큼 기쁘고 위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듯이 묵은 우리가 아니라 이제는 새로움으로 향할 때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던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이제 우리도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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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그분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익튀오스 옵투 메로스 ἰχθύος ὀπτοῦ μέρος)’를 드리자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그것을 잡수신다.(루카 복음 24장 42절-43절) 생선은 당시 일상생활의 양식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셨다.(마태오 복음 14장 9절-11절 / 루카 복음 14장 17절-19절 / 마르코 복음 6장 35절-41절 / 요한 복음 6장 16절-21절)
주님께서 부활 후에 갈릴리 호숫가 뭍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시며 숯불에 물고기를 얹어놓으시고 빵과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다.(요한 복음 21장 9절) 부활 후에도 전처럼 변함 없으심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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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이 열려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사람이 있고,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안에서 그 의도, 본뜻을 헤아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경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실은 물론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뿐 아니라 진실을 모르면서 갖은 추측과 추정을 통하여 사실인 것처럼,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도청,감청’의 문제로 말이 많습니다. 일본 방문 때도 말이 많았는데 서로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감추고 속이기까지 합니다. 떠도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드러난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지혜로운 처신과 절제된 침묵이 필요한 때입니다.
살아가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혹스럽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가 신부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책임을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돌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했지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야 눈이 열려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신 영적인 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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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사람은 두 쌍의 특수 안경을 갖고 있어서 늘 슬픔에 잠겨 있다. 하나는 자신의 허물이나 약점을 엄청나게 확대하는 돋보기 안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성공을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쥐고 볼 때처럼 무척이나 작아 보이게 만드는 안경이다.”
여러분도 이런 안경을 쓰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이런 안경을 쓰고서는 자기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허물과 약점은 크게 보이고, 성공은 너무나 작아 보이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안경을 써야 자기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렸을 때, 제 위로 형, 누나들이 모두 안경을 썼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공부 잘하는 것처럼 보였고, 유행을 따르는 멋쟁이로 생각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형제 중에 저만 안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 소외감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형, 누나 몰래 안경을 훔쳐 썼습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어지러웠습니다. 제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종종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 등 밑으로 얼굴을 넣어 불빛을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과 한 달 만에 양쪽 1.5의 시력이 0.5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 기쁜 마음으로 안경을 맞춰서 쓸 수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제 눈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당시의 행동을 크게 후회합니다. 그때 조금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했다면 지금처럼 안경 쓰는 불편함을 겪지 않았을 텐데 싶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허물이나 약점을 크게 보고, 성공은 작게 보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잘못을 많이 하고, 때로는 주님 뜻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도 사랑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라고 말씀하시며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또 당신 손과 발에 있는 수난의 표지를 보여주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도 잡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도들이 놀라지 않도록 또 유령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살과 뼈를 가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보고 믿도록 해주십니다.
그토록 사랑을 주었지만,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의 뜻을 실천하기는커녕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들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짓고, 또 주님의 뜻을 배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계속 기회를 주시는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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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루카 24,35-4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나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진리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믿음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희망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사랑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섬김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나눔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돌봄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살림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의로움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증인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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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려움을 몰아내고 마음을 여는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해주신 것은 <마음을 열어주신 것>과 <성경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자들은 마음을 열게 되고 성경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음을 열어라!
창문을 열어젖히듯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마음을 열 수 있다는 듯이 우리는 마음을 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이 마음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말 마음은 내가 여는 것입니까, 열리는 것입니까?
창문과 달리 우리 마음의 문은 누가 밖에서 열 수 없습니다. 만일 억지로 열려고 하면 오히려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습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은 것도 누가 이렇게 억지로 열고 들어와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혼란케 하고, 나를 당황케 할까 봐 그런 거지요.
이렇게 되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이렇게 만드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려면 이런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내가 되거나 내 주변에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열려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마음에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 받은 평생 불구자의 믿음은 불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베드로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구자가 믿은 거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게 한 거라는 얘기고, 불구자가 스스로 믿은 거 같지만 믿게 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주신 거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리 인간은 믿음을 못 주기에 서로 믿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 특히 어떤 젊은이를 보고 ‘그 사람 참 믿음직스럽다!’라고 하는데 믿음직한 사람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이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믿음직한 분이신가, 아니신가? 우리에게 주님은 믿을만한 분이신가, 아니신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분이신가, 아니신가?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나무라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우리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고, 오늘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젖힙시다.
그리하여 오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하시고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도 오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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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수님>
- 사랑과 회개 -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어제 저는 미사중 예물기도 내용에 감동했습니다. 바로 “인류를 위하여”라는 대목 때문입니다. “주님, 인류를 위하여 바치는 이 속량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이루어 주소서.”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와 피조물을 대상으로 날마다 바치는 거룩한 사랑의 미사봉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귀한 사랑의 선물이 미사전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북풍과 태양”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북측에 대한 전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중 생각난 예화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북풍과 태양의 우화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날 거리를 지나가는 나그네의 상의를 벗길 수 있을지를 놓고 북풍과 태양이 힘겨루기 승부를 벌입니다. 먼저 북풍이 바람을 힘껏 불면서 상의를 벗기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위를 싫어했던 나그네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를 힘껏 잡고 있었기에 북풍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데 실패합니다. 다음에는 태양이 햇볕을 서서히 따뜻이 내리쬐니 나그네는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를 벗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양이 힘겨루기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참으로 평범한 우화지만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결국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음을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만이 사람을 회개에로 이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떠난 탕자를 회개에로 이끈 것은 예전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의 사랑의 추억이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만 봐도 회개하라 하지 않아도 사랑을 체험하면 저절로 감동하여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하게 됩니다. 사람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끄는 햇볕같은 사랑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이 그러합니다. 흡사 사랑했던 제자들이 보고 싶어 친히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자 마자 우선 사랑의 선물인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얼마나 필요로하는 평화의 선물인지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문득 우리말 속담으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있어도 자식의 부모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간혹 효성孝誠 깊은 사람들을 만나면 감동하게 됩니다.
그대로 하느님과 사람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진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부활하셔서 우리를 늘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까맣게 잊고 불효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효성하니 십자가의 길 제13처 아름다운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구세주 예수님!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모님 품 안에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마침내 그 품 안에서 죽게 하소서.”
끊임없는 사랑과 회개의 삶으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성모님 품 안에서 죽는 것보다 행복한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출현에 유령이 아닌가 놀라는 제자들에게 온전한 부활임을 깨우쳐 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져보라 하신후 제자들이 구운 몰고기 한토막을 드리자 그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진짜 온전한 영육의 부활임을 상징적으로 일깨워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요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선물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신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선포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일의 증인이다.”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온인류가 선포의 대상입니다. 이래서 가톨릭을 말뜻 그대로 보편적 교회라 일컫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 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바로 제자들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선포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통해 유감없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사랑에 감복하여 온전히 회개한 베드로의 감동에 넘치는 회개를 촉구하는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너무 실감나는 설교 내용이라 그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을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은총이듯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입니다.
사랑과 회개와 복은 함께 갑니다. 사랑을 체험하면 할수록 회개하게 되고 하느님께 날로 가까이 이르게되니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니 바로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여정은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임을,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가는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힘을 주십니다.
“주여, 우리를 살려주소서, 아아 주여, 우리를 잘 살게 해 주소서.”(시편118,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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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오늘 복음(루카24,35-4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엠마오로 떠났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만 갇혀 있어서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직접 당신의 손과 발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들 앞에서 식사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6-47)
오늘 독서(사도3,11-26)는 '베드로 사도가 솔로몬 주랑에서 한 설교'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베드로 사도의 이 말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 였던 사람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15.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발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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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iNqdqadI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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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 36)
부활의
또 다른 이름은
진정한
평화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로
일구어 내신
살아있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폭력이라는
욕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십니다.
사람의 평화는
십자가로 부터
시작됩니다.
평화의 문고리는
십자가입니다.
막연한 믿음은
평화가 아닙니다.
부활의 삶을
가리키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십자가를 닮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삶을
요약합니다.
참된 사랑은
참된 평화가 되고
참된 평화는
참된 사랑이 됩니다.
막혀있던
우리 마음을
흐르게 하는
사랑의 참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은
또 다른 부활의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행복한 식사는
누군가의
사랑과 정성의
선물임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 또한
평화를
일구어 내는
부활의 도구
부활의 사랑이길
기도드립니다.
부활은
십자가로
이루신
일상의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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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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