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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새로읽는 고전:41)
◎지식인 양심으로 제국주의 과거반성
미개인들과 유럽인들을 가르는 기준을 유럽인들은 ‘합리성’으로 보았다.근대는 유럽의 합리주의가 다른 ‘미개인’ 민족들을 동화시켜 나간 역사였다.레비 스트로스는 이런 유럽 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반성한다.
○유럽중심주의서 태동한 인류학
인류학이라는 담론은 19세기에 발생했다.19세기는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볼 때 ‘제국주의’의 시대였다.어떤 의미에서,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이 제국주의라고 하는 정치 체제를 밑받침하기 위해 생겨난 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미개인들을 잘 다스리려면 우선 그들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이렇게 시작된 인류학은 그 뒤 본격적인 과학으로 자리잡으면서 많은 성과를 배출해냈다.
대부분의 인류학 이론은 미개 사회를 ‘비합리적인’ 사회로 보았다.예컨대 레비 브륄은 미개인들이 일종의 ‘전(前)논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보았다.늑대를 토템으로 가진 부족은 스스로를 늑대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이밖에도 많은 인류학자들이 미개인들의 문화를 그 자체로서 분석하지 못하고 유럽인들의 가치관을 투영해서 분석했다.
○문화 지배하는 무의식구조
레비 스트로스는 미개인들의 삶이 철저하게 ‘합리주의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고 보았다.그것은 꼭 미개인들이 합리적이어서라기보다는 인류의 무의식 구조가 모두 같기 때문이다.레비 스트로스는 미개인들의 삶을 기능주의적으로 설명한 영국 인류학자들에 반대해,미개인들의 삶을 ‘구조주의적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어떤 지역에 사는 세 부족이 각각 곰,독수리,수달을 토템으로 한다면,과거의 인류학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곰 사이에는 모종의 실질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다.이것을 어떤 인류학자는 ‘동일시(identification)’로 해석해,늑대를 토템으로 가진 부족은 보름달이 뜨면 실제 늑대가 된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는 곰,독수리,수달은 단지 ‘변별적(辨別的)으로’만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다시 말해 독수리라는 토템이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곰과 수달 ‘사이에’ 존재한다는 위상학적(位相學的)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다.그것은 육군 중령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령과 대령 사이에 있음을 말할 뿐인 것과 같다.
토템만이 아니라 우리가 집짓는 방식,음식을 먹는 방식,옷 입는 방식을 비롯해 신화,미술,친족 체계 등등이 모두 일정한 무의식적 구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레비 스트로스의 생각이다.
예컨대 서양인들은 음식을 통시적으로 먹는다.‘에피타이저’가 있고 ‘메인 코스’가 있으며, 음식을 먹은 뒤에는 ‘후식’이 나온다. 반면 한국인들은 공시적인 식생활을 한다.“한 상 가득 차려 오너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한 상에 모든 음식을 담아 한꺼번에 내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화 형성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이런 무의식적 구조를 드러내는데 한 평생을 바쳤다.
○분열된 현대에서 공통점 무엇
서구인들은 서구 바깥의 문명을 모두 ‘야만적인’것으로 보았다.그리고 한 손에는 총을,다른 한 손에는 ‘바이블’을 들고서 서구 이외의 나라를 정복해 왔다.이것이 ‘제국주의’다.
오늘날에도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는 상당 부분 소멸했지만,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제적,문화적 제국주의가 팽배하고 있다.특히 미국은 오늘날 전세계를 점령하려는 야욕에 불타고 있다.영어와 미국 문화가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알제리와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들을 침탈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과거를 지식인의 양심을 가지고서 반성하고 있다.또 얼핏 보기에 현저하게 다른 문화 형태들이 사실은 동일한 추상 구조에 입각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함으로써,모든 것이 분열되어 있는 현대에 있어 인류에게 공통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슬픈 열대’는 현대인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고전일 것이다.
<이정우 서강대 철학과 교수>
https://naver.me/FlzflQju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요약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1930년대와 40년대에 떠난 브라질 오지 탐험의 경험을 풍부한 인문학적인 통찰과 더불어 기록한 기행문이다.
작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1908년 ~ 2009년)
발표 1955년 장르 기행문
9부 3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내용은 브라질 오지에 사는 인디언들의 생활을 연구하러 떠났던 탐험의 경험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당시 레비스트로스는 철학자에서 전향한 인류학자로서 『친족의 기본구조』(1949년)를 비롯하여 여러 연구업적을 발표한 상태였다. 좀 더 일반적인 대중을 겨냥해 집필된 이 책은 그 성격을 분류하기가 애매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행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행문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적인 여정과 일화들을 다루고 있는 자서전적인 성격도 띠고 있으며, 구조 인류학에 대한 인식론적인 정당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학문적 저작이다.
그런가 하면 서양과 다른 문명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는 에세이이기도 하다. 이 다채로운 성격으로 인해 이 작품은 레비스트로스의 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훨씬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슬픈 열대’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는 이 작품에서 서구인들의 경박한 이국취향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식인풍습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편견만이 아니라 ‘선량한 야만인’에 신화도 실제 브라질 원주민들의 진면모를 이해하는 데는 방해가 될 뿐이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서구식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레비스트로스는 열대지방의 원주민들이 그들의 환경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탁월한 문화가 가지고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그들의 조화를 깨뜨린 서구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루마니아의 종교철학자 엘리아데는 이 책을 레비스트로스의 주저로 손꼽았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종종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인류학자의 직업적 습관을 벗어나, 카두베오 족의 그림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에 관해 성찰하거나, 이슬람교와 힌두교와 불교의 대립에 관한 폭넓은 사유를 전개하기도 한다. 『슬픈 열대』는 그동안 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에 의해 많이 거론된 반면, 문학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자나 인문과학의 서적에 나타난 글쓰기의 독창성과 재능을 주목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저서 중의 하나이다.
작품요약
Indiens Bororos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 첫 번째(1~3부)는 여행을 떠나게 된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자신이 인류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지게 된 과정을 분석하고, 브라질로 향했던 이전의 여행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전쟁 중인 1941년,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인물들인 앙드레 브르통 등과 함께 마르세유에서 마르티니크로 가는 배에서 겪었던 일들을 세세하고 익살맞게 들려준다. 그런가 하면 바다 위에서 만난 황혼의 풍경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두 번째 부분(4~8부)는 1935년 그가 처음 브라질에 도착하여 행한 지질 연구의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다.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크와라족, 투피카와히브족 등 인디언들의 땅에서 작가는 구조적 분석 방법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 종족들의 전통적인 가옥 배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전범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이 구조들은 친족 관계나 신화, 사회성 코드 등 처음에는 다양하고 일관성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해석하게 해 주는 열쇠였다.
세 번째 부분(9부)은 ‘귀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우회’라고 할만하다. 그는 남미에서 유럽으로 곧장 돌아오는 대신 아시아 쪽으로 둘러왔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오늘날엔 이슬람화되어 있는 파키스탄의 불교 유적지, 서양의 휴머니즘에 도전하는 인도의 문명을 보여주는 콜카타, 문명들의 에토스에 관해 성찰하게 만들었던 미얀마의 마을 등을 들른다. 저자는 어떻게 인간을 조화로운 우주 및 다른 인간들과 통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대해서 성찰한다.
작품 속의 명문장
기계문명이라는 덫에 걸려든 불쌍한 노획물인 아마존 삼림 속의 야만인들이여. 부드러우면서 무력한 희생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라지게 한 운명을 이해하는 것까지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런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대들의 모습을 대신하는 총천연색 사진첩을 자랑스레 흔들어대는 요술, 당신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요술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대중은 사진첩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그대들의 매력을 가로챌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대들을 파괴시켰다는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대중은 마치 신들린 것 같이, 이미 일찍이 그대들이 굴복당한 일까지 있는 역사 속에서 향수 어린 식인풍습을 추구하고, 그 충동을 그대들의 환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고는 베기지 못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책의 첫 구절에서 “나는 여행이나 탐험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무분별한 탐험이 아마존 인디언들의 존립을 위험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져오는 피상적이고 왜곡된 정보는 서양인들의 자기만족적인 편견을 강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인들에게 매우 풍요로운 지혜가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도록 촉구한다. 그에게 구조인류학은 이들의 고유한 논리를 내재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적 방법이었다.